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빌럼 1세(오라녀)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include(틀:역대 네덜란드 총독)] [include(틀:KRO 선정 위대한 네덜란드인)] ||<-2> '''네덜란드 공화국의 스터트허우더[br]{{{+1 빌럼 1세}}}[br]Willem van Oranje''' || ||<-2>{{{#!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1280px-William_I,_Prince_of_Orange_by_Adriaen_Thomasz._Key_Rijksmuseum_Amsterdam_SK-A-3148.jpg|width=100%]]}}} || || '''이름''' ||빌럼 판 오라녀[br](Willem van Orange)|| || '''출생''' ||[[1533년]] [[4월 24일]][br][[신성 로마 제국]] [[나사우]] 딜렌부르크|| || '''사망''' ||[[1584년]] [[7월 10일]] (51세)[br][[네덜란드 공화국]] 홀란트 백국 [[델프트]]|| ||<|4> '''재위''' ||<#E7E7E7>[[오랑주|오라녀]] 공|| ||[[1544년]] [[7월 15일]] ~ [[1584년]] [[7월 10일]]|| ||<#E7E7E7>[[네덜란드 공화국]]의 스타트허우더|| ||[[1581년]] [[7월 26일]] ~ [[1584년]] [[7월 10일]]|| ||<|4> '''배우자''' ||에흐몬트의 안나 ,,(1551년 결혼 / 1558년 사망),,|| ||[[작센 선제후국|작센]]의 안나 ,,(1561년 결혼 / 1571년 이혼),,|| ||[[부르봉 왕조|부르봉]]의 샤를로트 ,,(1575년 결혼 / 1582년 사망),,|| ||루이즈 드 콜리니 ,,(1583년 결혼),, || || '''자녀''' ||필립스 빌럼, 마리아, 안나, [[마우리츠 판 나사우|마우리츠]], 에밀리아, 루이제 율리아나[* [[팔츠 선제후국|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의 어머니.], 엘리자베트, 카타리나 벨히카, 샤를로테 플란드리나, 샤를로테 브라반티나, 에밀리아 안트워피아나, 프레데리크 헨드리크|| || '''아버지''' ||나사우지겐 백작 빌헬름 1세|| || '''어머니''' ||슈톨베르크의 율리아나|| || '''종교''' ||[[개신교]] {{{-2 ([[칼빈주의]])}}} || || '''서명''' ||[[파일:빌럼 1세(오라녀) 서명.svg|width=150]]|| [목차] [clearfix] == 개요 == [[네덜란드 공화국]] 초대 총독([[스타트하우더]] Stadhouder)으로, 본명은 빌헬름 폰 나사우딜렌부르크(Wilhelm von Nassau-Dillenburg). '''네덜란드 [[국부]]'''로, '''빌럼 1세'''로도 불린다. 후대 [[네덜란드 국왕]]이자 방계후손 [[빌럼 1세]][* 그의 아우 나사우딜렌부르크 백작 요한 6세 후손이다. 요한 6세는 형이 네덜란드에서 오라녜나사우 가문을 창시해 활약한 것과 달리 아버지의 작위 나사우딜렌부르크 백작을 이어갔는데, 빌럼 판 오라녜의 직계가 [[잉글랜드 국왕]]을 겸했던 [[윌리엄 3세|빌럼 3세]] 사후 단절되면서 그와 가장 가까운 항렬인 요한 6세 나사우딜렌부르크 계열이 네덜란드 국가원수직을 맡게 됐다. 그리고 빌럼 1세는 모계로 침묵공의 후손이다]와 혼동될 여지가 있어 보통은 종교에 대해 의견을 내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해 붙여진 별명이 '침묵공(De Zwijger)'이다. 오랑주 공작의 칭호는 프랑스식 '''기욤 1세'''이며, 그에 따라 오랑주 공작의 풀네임 또한 기욤 도랑주(Guillaume d'Orange)이다. == 일생 == [[1533년]] 지금의 [[독일]] 영토 [[신성 로마 제국]]의 [[나사우]] 백국 딜렌부르크 성에서 나사우딜렌부르크 백작[* [[나사우 가문]]의 차자 계열. 장자 계열이 나사우바일부르크를 통치했고 현 [[룩셈부르크]] 대공 가문이다] 빌헬름 1세 장자로 태어났다. [[1544년]] 사촌 [[오랑주]](=[[오라녜]]) 공, 브레다의 르네가 프랑스와 전쟁 중 전사할 때 빌럼에게 자신의 작위와 영지를 물려준다는 유언을 남기며 르네의 영지인 오랑주와 [[브레다]]를 물려받았다. 이후 그는 본가의 이름 나사우와 상속받은 영지 오랑주 이름을 합쳐 [[오라녀나사우 왕조|오라녜나사우 가문]]을 창시한 뒤 거점을 [[네덜란드]] [[브레다]]로 옮겼다. 그 후 [[브뤼셀]]에서 [[카를 5세]] 여동생이자 [[합스부르크 네덜란드]] 총독인 마리아[* [[보헤미아 왕국|보헤미아]]-[[헝가리 왕국|헝가리]]-[[크로아티아 왕국|크로아티아]] 국왕 [[러요시 2세]]의 왕비. 러요시 2세가 [[모하치 전투]]에서 전사하면서 고모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의 뒤를 이어 바쁜 오빠를 대신해 [[합스부르크 네덜란드]] 총독을 맡고 있었다.]의 후견을 받아 성장했으며, [[카를 5세]]의 총애로 [[1555년]] 대 [[프랑스]] 전쟁 총사령관이 됐다. [[카를 5세]]가 물러나고 [[펠리페 2세]] 밑에서 금양모기사, 국무회의 의원 등을 지내고 [[1559년]] 카토캉브레지 조약의 협상자로 활동해 [[프랑스 왕국|프랑스]]와 [[스페인 제국|스페인]]의 [[이탈리아 반도]] 지배권을 둔 분쟁을 종식시켰으며, [[홀란트]], [[제일란트]], [[위트레흐트]] 총독에 임명됐다. [[1561년]] [[프랑슈콩테]] 총독에도 임명됐다가 [[1566년]] 성상 파괴운동을 강경하게 진압했는데, 빌럼은 [[안트베르펜]]에서 이를 진압했지만 성문을 폐쇄하고 [[스페인]] 군사들이 진입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충성 서약을 거부했다. 이로 인해 영지는 모두 몰수당하고 추방당해 [[1567년]] 딜렌부르크로 망명했으며, [[1568년]] 군사를 일으켜 4월 23일 [[헤일리헤를레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페르난도 알바레즈 데 톨레도|페르난도 알바레즈 데톨레도]]에게 엠스 강둑에서 패하자([[예밍헨 전투]]) 퇴각해 [[프랑스]]로 도망쳤으며, [[1571년]] 페르난도 알바레즈 데톨레도가 세금을 마구 거두어들인 것으로 반발을 사면서 [[1572년]] 4월 1일 '고이센'(바다의 거지들)이라 불리는 집단이 함대를 이끌고 브릴레 항구를 점령하면서 홀란트, 제일란트에서 민중 봉기가 일어나자 이들과 합류한다. 협상을 통해 홀란트, 제일란트의 총독이 되고 [[1573년]] [[칼뱅]]교로 개종했으며, [[1576년]] 겐트 화약이 성립돼 [[네덜란드]] 통일이 이루어졌지만 [[1579년]] [[스페인]] 귀순한 남부의 [[네덜란드]] 귀족들이 아라스(아트레흐트) 동맹을 결성했다. 이에 맞서기 위해 북부 7주에서 [[위트레흐트]] 동맹을 결성하면서 빌럼은 이 동맹을 이끌고 한때 충성했던 [[스페인]]과 싸웠다. [[1584년]] 7월 10일 델프트에서 여동생이랑 부하 선장 로저 윌리엄스와 저녁을 먹고 자택에서 내려오다 [[가톨릭]] 교도인 발타자르 제라르의[* [[프랑스]]인으로 [[펠리페 1세]] 지지자였기에 빌럼이 [[펠리페 1세]]의 반역자라서 죽여야 하고 그한테 걸린 현상금이 탐나서 암살에 나선 것이다. 특히 제라르는 빌럼을 안심시키기 위해 일부러 빌럼의 동맹인 [[룩셈부르크]] 공작의 군대에 2년간 복무해 [[프랑스]] 군인으로 위장해 [[네덜란드]]로 입국했다. 하지만 빌럼을 만날 기회가 생기지 않자 일부러 훔친 [[룩셈부르크]] 공작의 인장을 이용해 [[프랑스]] 귀족으로 위장해 빌럼한테 접근했으나 빌럼은 [[프랑스]]의 동맹들한테 문서를 전달하려고 [[프랑스]]로 돌아가 인장을 백작한테 돌려주라며 내보내 버렸다. 그래서 제라르는 [[네덜란드]] 군인한테서 몰래 산 [[권총]]으로 죽이기로 결정해 사전에 빌럼의 집 구조를 탐문하여 알아낸 다음 빌럼이 집에서 나오기만을 기다렸고 이게 맞아떨어지고 말았다. 당시 권총은 한번에 한발만 쏠수 있기에 제라르는 총을 2개나 사서 한번에 권총 2개를 쏘아 죽였다. 이 총탄 자국은 보존되어 있는 빌럼의 저택에도 헌재까지 그대로 남아있다] 저격에 맞아 사망했다. 쓰러질 때 여동생의 품에서 사망했는데 유언은 '신이여 내 영혼을 가엾게 여기소서. 신이여 이 불쌍한 이들을 가엾게 여기소서'였다. 제라르는 범행을 저지르고 도주하다 체포되고 [* 도주 때 제라드는 물에 빠져 튜브 용도로 쓸 돼지 방광과 말까지 준비할 정도로 치밀했지만 쓰레기 더미에 걸려 넘어지면서 쫓아오던 병사들한테 잡혔다] 심한 고문을 받은 뒤 7월 13일 처형됐다.[* 제라르가 받은 고문은 굉장히 잔혹했는데 피투성이가 되도록 채찍질을 한 것 외에 오른손을 와플 굽는 틀에 넣어 구웠고 양쪽 엄지발가락에 150kg의 추를 매달아놓았으며 발보다 작은 개가죽 신발을 신겨 불을 쬐어 발을 조이고 채찍질을 한 상처에 꿀을 발라 염소가 핥게 했다. 그래서 처형 때는 몸이 만신창이가 된 상태였다. 심지어 죽을 때도 제라르는 곱게 죽지 못했는데 머리와 사지가 잘리고 내장과 심장을 꺼내는 끔찍한 최후를 맞이했다. 또한 사후 목과 사지가 공개적으로 효수됐다. 사실 이만큼 빌럼의 암살이 [[네덜란드]]인들에게 큰 충격이었고 제라르가 증오를 많이 받은 것이다. 다만 [[펠리페 2세]]는 제라르가 빌럼을 암살한것에 매우 기뻐하였고 제라르 가족을 불러 위로하며 가족들을 귀족으로 승격시키고 시골 마을 3개를 영지로 줬다.] 묘지는 자택이 있던 [[델프트]]의 [[델프트 신교회|개신교회]]에 마련됐다. 이후 독립투쟁은 아들 [[마우리츠 판 나사우|마우리츠 판나사우]]가 이어간다. [[네덜란드]] 국부로 그의 작위명 '오라녜([[오렌지]])'에서 유래된[* 철자가 같긴 하지만 어원의 유래는 다르다.] [[주황색|오렌지색]]은 [[네덜란드]] 상징색이 됐다. == 여담 == [[문명 시리즈]]에서 네덜란드 문명이 새로 추가된 [[문명 3]]에서 [[문명 5]]에 이르기까지 지도자로 등장한다. 다만 [[문명 6]]에서는 그의 아버지를 조상으로 공유하는 [[빌헬미나 여왕]]이 지도자로 등장한다. [각주]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빌럼 1세, version=89, paragraph=1)] [[분류:오라녀 공]][[분류:스타트허우더]][[분류:1533년 출생]][[분류:1584년 사망]][[분류:라인란트팔츠 주 출신 인물]][[분류:독일계 네덜란드인]][[분류:오라녀나사우 가문]][[분류:델프트 신교회 안장자]][[분류:암살된 인물]][[분류:총기에 죽은 인물]][[분류:건국자]][[분류:화폐의 인물]]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