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신원범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2> {{{#!wiki style="margin: -6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1 신원범}}}[br]愼元範'''}}}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신원범.jpg|width=100%]]}}} || || ''' 자 / 호''' ||찬두(贊斗) / 근암(勤菴) || || '''본관''' ||[[거창 신씨]][* 통례공파 31세 범(範) 항렬.] || ||<|2>'''출생''' ||[[1908년]][* 거창신씨인터넷족보 4권 268쪽에는 1901년생으로 등재되어 있다.] [[2월 6일]] || ||[[전라남도]] [[영암군]] 북일시면 노노리[br]{{{-2 (현 [[전라남도]] [[영암군]] [[덕진면]] 노송리 노노동마을[* [[거창 신씨]] 집성촌이다. [[신승남]] 전 검찰총장도 이 마을 출신이며, 독립유공자 [[신일선(독립운동가)|신일선]]과 [[교보생명그룹]] 초대 회장 [[신용호]] 형제는 옆 동네인 송내마을 출신이다.] 175번지[* [[https://theme.archives.go.kr/next/acreage/viewCadastreDetail.do?packid=0000192527&docid=0007049900&mngno=BJCA482064&type=12&want=1&formType=keyword&rtURL=%2facreage%2flistKeywordSearch.do%3fpage%3d2%5ekeyword%3d%25EB%2585%25B8%25EC%2586%25A1%25EB%25A6%25AC%5earch_tp_id%3d12|1915년 작성된 지적원도]]에 따르면, 이 지번의 필지는 1915년 당시 신원범의 아버지 신성립(愼成立, 족보명 신덕성(愼德晟), 1885. 10. 26 ~ 1969. 7. 2)의 소유였다.])}}} || ||<|2> '''사망''' ||[[1970년]] [[8월 5일]][* 대전현충원묘적부에는 4월 25일에 별세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고, 거창신씨인터넷족보 4권 268~269쪽에는 1968년 2월 5일에 별세한 것으로 등재되어 있다.] || ||[[전라남도]] [[영암군]] || ||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568호 || || '''상훈''' ||건국포장 추서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10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신승남]] 전 [[검찰총장]]은 5촌 당질(堂姪)이다. == 생애 == 1908년 2월 6일 전라남도 영암군 북일시면 노노리(현 영암군 덕진면 노송리 노노동마을 175번지)에서 아버지 신성립(愼成立, 1885.10. 26 ~ 1969. 7. 2)[* 족보명은 신덕성(愼德晟).]과 어머니 [[함평 이씨]](1882 ~ 1969. 4. 30)[* 이홍서(李洪緖)의 딸이다.] 사이의 3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932년 6월 덕진면 영보리 [[https://terms.naver.com/entry.nhn?cid=40942&docId=1196839&categoryId=39201|영보정]](永保亭) 일대에서 김판권(金判權), 최판옥(崔判玉) 등의 지도하에 동료 70여 명과 함께 소작권 이전의 부당함과 일제의 지주 옹호를 규탄하는 시위를 전개하였다. 김판권은 일찍이 [[도쿄]]에 있으면서 1920년대 초부터 신사상에 심취하였고, 1931년 7월 고향인 영암군 덕진면 영보리로 돌아온 뒤로는 최판옥, 곽명수 등과 교유하면서 신사상의 연구와 운동방침에 대해 논의하였다. 이들은 1932년 5월 1일 [[메이데이]] 기념일에 경계가 엄중하여 이를 기념하지 못한 것을 유감으로 여겨 음력 5월 1일에 해당하는 같은 해 6월 4일에 시위운동을 하고 농민층을 규합할 것을 계획하였다. 신원범은 이에 동조하여 운암리와 백계리 방면에서 소작문제가 발생하고 있음을 규탄하며 큰 북을 울리고 나팔을 불며 노동가를 크게 외치며 대오를 지어 산을 내려와 운암리 방면을 향해 시위행진하였다. 이로 인해 신원범은 체포되어 영암경찰서에 구류되었으며, 1933년 6월 22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소위 [[주거침입죄|가택침입]] 및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에 대해 예심이 종결되어 [[http://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2440&evntId=0034992450&evntdowngbn=Y&indpnId=0000023441&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광주지방법원 공판에 회부되었다]]. 그해 9월 29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 형사부에서 소위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 및 [[업무방해죄|업무방해]] 혐의로 [[벌금형]] 50원(납부치 않을 시 50일간 노역장에 유치함)을 [[http://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2440&evntId=0034992517&evntdowngbn=Y&indpnId=0000023503&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선고받았으며]], 이에 공소하였으나 1934년 3월 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가택침입 및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에 대해 벌금형 50원(완납치 않을 시 1원당 1일씩 노역장에 유치함)을 그대로 [[http://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1573&evntId=0034985411&evntdowngbn=Y&indpnId=0000016875&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선고받아]] 결국 50일간 노역장에 유치되었다. 출옥 후에는 조용히 지내다가 [[8.15 광복]]을 맞았으며, 1970년 8월 5일 전라남도 영암군에서 별세하였다. 201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포장에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2012년 11월 3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에 이장되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거창 신씨]][[분류:영암군 출신 인물]][[분류:1908년 출생]][[분류:1970년 사망]][[분류:건국포장]][[분류: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