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박용오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include(틀:두산 회장)] [include(틀:KBO/역대 총재)] ||<-2> '''두산그룹 제6대 회장[br]{{{+1 박용오}}}[br]朴容旿 | Park Yong-oh'''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external/www.newspost.kr/1257868755.jpg|width=100%]]}}}|| ||<|2> '''출생''' ||[[1937년]] [[4월 29일]] || ||[[경기도]] [[경성부]][br](現 [[서울특별시]]) || ||<|2> '''사망''' ||[[2009년]] [[11월 4일]] (향년 72세)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서울)|성북동]] || || '''국적''' ||[include(틀:국기, 국명=대한민국)] || || '''본관''' ||[[밀양 박씨]] || || '''학력''' ||[[경기고등학교]] {{{-2 (졸업 / 52회)}}}[br][[뉴욕 대학교]] {{{-2 (경영학 / 학사)}}} || || '''부모''' ||아버지 [[박두병]], 어머니 명계춘 || || '''형제자매''' ||형 [[박용곤]][br]누나 박용언[br]남동생 [[박용성]], 박용현, [[박용만(기업인)|박용만]], 박용욱 || || '''배우자''' ||최금숙{{{-2 (1937년생, 2004년 사별)}}} || || '''자녀''' ||장남 박경원[br]차남 박중원[* 주가조작 혐의로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https://www.ytn.co.kr/_ln/0103_200907021357257915|#]]]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기업인]], 스포츠행정가. [[두산그룹]] 제6대 회장. == 생애 == 1937년 4월 29일, [[경기도]] [[경성부]](현 [[서울특별시]])에서 연강 [[박두병]]의 2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경기고등학교]]를 졸업[* 52회 졸업생. 동기생으로 [[고건]], [[이종찬(1936)|이종찬]], [[김우중]], [[신구|신구]], [[이준용]] , [[조양래]]가 있다.]하고 [[미국]]으로 유학가서 [[뉴욕 대학교]]에서 경영학을 전공하였다. 1965년 두산산업에 입사하였다. 이후 두산산업 전무이사, [[OB맥주|동양맥주]] 전무이사 등을 역임하였다. 1983년 [[OB 베어스]] 사장에 임명되었다. 큰 형인 [[박용곤]]이 은퇴하자, 1996년부터 2005년까지 두산그룹 회장을 역임했다. 박용오가 회장 자리에 오르기 전 두산그룹은 경상수지 적자로 인한 경제위축과 경영오판으로 심각한 수익성 악화를 겪고 있었고 결국 1995년 주력부문인 음료사업을 [[코카콜라]]에 넘기고 부동산 등 자산을 매각해야 했다. 직후 터진 [[IMF 외환위기]]로 [[내수]]기업인 두산에 한계가 오자 박용오는 식음료, 경공업, 생활문화 등 전형적인 내수기업인 두산을 과감한 인수합병과 매각으로 중공업을 바탕으로 한 [[수출]]기업으로 탈바꿈시켰다.[* 가끔 우익 인사들이 당시 --기승전--좌파 정권이 두산그룹의 내수산업을 없애서 어쩔 수 없이 이런 식의 사업을 유도했다는 식으로 [[음모론]]을 내세우는데, 말 그대로 음모론이고 개소리이다. 두산이 사업을 전환한 결정적 계기는 1991년 [[낙동강 페놀 유출사건]] 때문이었는데--노태우 좌파정권설--, 덕분에 영남 지역에서 불매운동이 벌어지고, 이 여파로 인해 하이트(크라운맥주)에게 1위를 뺏기고 KFC, 코카콜라 한국 사업 부문까지 모두 매각할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IMF까지 오며 두산의 소비재 사업이 흔들리자, 기업 미래를 위해 나름 절박한 심정으로 건설업과 플랜트사업으로 서서히 탈바꿈한 것이다.] 2001년 한국중공업, 2005년 대우정밀공업의 인수로 두산을 재계서열 10위의 대기업으로 거듭나게 했다. 1998년부터 2005년까지 KBO 총재를 겸임하기도 했다.[* 정치권 인사였던 [[정대철]]이 경성 비리 사건으로 구속되면서 OB 베어스 구단주였던 그가 총재대행이 되었다가, 정식 총재로 임명되었다. 구단주들끼리 돌아가면서 총재직을 맡을 계획이었지만, 막상 하려는 사람이 없어서 박용오가 7년이나 집권했다.] 이후 두산산업개발 분리와 두산그룹의 차기 회장 문제를 두고, 큰형인 [[박용곤]]을 위시로 한 형제들간의 갈등 끝에[* 2005년 7월 명예회장 박용곤을 필두로 두산가는 ‘공동소유, 공동경영’이라는 선대의 유훈에 따라 회장직을 3남 박용성에게 물려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박용오는 되려 형제들의 비리를 검찰에 고발했다. 가족들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자신의 업적을 내세워 일반 주주들로부터 지지를 얻으려는 전략이었지만 끝내 주주들의 지지를 얻는데 실패했다.] 결국 동생인 [[박용성]]에게 자리를 내주고 물러났다. 말이 물러난 거지, 사실상 쫓겨난 것이다.(...) 이후 동생인 [[박용현]], [[박용만]]에게 경영권을 완전히 빼앗겼으며 형제들과는 완전히 의절하였다. 즉, 선대 유훈을 어기고 기업 경영권을 혼자 꿀꺽하려다 실패한 셈. 이후 남은 두산의 지분을 처분하고 2008년에 성지건설을 인수하여 경영했지만, 차남인 박중원의 횡령과[* 박중원은 횡령혐의로 2년 6개월을 선고받은 후 2011년 2월 가석방 됐다.하지만 또 지인들에게 사기를 친 일로 사기죄로 재판을 받게 되자 재판도 불출석하고 도주하다가 경기도의 한 골프연습장에서 붙잡혔다. 2021년 4월 징역 1년 4개월로 대법원에서 판결이 확정됐다.]과 국제금융위기로 인해 부동산 시장이 얼어붙으면서 실적 부진으로 반쯤 망했고[* 성지건설은 이후, 경영난을 계속 겪다가 2018년 10월 상장폐지 된다. 그리고 2022년 1월 [[김용빈(기업인)|김용빈]] 회장(참고로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에 출전하는 [[대한민국 올림픽 대표팀|한국 국가대표팀]]의 부단장이기도 하다.)도 경영권 유지에 실패하고 회장직에서 쫓겨나고 만다.], 2009년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향년 72세.[[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85954.html|#]] == 사건·사고 == 1998년 9월 비리로 구속된 정대철의 뒤를 이어 KBO 총재대행으로 임명되었다가 11월 사임하였다. 다음 달인 12월 [[한국프로야구]] 구단주들에 의해 제12대 [[한국야구위원회|KBO]] 총재로 선출되었고 2005년까지 3선을 역임하였다. 하지만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 결성 당시 방송에 나와 "선수협이 생기면 우린 그날부터 (프로야구) 안 한다."고 극언을 퍼부어 팬들의 거센 비판을 받았다. 2005년 [[비자금]] 조성 혐의로 기소되어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 [[범두산가|가족관계]]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범두산가)] == 관련 문서 == * [[야구 관련 인물(KBO)]] [[분류:대한민국의 남성 기업인]][[분류:KBO 총재]][[분류:1937년 출생]][[분류:2009년 사망]][[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의 자살한 인물]][[분류:범두산가]][[분류:기업인 자녀]][[분류:경기고등학교 출신]][[분류:뉴욕 대학교 출신]][[분류:자살한 기업인]]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