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미륵산성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include(틀:대한민국의 산성)] ||<-5> [[파일:전라북도 휘장_White.svg|width=30&height=30]] '''{{{#ffffff 전라북도의 기념물}}}''' || || 10호[* 11호 〈무장남문과 토성〉은 1991년 2월 26일 해제되고 [[대한민국의 사적|사적]] 제346호로 승격했다.] ||<|2> ← || '''12호''' ||<|2> → || 13호 || || 남원 유곡리 및 두락리 고분군 || '''익산 미륵산성''' || 익산 낭산산성 || ---- ||<-2> [[파일:전라북도 휘장.svg|width=28]] '''{{{#009a43 전라북도의 기념물 제12호}}}''' || ||<-2> {{{#fff {{{+1 '''익산 미륵산성'''}}}[br]{{{-1 益山 彌勒山城 | Mireuksanseong Fortress }}}}}} || ||<-2>{{{#!wiki style="margin: -10px"; margin-top: -5px; margin-bottom: 16px" [include(틀:지도, 장소=익산 미륵산성, 너비=100%, 높이=200px)]}}}|| || '''소재지''' ||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신용리 124-1번지 || || '''분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성 / 성곽 || || '''수량 / 면적''' || 일곽 || || '''지정연도''' || 1973년 6월 23일 || || '''건축시기''' || [[고조선]][* 문헌기록 한정.],[[통일신라]][* 고고학적인 관점에서 미륵산성은 운용시기가 최소 통일신라 이후인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백제 초축설에 대한 가능성이 지속적으로 제시되고 있으나 현재까지 조사성과로는 백제시대 유구가 발견되고 있지 않고 있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익산시의 미륵산성.jpg|width=100%]]}}} || || {{{#fff '''미륵산성'''}}} || [목차] [clearfix] == 개요 == 미륵산성은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신용리 124-1번지 미륵산에 위치한 [[산성]]이다. == 역사 == [[고조선]] 시대 [[준왕]]이 이곳으로 내려와 쌓았다고 하여 기준산성이라고도 불렸고, 혹은 용화산성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미륵산의 옛날 명칭은 용화산이다.] 혹은 마한의 여러 나라 가운데, [[건마국|익산 지역에서 유력한 세력을 가지고 있던 나라]]가 쌓았다는 설도 있다. [[고려사]], [[신증동국여지승람]], [[세종실록지리지]], 와유록, 익산군지 등에 산성에 대한 기록이 있다. [[고려]] 초기 [[태조(고려)|태조]]가 [[후백제]] [[견신검|신검]]과 [[견훤]]을 쫓을 때, 여기서 이들을 토벌하고 신검의 항복을 받았다고 한다.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에 따르면 둘레 3900척, 높이 8척이었다. 또한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미륵산성에 군창이 있었던 모양이다. 영조 14년(1738) 강후진이 쓴 '와유록(臥遊錄)'에 미륵산성이 버러졌다는 내용이 있으므로, 18세기에는 이미 성곽으로서 기능을 상실된 듯하다. 미륵산성은 1973년 6월 23일 전라북도 기념물 제12호로 지정되었다. == 문화재청 소개글 == * [[https://www.google.com/url?sa=t&source=web&rct=j&url=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3FccbaCpno%3D2333500120000&ved=2ahUKEwiBz8irssb2AhUis1YBHVZhCXsQFnoECEQQAQ&usg=AOvVaw0wmQ88NA_fJoeI9hmPpnx-|문화재청 익산 미륵산성 소개글]] || {{{#fff 문화재청 소개글}}} || ||전라북도 익산시 미륵산에 위치한 이 산성은 일명 ‘용화산성’으로 불리는데, 옛날에는 미륵산을 용화산이라 했기 때문이다. 고조선시대 기준왕이 이곳으로 내려와 쌓았다고 하여‘기준성’이라고도 부르기도 하지만, 마한의 여러 나라 중 하나가 이곳을 중심으로 세력을 누리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산성도 그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태조가 후백제의 신검과 견훤을 쫓을 때 이를 토벌하여 마성에서 신검의 항복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 마성이 바로 이 산성이다. 미륵산성은 둘레 약 1287m, 높이 2.4m이며, 정상에서 사방으로 능선을 따라 성이 만들어졌고, 그 중 하나는 물 흐르는 곳을 향하여 내려가는데 여기에는 동문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문에는 작은 성을 따로 쌓아 방어에 유리하게 하였으며, 성안에서는 돌화살촉, 포석환 등 기타 유물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 [[분류:익산시의 문화재]][[분류:전라북도의 기념물]][[분류:산성]][[분류:통일신라]][[분류:남북국시대/성채]][[분류:성채/대한민국]]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