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박마리아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분류:강릉시 출신 인물]][[분류:1906년 출생]][[분류:1960년 사망]][[분류:암살된 인물/한국사]][[분류:총기에 죽은 인물]][[분류:대한민국의 개신교 신자]][[분류:밀양 박씨]][[분류:호수돈여자중학교 출신]][[분류:호수돈여자고등학교 출신]][[분류:이화여자대학교 출신]][[분류:마운트 홀리요크 칼리지 출신]][[분류:밴더빌트 대학교 출신]][[분류:대한민국의 살해된 인물]]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00 0%, #000 20%, #000000 80%, #000000)" '''{{{#white {{{+1 박마리아}}}[br]朴瑪利亞}}}'''}}} ||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external/www.inewspeople.co.kr/211-2-148.jpg|width=100%]]}}} || ||<|2> '''출생''' ||[[1906년]] [[4월 19일]][* 공교롭게도 그녀의 54번째 생일이 바로 [[4.19 혁명|운명의 날]]이다.] || ||[[강원도]] [[강릉시|강릉군]] (現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 ||<|2> '''사망''' ||[[1960년]] [[4월 28일]] (향년 54세) || ||[[서울특별시]] [[종로구]] [[경무대]] 별관[br](現 [[청와대]] 구본관 터) || || '''본관''' ||[[밀양 박씨]] [[:파일:이기붕 족보.png|#]] || || '''가족''' ||아버지 박명삼, 어머니 고의대, [[배우자]] [[이기붕]], 장녀 이강희, 장남 [[이강석(1937)|이강석]], 차남 이강욱 || || '''신장''' ||약 155cm[* [[파일:이강석, 프란체스카, 이승만, 이기붕, 박마리아, 이강욱의 사진.jpg]] 이 사진에서 신장이 170cm 추정되는 [[이기붕]]를 이용하여 online ruler를 이용해 비례를 고려해 계산해보면 대충 155 cm 정도로 1940년대 여성의 표준키 정도 된다고 볼 수 있다.] || || '''학력''' ||[[이화여자대학교|이화여자전문학교]] {{{-2 (졸업)}}}[br][[마운트 홀리요크 칼리지]] {{{-2 (철학 / 학사)}}}[br][[밴더빌트 대학교]] {{{-2 (영어영문학 / 학사)}}}[br][[밴더빌트 대학교]] {{{-2 (교육학 / 석사)}}} || || '''종교''' ||[[기독교]] {{{-2 ([[개신교]])}}} || [목차] [clearfix] == 개요 == [[자유당]]의 2인자였던 [[이기붕]](李起鵬)의 부인. [[친일반민족행위자]] [[엘리트]] 지식인의 탈을 썼으나 실상은 출세와 명예에 대한 [[욕심]]이 많아서 이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을 짓밟고 마지막에는 [[인과응보|자기 자신과 가족들마저 파멸시키고 만 인물]]이다. 자유당 때 [[경기도]] [[이천시|이천]] 지역에 돈을 많이 뿌려 아직도 이천 지역에는 박마리아를 훌륭한 여성으로 잘못 아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 생애 == 1906년 4월 19일 [[강원도]] [[강릉시]]에서 태어났으며 어렸을 때 아버지 박명삼(朴明三)을 잃고 홀어머니 고의대(高義大) 밑에서 힘들게 자랐다. 어려운 환경에서 목사의 도움으로 경기도 [[개성시|개성]]의 [[호수돈여자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과]]에 진학해 졸업했는데 이미 이화여자전문학교 시절부터 [[공창]](公娼)제의 폐지, 금주, 금연 등 계몽적 사회 운동에 적극 참여하면서 사회운동가, 신여성, 야망가로서 성향을 드러냈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1932년 [[테네시]] 주 [[내슈빌]]의 [[밴더빌트 대학교]][* 미국 남부의 명문 대학이다. [[아이비리그]] 급의 수준을 자랑한다.]에서 학사와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테네시 스칼렛(Scarlet) 대학에서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는 오류도 있는데 정확하게 밴더빌트가 맞다. 스칼렛 대학은 미국 전역에 하나도 없고 테네시의 스칼렛은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여주인공뿐이다.] 사실 이 시대 해외 [[유학생]]의 공통점은 현대의 유학과는 비교도 안되는 압도적인 가문의 재력이 뒷받침[* [[이병철]], [[신격호]], [[이승만]], [[서재필]] 등이 그러하다.]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박마리아의 대학과 [[대학원]] 유학은 장학 제도가 아예 없던 [[일제강점기]]에 비교해 보면 이미 떡잎부터 다른 능력을 보였다.[* 조선시대 때에는 [[국비유학|관비유학]] 제도라도 있었다. 독립운동가인 [[김란사]]가 이 제도를 이용하여 미국 유학을 다녀왔다.] 이는 '이기붕을 박마리아가 만들었다'는 평가의 방증이다. 귀국한 후에는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윤리학을 가르쳤고 1935년 [[이기붕]]과 [[결혼]]함과 동시에 이때부터 기독교여자청년회([[YWCA]]) 총무로 10년간 활동하였으며 이 시기 장남 이강석, 장녀 이강희[* 이화여자중학교 재학 중에 [[요절]]했다.], 차남 이강욱을 낳았다. 일제강점기 말기인 1942년 [[김활란]], [[모윤숙]], [[노천명]], [[박순천]] 등과 함께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라는 [[친일]] 단체를 결성하였는데 이들은 전국을 돌면서 [[황국신민]], [[내선일체]]를 외치면서 [[정신대]] 모집과 국방헌금 헌납 등의 활동을 하였다. 이와 같은 노골적인 친일행위 덕에 [[친일인명사전]]에도 수록되었다. 이승만과 [[8.15 광복]] 전에 연을 맺었던 이기붕과 함께 이승만과 더욱 가까워지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했다. 이 무렵 [[한국어]]를 할 줄 모르는 [[프란체스카 도너]] 여사가 당시 여성 정치인 [[임영신]]과 불화가 있었는데 임영신이 이승만에 대한 충성심이 강해서 [[돈암장]]을 들락날락거리자 임영신과 이승만이 [[불륜]] 관계다, 임영신이 안주인을 차지하려고 한다는 등 [[소문]]이 났다.[* 보통 해외에서 [[외국인]]과 결혼한 [[독립운동가]]들이 귀국 시 처를 버리고 오는 일이 많았다.] 그게 해외에 있었던 프란체스카의 귀에 들어가서 급히 귀국하고 임영신의 돈암장 출입을 금지시킨 틈을 타서 유창한 [[영어]] 실력으로 프란체스카 여사와 친목을 형성해[* 프란체스카 여사는 한국어는 한 마디도 못 해서 남편인 이승만과도 영어로만 대화했다.] 경제적으로나 사회적 지위로나 별 볼일 없었던 남편을 정계에 들이는 데 성공했다. 이 덕분에 이기붕은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대통령비서실장]], [[서울특별시장]]을 지내면서 탄탄대로를 걸었고 1951년 [[대한민국 국방부장관]]으로 [[국민방위군 사건]]을 나름 깨끗하게 처리하면서 인기를 끌어 자유당 의장 자리에 올랐으며 드디어 [[권력]]의 최중심에 안착했다. 박마리아 본인은 남편의 권력을 기반으로 [[이화여자대학교]] 문리과 대학 학장과 부총장, YWCA 회장이 되었는데 탄탄대로를 걸으면서 남편을 [[대한민국 부통령|부통령]] 자리에 앉히려고 했지만 이기붕은 [[제3대 대통령 선거|1956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장면]]에게 패하며 부통령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1957년 이기붕과 함께 장남 [[이강석(1937)|이강석]]을 이승만 [[대한민국 대통령|대통령]]의 양자로 입적시켜 이승만과의 관계를 공고히 했다. 1960년 [[제4대 대통령 선거|1960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남편을 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자신이 회장을 맡고 있던 '대한부인회'를 비롯한 [[여성]] 단체들을 총동원했으며 대한부인회는 전국 대회를 통해 이승만과 이기붕을 지지한다는 결의문을 채택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도가 너무 지나친 나머지 [[3.15 부정선거]]를 감행하면서 결국 [[4.19 혁명]]이 터지고 1960년 4월 26일에 이승만이 하야를 선언하면서 다음 날인 4월 27일에 하야하자 이기붕 일가의 최후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1960년 4월 28일 아들이었던 이강석 당시 육군 [[소위]]에 의해 일가족이 모조리 총에 맞아 살해당하고 이강석도 [[자살]]하는 참혹한 최후를 맞이한다. 타살론에 따르면 당시 대통령 경호 책임자인 [[곽영주]] 경무대경찰서 서장이 이기붕 일가를 살해해 국민 [[여론]]을 달램으로써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막거나 이승만을 반대하는 여론을 조금이라도 진정시키기 위해 저지른 일이라고 하지만 애당초 타살론 자체가 [[무풍지대(드라마)|무풍지대]]에서 [[이환경]]이 지어낸 썰일 뿐이다. == 기타 == * 여성 독립운동가인 [[김마리아(1891)|김마리아]]와 혼동하는 사람도 있는데 전혀 다른 사람이니 주의할 것. 김마리아와 박마리아의 공통점은 세례명 '마리아'와 여성 교육 및 운동가라는 점 뿐이다. 그 외에도 [[한국광복군]]에 배속되어 직접 무장독립운동에 참여한 [[동명이인]]의 [[김마리아(1903)|김마리아]]([[이범석]]의 아내)가 있는데 이범석과 이기붕이 라이벌이었던 관계로 이 김마리아는 생전에 박마리아와 정치적으로 대립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 신혼 시절 살던 집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 [[대구광역시]] 중구 북성로에 있는데 현재 1층에는 공구 상가가 들어선 상태이며 관리가 되지 않았는지 외관만 봐서는 거의 폐허 수준. * 성격이 대단히 인색했고 콧대가 높았다고 한다. 해방 직후부터 [[6.25 전쟁]] 직후까지 이승만의 개인 [[비서]]와 [[청와대]] 비서관을 지낸 [[박용만(1924)|박용만]]은 박마리아를 가리켜 "굉장한 에고이스트다. 퍽 욕심이 많고, 남에게 지기 싫어했으며 지나치게 자존심이 강했다. 퍽 인색했었고 그러면서도 콧대는 대단히 높았다"고 한다. 박용만에 의하면 박마리아는 남에게 자기 것은 쌀 1톨도 주는 법이 없으면서도 남이 주는 것은 주는 대로 받았다고 한다.[* 박용만, 경무대 비화 (내외신서, 1995년)] * [[이화여자대학교]] 동문회의 회장을 지내기도 했으며 이화여자대학교 출신 친목 단체인 '이수회'의 회장이었는데 군의 [[장군]]과 고위 [[관료]]들, 가난한 집에서 성공한 배경 없는 개천에서 난 [[용]]들과 이화여자대학교 출신 여성들의 연결을 주선하였다. 그렇게 해서 승진을 바라는 군의 장군들이 박마리아에게 접근하려고 조강지처와 [[이혼]]하고 이수회의 젊은 여성과 [[재혼]]을 서두르는 일도 생겨났다.[* 정경모, 《찢겨진 산하:구름 위의 정담》 (기획 출판, 1986년) 170페이지] * 집필한 서적도 충격적인데 이 서적을 어느 [[신촌]] 헌책방에서 본 [[마광수]] 교수가 자신의 에세이에 "누가 이 글만 알고 박마리아가 나쁜 사람인지 생각할 수 있는가!"라고 한탄했다. * [[이승만]]의 정치 분석 서적 <일본 내막기>의 번역에도 이기붕과 박마리아가 관여했다.[* 이 책인 Japan Insideout은 [[제2차 세계 대전]] 전에 [[미국]]에서 영어로 출간되었다.] 책을 번역을 의뢰받은 분은 기껏 번역했더니 박마리아가 중간에 가져와서 [[최덕신]] 번역으로 먼저 책을 만들어 이승만에게 선물했다. 나중에 이 책은 동일한 번역자의 손으로 <일본 군국주의의 내막>이라는 제목으로 1980년대에 재출간되었다.[* 당시 사회적 분위기를 고려한 탓인지 원저자 이승만의 이름은 작게 표시되어 있다.] * 굉장히 자기주장이 강한 편이고 권력욕도 강해서 남편인 [[이기붕]]을 상대로 "당신이 나한테 해준 것이 뭐가 있느냐? 다 나 때문에 당신이 이렇게 한 자리라도 얻어서 행세하고 사는게 아니냐?"고 목소리를 높이면서 자주 [[부부싸움]]도 벌였다고 한다.[*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1960년대편 1 : 4·19 혁명에서 3선 개헌까지》 (인물과 사상사, 2006년)] 이는 [[야인시대]]에서 이기붕을 닦달하는 바람에 이기붕이 골골대는 모습으로 재현되었다. * 이기붕이 1957년부터 중병을 앓아 혼자서는 대소변도 해결하지 못할 만큼 [[건강]]이 악화되자 대리 업무를 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신빙성은 부족하다. * [[전북대학교]] 교수 강준만은 박마리아가 3.15 부정선거 때 [[국회의원]]에 출마하려고 했던 것을 두고 국회의원에 출마하려고 했던 점에 비추어 본다면 박마리아의 과욕만큼은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평가하였다.[*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1960년대편 1 : 4·19 혁명에서 3선 개헌까지》 (인물과 사상사, 2006년)] * 열렬한 [[개신교]] 신자이기도 했는데[* 이는 박마리아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김활란]]도 마찬가지로 장례식장에서 개신교 찬송가를 틀어 달라고 유언으로 남겼다.] [[4.19 혁명]]이 일어나자 [[개소리|"이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위험하고 나쁜 일이다."]]라는 글을 [[신문]]에 실었다가 오히려 국민들의 분노만 자극하여 결과적으로 자신과 남편을 비롯한 일가를 모두 파멸시키고 마는 단초가 되었다. == 대중매체에서 == * 1968년 개봉한 영화 <[[잘 돼 갑니다]]>에서는 배우 [[김지미]]가 연기했다. * 1970년 [[MBC]] 드라마 <박마리아>에서는 배우 [[윤여정]]이 연기했다. * 1981년 [[MBC]] 드라마 <[[제1공화국(드라마)|제1공화국]]>에서는 배우 [[김애경]][* 젊은 나이에 배역을 맡은 탓에 분장을 과하게 한 데다 최근에 서민적인 [[이미지]]의 배역을 자주 맡아서인지 [[싱크로율]]이 떨어져 보인다는 의견도 있다.]이 연기했다. * 1985년 [[KBS]] 드라마 <[[새벽(드라마)|새벽]]>에서는 배우 황정아가 연기했다. * 1989년 [[MBC]] 드라마 <[[제2공화국(드라마)|제2공화국]]>에서는 배우 [[김용림]]이 연기했다. * 1989년 [[KBS]] 드라마 <[[무풍지대(드라마)|무풍지대]]>에서는 배우 [[정영숙]][* 2002년 [[SBS]] 드라마 <[[야인시대]]>에서는 [[김두한]]의 친할머니 역.]이 연기했다. * 1993년 [[KBS]] <다큐멘터리극장>에서도 배우 황정아가 연기했다. * 2002년 [[SBS]] 드라마 <[[야인시대]]>에서는 배우 [[남현주]]가 연기했다. [[6.25 전쟁]] 이후 첫 등장하는데 어느 정도까지는 나름대로 정상인의 범주에 드는 듯 했지만 [[이승만]]의 종신 집권 관련 [[사사오입 개헌]] 때 일이 틀어지자 그 때부터 표독스러운 본색을 드러낸다. 자기 남편에게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화를 낼 정도면 보통 치맛바람이 아니라는 것. 출세욕과 명예욕은 넘쳐나는데 일이 꼬여만 가니 나중에는 등장만 하면 장관이고 뭐고 무작정 까대는 역할로 나온다. 나중에 [[이기붕]]이 부통령에 낙선해 내무부 장관이 위로차 방문했다가 박마리아에게 까이자 어이없어서 "내가 정부의 내무부 장관이지, 이기붕의 내무부 장관이냐"라고 반박할 정도였다. [[4.19 혁명]] 이후 이기붕, 이강욱과 함께 시골 집으로 피신해있다가 [[서울특별시|서울]]로 돌아왔으며 경무대 별관에서 이강욱에게 "힘들었으니 자라"고 말하는 한편 자신의 죄를 남편 이기붕에게 용서를 청하며 눈물을 흘린다. 이에 이기붕은 "그런 소리하지 말라. 누가 뭐래도 당신은 내 아내다."라고 말하는데 이후 들어온 [[이강석(1937)|이강석]]에게 역사대로 총을 맞고 최후를 맞이한다.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