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서는 rr20240101판에서 저장되지 않은 문서입니다.자동으로 r20210301판 문서를 읽어왔습니다. 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박득룡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2> [[파일:박득룡.jpg|width=300px]] || || 성명 ||박득룡(朴得龍) || || 이명 ||박대득(朴大得) || || 생몰 ||[[1908년]] [[7월 11일]] ~ [[1941년]] [[7월 2일]] || || [[출생지]] ||[[경상북도]] [[대구광역시|대구군]] 동상면 칠성리[br](현 [[대구광역시]] [[북구(대구)|북구]] [[칠성동]]) || || 사망지 ||[[경상북도]] [[대구광역시|대구부]] || ||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 [목차] == 개요 ==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박득룡은 [[1908년]] 7월 11일 경상북도 대구군 동상면 칠성리(현 대구광역시 북구 칠성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경북고등학교|대구고등보통학교]] 재학 중이던 [[1927년]] 11월 동창생 윤장혁(尹章赫)·손익기(孫益基)·백대윤(白大潤) 등과 함께 대구 남산동에 소재한 백대윤의 집에서 신우동맹(新友同盟)을 조직했다. 신우동맹은 맹원(盟員)을 3개 그룹으로 나누었는데, 박득룡은 조은석이 이끄는 제2그룹에 속했다. 그들은 각 그룹별로 사회과학을 연구하기로 하고 또 대구시내에 있는 각 중등학교의 남녀학생들에게 주의를 선전할 목적으로 각 학교별로 선전위원(宣傳委員)을 뒀다. 이후 박득룡, 윤장혁 등은 신우동맹을 해체시키고 다시 비밀결사를 조직하기로 하고 1927∼1928년에 걸쳐 혁우동맹(革友同盟)·적우동맹(赤友同盟)·일우동맹(一友同盟) 등으로 조직의 명칭을 변경하며 활동했다. [[1928년]] 9월 26일, 그가 다니던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에서 동맹휴교(同盟休校)가 일어났으나, 학생들의 불참으로 실패했다. 이에 박득룡은 동급학생들과 함께 제2차 동맹휴교를 계획하고 10월 15일 동맹휴교를 단행했다. 그러나 이 일로 11월 6일 동지들과 함께 경찰에 체포된 그는 1929년 8월 7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그러던 중 옥중에서 [[장진홍]](張鎭弘)이 옥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감방의 문짝 등 형무소 기물을 파괴하고 가혹한 고문을 중단하라고 요구하다가 징역 8개월을 가형받았다. 출옥 후 대구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1941년 7월 2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6년 박득룡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7년에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북구(대구) 출신 인물]][[분류:1908년 출생]][[분류:1941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족장]][[분류: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