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손처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분류:동진 및 오호십육국시대/인물]][[분류:359년 출생]][[분류:411년 사망]][[분류:항저우시 출신 인물]] [include(틀:송서)] [include(틀:남사)] [목차] == 개요 == 孫處 (359년 ~ 411년) [[동진]]의 장수로 자는 계고(季高)이다. == 생애 == 회계군(會稽郡) 영흥현(永興縣) 출신이다. 손처는 유유가 [[손은(동진)|손은]]을 토벌할 때 유유를 따랐으며, 유유가 건강성을 평정한 뒤 진무장군(振武將軍)으로 임명되고 신이현오등후(新夷縣五等侯)로 책봉되었다. 손처는 유유가 [[남연]]을 정벌할 때 선봉에 서서 전공을 세웠다. 유유가 남연을 정벌한 틈을 타서 [[노순]]이 반란을 일으키자, 손처는 석두(石頭)에서 울타리를 치고 월성(越城)과 사포(查浦)에 진수하며 신정(新亭)에서 노순을 물리쳤다. 이때 유유는 손처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노순을 물리치려면 먼저 노순의 소굴을 함락시켜서 노순이 도망칠 때 투신할 곳이 없게 해야 하오. 경이 아니면 이 임무를 성공할 수 없소. 손처는 유유의 명을 받아 3,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바다를 건너 번우(番禺)를 습격했다. 노순은 해로를 방벽으로 삼지 않았으나 손처가 번우로부터 10여 리 떨어진 곳에서 군대를 이끌고 동쪽 요충지를 습격했음에도 이를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순의 군대는 1,000명이었고 방비가 매우 견고했는데, 손처는 먼저 노순의 군함을 불태우고 상륙했다가 안개가 낀 틈을 이용하여 사면으로 성을 공격하여 번우를 함락하였다. 또한 이때 노순의 아버지 노하(盧嘏), 장사 손건지(孫建之), 사마 우왕부(虞尫夫) 등이 시흥으로 달아났다. 뒤이어 진무장군 심전자 등을 파견하여 시흥, 남강, 임하, 시안을 공략했다. 노순은 좌리(左里)에서 달아났음에도 아직 병력이 막강했기 때문에 광주(廣州)를 습격하였다. 손처는 20여 일 동안 전투를 벌여서 노순을 물리쳤으며, 1만여 명을 죽이고 울림(鬱林)까지 노순을 추격했으나 이때 병에 걸려서 더 이상 추격하지 못했고 노순은 결국 교주(交州)로 달아났다. 손처는 411년 진강에서 사망하여 용양장군(龍驤將軍), 남해군태수로 추증되고 후관현후(候官縣侯)로 추봉되어 식읍 1,000호를 받았다. 413년, 유유가 손처의 공훈을 기리는 표문을 올린 뒤 다시 교주자사로 추증되었고 용양장군은 그대로 받았다.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