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방정환(1886)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방정환}}}'''[br]'''方正圜[* [[http://db.history.go.kr/id/npda_1920_09_20_v0003_0540|1920년 9월 20일 동아일보 기사]]에는 方正'''{{{+1 環}}}'''으로 표기돼 있다.]'''}}}}}}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방정환(1886).jpg|width=100%]]}}} || ||<-2>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 || || '''이명''' ||방환(方環) || || '''자''' ||형규(亨奎) || || '''본관''' ||[[온양 방씨]][* 판서공파(判書公派) 36세 정(正) 항렬.] || ||<|2> '''출생''' ||[[1886년]] [[12월 9일]] || ||[[함경도]] [[부령군|부령도호부]] 동면사 마전동[* [[http://onyangbang.kr/bbs/board.php?bo_table=onyang33&wr_id=5156&sst=wr_datetime&sod=desc&sop=and&page=1|온양방씨중앙종친회 근현대인물]]. 1914년 [[부군면 통폐합]] 때 [[함경북도]] [[부령군]] 부거면 마전리가 되었다.][br](現 [[함경북도]] [[청진시]] 마전동) || ||<|2> '''사망''' ||사망년도 미상 || ||사망지 미상 || || '''상훈''' ||건국포장 추서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16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 생애 == 1886년 12월 9일 함경도 부령도호부 동면사 마전동(現 함경북도 청진시 마전동)에서 아버지 방순악(方舜岳, 1854. 9. 3 ~ 1904. 8. 20)과 어머니 [[장(성씨)|울진 장씨]](蔚珍 張氏) 사이에서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04년 아버지 방순악이 별세하자 [[청나라]] [[길림성|길림장군]](吉林將軍) 연길청(延吉廳) [[허룽시|화룡욕분방청]](和龍峪分防廳) 명신사(明新社)[* 現 [[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화룡시]] 둥청진(東城鎭) 밍신촌(明新村).] 충신장령(忠臣場嶺)으로 이주했고, 그곳에서 농업에 종사하며 서당을 운영해 아동들에 대한 민족교육에 힘쓰는 한편, 의원 노릇을 하며 이웃들을 보살폈다. 이후 길림성 연길도(延吉道) [[허룽시|화룡현]](和龍縣) 덕화사(德化社) 유동(柳洞)[* 現 [[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화룡시]] 난핑진(南坪鎭) 류둥촌(柳洞村).]에서 대한의군부(大韓義軍府, 총재 [[이범윤]]) 소속 의군단(義軍團) 유동사무소장 방준규(方俊奎)의 권유로 의군단에 입단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이후 대한의군부 서부지방 총리분국장(總理分局長)에 임명되었고, 1920년 8월 26일 연길도 [[왕청현]]에 주둔 중이던 대한의군부 중대장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73273|허근]](許根)의 지시에 따라 허근이 보낸 서부지방부장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72098|이범모]](李範模)와 함께 조선 국내에서 군자금을 모집할 계획에 대해 협의했고, 이어 이범모에게서 대한의군부의 사무분장(分掌)규칙, 참리부임시지방제(參理部臨時地方制), 군법, 의연금 영수증 및 지원서, 대한민국총부 취지서, 유고문(諭告文), 격고문(檄告文), 의연금 모집령(募集令), 동부 산포대(東部山砲隊) 소식, 통고문(通告文), 훈령(訓令) 등의 대한의군부 관련 문서들을 전달받았다. [[중국인]]으로 변장하기 위해 [[변발]]까지 한 그는, 1920년 8월 29일 화룡현을 출발해 그날 밤 함경북도 [[무산군]] 읍면(現 [[무산군]] 무산읍) 부근의 [[두만강]] 상류 약 5리 가량되는 얕은 여울에 도착했고, 맨몸으로 여울을 건넌 뒤 10리에 걸쳐 산길을 지나 무산군과 [[회령군]] 사이를 관통하는 길로 나왔다. 이어 회령군 근처 두만강 하류 약 2리되는 수성천(輸城川)을 건너 부령군과 청진부 사이에 있는 다갈령(多葛嶺, 487m)을 넘어 부령군 부거면에 도착해 며칠 전 이범모에게서 전달받은 문서들을 주민들에게 배포하고 군자금을 모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군자금 모집 활동에 박차를 가하던 그해 9월 4일 오후 3시에 부령군 부거면에서 약 20리 가량 떨어진 이방령(梨方嶺)에서 청진경찰서 부거주재소 소속 [[타카하시]](高橋) [[순사]]와 조선인 순사 1명의 [[불심검문]]을 받았고, 대한의군부 사무분장규칙 등을 싼 보자기에 대해 조사를 받던 중 도주했다. 그러나 끝내 붙잡혀 [[http://db.history.go.kr/id/npda_1920_09_20_v0003_0540|체포되었고]], 곧 청진경찰서에 송치되었다. 1920년 9월 10일 함흥지방법원 청진지청 검사분국에 송치되었다. 1920년 9월 22일 함흥지방법원 청진지청에서 이른 바 정치에 관한 범죄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0개월형을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4799&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30331&actionType=det&flag=4&search_region=|선고받아]] 이에 공소했으나, 같은 해 10월 25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 바 정치에 관한 범죄 혐의에 대해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2076&evntId=0034972353&evntdowngbn=Y&indpnId=0000004695&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공소가 기각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http://db.history.go.kr/id/ia_2408_1865|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행적 및 사망년월일, 사망지에 대해서는 자료가 미비해 알 수 없다. 2016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부령군 출신 인물]][[분류:온양 방씨]][[분류:1886년 출생]][[분류:몰년 미상]][[분류:건국포장]]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