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박지원(독립운동가)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밀양 박씨]][[분류:밀양시 출신 인물]][[분류:1893년 출생]][[분류:1966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국장]] || 성명 ||박지원(朴志源) || || 호 ||인숙(仁淑) || || 본관 ||[[밀양 박씨]] || || 생몰 ||[[1893년]] [[11월 4일]] ~ [[1966년]] [[2월 28일]] || || [[출생지]] ||경상도 밀양도호부 하서면 삼태리 당두[br](현 [[경상남도]] [[밀양시]] 무안면 삼태리 당두마을)[* [[밀양 박씨]] 집성촌이다.][* 출생지인 삼태리 43번지에는 박지원의 생가터임을 알리는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https://blog.naver.com/miryangsi/221657249580|#]]] || || 종교 ||[[기독교]] || ||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 [목차] == 개요 ==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박지원은 1893년 11월 4일 경상도 밀양도호부 하서면 삼태리 당두(현 경상남도 밀양시 무안면 삼태리 당두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기독교 신자로서 1919년 부북면 춘화리 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한 뒤 독립운동에 있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헌신할 것을 결심하고,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계하여 전국 각지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폈다. 1919년부터 군자금을 모금하여 임시정부로 보내고 계속 활동하다가 1920년 10월 29일 동래군 구포면 화명리(현 [[부산광역시]] [[북구(부산)|북구]] [[화명동]])에서 무기를 휴대하고 행인을 대상으로 군자금 50원을 모금하였는데, 이 일로 인해 곧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다. 일제는 관계된 사람을 모두 색출하기 위해 갖은 고문을 다 가했으나 그는 혀를 깨물고 남은 7명의 동지들을 발설하지 않았다. 일본인 검사도 어찌 할 수 없었던지 박지원 한 사람만 기소하였고, 결국 1921년 1월 3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강도 혐의로 징역 7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복역 중 1924년에 감형되어 3년 6개월 간의 기나긴 수감생활을 마치고 출옥하였다. 출옥 후에는 조용히 지내다가 [[8.15 광복]]을 맞았으며, 1966년 2월 28일 별세하였다. 197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이 추서되었으며,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