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복천여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include(틀:송서)] [include(틀:남사)] [목차] == 개요 == 卜天與 (? ~ 453년) 오흥군(吳興郡) 여항현(餘杭縣) 출신. == 생애 == 복조(卜祖)의 아들로 태어났다. 복쳔여는 활을 잘 쏘았고 활을 당기는 힘이 보통 사람의 몇 배나 되었으며, 용모가 엄숙하고 단정해서 크게 웃은 적이 없었다. 복천여는 [[문제(유송)|문제 유의륭]]의 명으로 황자들에게 활쏘기를 가르쳤으며, 몇 년 동안 벼슬이 없이 동액방합대(東掖防閤隊)를 거느렸다. 450년, 장질이 현호(懸瓠)의 구원에 나서고 유흥조(劉興祖)가 백석(白石)을 수비할 때 복천여는 군대를 이끌고 그들의 뒤를 따랐다. 복천여는 뒤에 연후제1대(輦後第一隊)로 옮겼으며, 사졸들을 잘 어루만져서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452년, 광위장군(廣威將軍)으로 임명되고 좌세장(左細仗)을 겸임하였다. 453년, 문제의 태자 [[유소(유송)|유소]]가 문제를 시해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갑작스러운 사태 속에 나훈(羅訓)과 서간(徐罕)은 동정을 살피다가 유소에게 귀부했는데, 복천여는 갑옷을 입을 겨를이 없이 칼과 활을 쥐고 서둘러 부하들을 불러 출진하였다. 이때 서간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하께서 들어오시면 그대는 어떻게 하려고 하시오? 그러자 복천여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하께서 항상 입궁하시는데 이 이야기를 어떻게 지금 하는 것이오? 이것은 그대가 역적이기 때문이오. 복천여는 동당에서 유소에게 활을 쏘았는데 복천여가 쏜 화살이 명중할 뻔했다. 뒤이어 유소의 군사들이 복천여를 공격하여 복천여는 팔이 잘려나가 땅에 쓰러졌고 그대로 살해당했다. 복천여를 따라 유소를 토벌하고자 했던 장홍지(張泓之), 주도흠(朱道欽), 진만(陳滿) 또한 이 과정에서 살해당했다. 유소가 토벌된 뒤 복천여는 [[효무제(유준)|효무제]] 유준에 의해 용양장군(贈龍驤將軍), 익주자사(益州刺史)로 추증되고 장후(壯侯)라는 시호를 받았다. [[분류:송(남조)/인물]][[분류:453년 사망]]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