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발터 베버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include(틀:독일 국방군/장성급 장교)]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1 발터 베버}}}[br]Walther Wever'''}}}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AAF-Luftwaffe-p62.jpg|width=100%]]}}} || ||<|2> '''출생''' ||[[1887년]] [[11월 11일]] || ||[[프로이센 왕국]] 브롬베르크[br](現 [[폴란드]] 쿠야비포모제 주 [[비드고슈치]]) || || '''사망''' ||[[1936년]] [[6월 3일]] (48세) || || '''복무''' ||[[독일 제국군|독일 제국 육군]][br]→ [[독일 국가방위군]] 육군[br]→ [[독일 공군(나치 독일)|나치 독일 공군]] || || '''최종 계급''' ||[[중장]] || || '''주요 참전''' ||[[제1차 세계 대전]] || || '''주요 서훈''' ||알브레히트 기사 훈장 1등급[br]호엔촐레른 왕가 훈장[br]프리드리히 기사 훈장 1등급[br]철십자 훈장 1·2등급 || [목차] [clearfix] == 개요 == [[제2차 세계 대전]] 직전에 [[독일 공군]]의 초대 [[참모총장]]을 역임한 군인으로 최종 계급은 [[중장]]이었다. == 생애 == === 젊고 유능한 프로이센 장교 === 발터 베버가 태어났을 때, 그의 고향은 [[포젠]]이다. 현재 [[폴란드]] 영토의 서부에 속해있지만 당시만 해도 독일 제국 영토였던 것이다. 그의 할아버지는 [[프로이센]] 왕국의 최고 감찰관이라는 고위 관리직을 지낸 카를 게오르크 베버였으며, 아버지는 [[베를린]] 은행장을 지낸 아르놀트 베버였다. [[아비투어]]에 합격한 후 대학으로 가는 대신 군사학교에 들어가 군인이 되는 길에 발을 내디뎠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발터 베버는 일선이 아닌 후방에 있는 사령부에서 참모장교로 근무하며 방어 대형을 고안하거나 [[연합군]]에 대한 반격 작전을 입안하는 작업을 보좌하면서, 전략적인 안목을 키우게 된다. [[1917년]]부터는 [[파울 폰 힌덴부르크]] 원수가 이끄는 육군 최고사령부의 작전과에 전속되었다.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퇴위를 결정했을 때 그에게 [[네덜란드]]로 망명할 것을 권고한 것은 베버 혼자였다고 한다. 그는 또한 [[바이마르 공화국]] 정부에서 새롭게 민주적으로 선출된 권력자를 [[황제]]를 섬기듯이 잘 따를 것이라며 [[공화제]]를 찬성한 장교 중 하나이기도 했다. [[1919년]]에 [[파울 폰 힌덴부르크]]의 명령에 의해 참모차장 [[에리히 루덴도르프]]의 회고록를 필기했다. 그런데 그가 제 I 군관구 참모부에 전속을 간 싯점에서 [[카프 반란]]이 일어났다. [[바이에른]] 출신이 아닌 장교로서는 처음으로 사단 참모 직위가 주어질만큼 유능했던 그는 [[뮌헨]] 봉기도 겪게 된다. === 군에 계속 남게 되다 === 항복 이후, 대부분의 장교들은 제대 조치되었지만 베버는 그 꼼꼼한 실무 능력 덕택에 [[병무청]]에 복직되었고, [[1931년]]부터는 육군 훈련부장을 맡게 된다. 이렇게 육군에 복무하고 있던 베버는 [[1933년]] 9월 1일에, 새롭게 창설될 [[독일 공군]]을 준비하는 기관인 제국항공성으로 전출 명령을 받고 항공통수국장에 취임했다. [[1935년]] 3월부로 [[제3제국]]에 [[징병제]]가 부활되면서 이제 모든 가면을 벗어던진 [[루프트바페]]는 초대 공군 참모총장으로 발터 베버를 선택하였다. === 전략폭격 지지자 === [[이탈리아]]의 항공 이론가 [[줄리오 두헤|지울리오 두헤]] 장군의 사상에 깊이 공감하고 있던 베버는 참모총장이 되자마자 항공전의 전략 전술을 철저히 분석하는 기관을 만들고 이론을 발전시켜 현대적인 공군력 건설에 필요한 기술적 선행 과제들을 결정했다. 공군의 작전 운영 목적을 충족시키는 것은 [[급강하 폭격기]]와 전투폭격기, 경폭격기지만, 종래 전쟁의 승리를 가져올 무기는 [[전략폭격기]]라는 이론을 강하게 주장하며 주변 장교들도 설득시켰으나, 시대가 시대인 만큼 반신반의하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터 베버는 상관 [[헤르만 괴링]]의 영향력 아래에 놓여있는 자신의 제한적인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풀어나가려고 했다. 이리하여 베버 장군은 우랄 폭격기 계획이라고 명명한 전략폭격기의 개발 사업에 나서게 된다. 이렇게 해서 나치 독일도 [[Ju 89]]나 [[Do 19]] 같은 시제 중폭격기를 갖게 되었으나, [[아돌프 히틀러|히틀러]] 정권은 오로지 눈앞에 보이는 결과에만 관심이 있었고, 당시 독일의 한정된 국력으로는 전술 폭격기로 가까운 장래에 전쟁을 벌이는 쪽으로 전략을 세우고 있었던 탓에 안그래도 많은 자원이 필요하고 기술적으로 어려운 중폭격기 개발에는 속도가 붙지 않았다. 결국, 그가 죽기 몇 주전에 이미 우랄 프로젝트는 중지되고 있었으며, 그는 벽에 부딛히고 좌절하게 된다. === 의문의 사고사 === [[1936년]] 6월 3일, 직접 조종간을 잡고 몰던 연락기 [[하인켈]] He 70가 [[드레스덴]] 근교의 비행장에서 이륙한 직후 추락했고, 베버는 동승한 기술장교와 함께 사망하고 말았다. 이 사고 후 원인 분석에서 알려지게 된 것은 이륙 전에 모두 제거하게 되어 있는 조종타면의 고정핀이 완전히 제거되지 않은 것이었다. 승강타에 고정된 채로 발견된 핀은 이륙 직전 점검을 소홀히 했거나, 누군가 고의적으로 끼워놓았다는 의심이 들만한 정황이었으나, 결국 사건은 사고사로 정리되었다. == 기타 == === 가족 === 베버는 아들이 둘 있었는데, 둘 모두 [[공군사관학교]]에 입교해 2차 대전 동안 전투기 조종사로 복무했었다. 아버지와 같은 이름이 붙여진 둘째 아들 발터 베버(1923. 1. 16~1945. 4. 10) [[중위]]는 250회나 출격하며 적기 44대를 격추한 [[에이스(전투조종사)|에이스]]로서 1945년 4월에 [[철십자 훈장|기사철십자장]]을 수여받기도 했다. [[JG 51]]에서 제3비행중대장으로 활동하던 때에는 [[Il-2]]를 5분간 3대나 격추시킬 정도로 숙련된 전투기 조종사였던 아들 베버는 [[1945년]] 2월에 [[JG 7]]로 옮겨져 제트전투기 [[Me 262]]로 갈아타고 [[독일 본토 항공전]]에서 계속 싸웠으나, 패전을 맞기 직전인 4월 10일에 [[베를린]] 근교의 노이루핀(Neuruppin) 상공에서 [[연합군]]의 [[P-51]] 전투기에게 격추당해 전사하고 말았다. [[분류:제1차 세계 대전/군인]][[분류:독일제국군/군인]][[분류:독일 국방군/인물]] [[분류:1887년 출생]] [[분류:1936년 사망]][[분류:포즈난 출신 인물]][[분류:독일의 실향민]]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