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서세보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include(틀:진서(남조역사책))] [include(틀:남사)] ||<-2> '''어복환후(魚復桓侯)[br]{{{+1 徐世譜 | 서세보}}}''' || || '''시호''' ||환(桓) || || '''작위''' ||어복현후(魚復縣侯) || || '''성''' ||서(徐) || || '''이름''' ||세보(世譜) || || '''자''' ||흥종(興宗) || || '''생몰''' ||509년 ~ 563년 || || '''출신''' ||파동군(巴東郡) 어복현(魚復縣)[* 오늘날 [[충칭시]] [[펑제현]]] || [목차] [clearfix] == 개요 == [[남북조시대]] [[양(남조)|소량]], [[진(남조)|남진]]의 장수로 자는 흥종(興宗). 파동군(巴東郡) 어복현(魚復縣) 출신. == 생애 == 서세보의 집안은 대대로 형주에 살았으며, 장수를 지낸 집안이었다. 서세보는 용맹하고 힘이 장사였으며, 수전에 뛰어났다. 양나라에서 상동왕(湘東王) 소역이 형주(荊州) 자사로 부임할 때 서세보는 고향 사람들을 이끌고 소역을 섬겼다. 548년부터 [[후경]]이 일으킨 반란으로 인해 양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서세보는 반란을 토벌하고자 참전하여 원외산기상시(員外散騎常侍)로 임명되었다. 서세보는 뒤에 수군을 이끌고 사도(司徒) 육법화(陸法和)의 휘하로 종군하여 적정호(赤亭湖)에서 후경과 교전하였다. 서세보는 이때 별도로 누선(樓船), 박함(拍艦), 화방(火舫), 수차(水車)를 만들어서 수군력을 증강했으며, 함선에 올라 선봉에 서서 후경을 물리치고 후경의 장수 임약(任約)을 사로잡았다. 서세보는 왕승변이 영주(郢州)를 공격할 때 함선에 올라 후경의 선창을 공격하여 후경의 장수 송자선(宋子仙)의 항복을 받아냈다. 서세보는 사지절(使持節), 신무장군(信武將軍), 신주(信州) 자사로 제수되고 어복현후(魚復縣侯)에 봉해져 식읍 500호를 받았다. 이후 서세보는 왕승변의 휘하가 되어 항상 선봉에 섰으며, 고숙(姑熟)에서 후경의 장수 후자감(侯子鑒)을 격파하였다. 552년, 후경의 난이 평정된 뒤 통직산기상시(通直散騎常侍), 형주(衡州) 자사에 임명되고 하동(河東) 태수를 겸임하였다. 554년, [[서위]]가 형주를 침공하자, 서세보는 마두안(馬頭岸)에 진수하여 용주(龍洲)를 점령했고 시중(侍中), 사지절(使持節), 도독강남제군사(都督江南諸軍事), 진남장군(鎭南將軍), 호군장군(護軍將軍)에 임명되었다. 형주가 함락된 뒤 서세보는 후진을 의탁하였다. 555년, 시중, 좌위장군(左衛將軍)에 임명되었다. 진패선은 왕림과 전투를 벌일 때 수전에 대한 것은 모두 서세보에게 맡겼다. 서세보는 능수능란했고 옛 법률에도 해박했으며, 병기를 만들 때 임의로 보완하기도 했고 자신의 기발한 생각을 반영하기도 했다. 557년, 진패선이 소방지로부터 선양을 받아 제위에 오르니 이가 초대 황제인 [[무제(남진)|고조 무황제]]였다. 558년, 서세보는 호군장군으로 전임되었다. 559년, 무제가 붕어하고 무제의 조카인 임천왕 진천이 제위를 이으니 이가 제2대 황제인 [[문제(남진)|문제]]였다. 서세보는 문제가 즉위한 뒤 특진(特進)이 더해지고 우위장군(安右將軍)이 되었다. 560년, 식읍 500호를 더 받았다. 561년, 사지절(使持節), 산기상시, 도독선성군제군사(都督宣城郡諸軍事), 안서장군(安西將軍), 선성 태수로 전출되고 품계가 중이천석(中二千石)이 되었다. 조정으로 돌아와서 안전장군(安前將軍), 우광록대부(右光祿大夫)가 되었다. 서세보는 뒤에 병으로 인해 실명하여 출사하지 못했으며, 563년에 죽어서 본래의 관직으로 추증되고 환(桓)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분류:남북조시대/인물]][[분류:509년 출생]][[분류:563년 사망]][[분류:충칭시 출신 인물]]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