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모나 펜디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분류:말레이시아의 인물]][[분류:은퇴한 방송인]][[분류:1956년 출생]][[분류:1987년 데뷔]][[분류:1989년 은퇴]][[분류:2001년 사망]][[분류:프를리스 주 출신 인물]][[분류:교수형된 인물]] ||<-2> '''{{{+1 모나 펜디}}}[br]{{{-1 Mona Fandey }}}'''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Mona_Fandey.jpg]]}}} || || '''이름''' ||모나 펜디[br]Mona Fandey || || '''본명''' ||Maznah binti Ismail || ||<|2> '''출생''' ||[[1956년]] [[1월 1일]] || ||[[말라야 연방]] 퍼를리스 주 캉아르[br](現 [[말레이시아]] [[프를리스|퍼를리스 주]] [[캉아르]]) || ||<|2> '''사망''' ||[[2001년]] [[11월 2일]](향년 45세) || ||[[말레이시아]] [[슬랑오르|슬랑오르 주]] 카장 교도소|| || '''성별''' ||[[여성]] || || '''직업''' ||前 [[가수]] || || '''가족''' ||[[부모님]], [[남편]] || || '''데뷔''' ||1987년 앨범 "[[Diana I]]" || || '''활동 시기''' ||가수^^(1987 ~ 1989)^^ || [목차] [clearfix] == 개요 == [[말레이시아]]의 前 가수, 의료인이자 살인자. 1993년 정치인 [[마즐란 이드리스]]를 암살했는데 정치인을 암살한 연예인이라는 점이 마치 [[존 윌크스 부스]]와 비슷하기도 하다. 비록 흉악범임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가수였다는 이유 때문에 [[고영욱]]처럼 일부 동정심을 얻기도 하나, 그 여부를 떠나서 죄가 용납될 수는 없는 노릇이며[* 고영욱은 아동 성범죄를 저질러서 연예계에서 금지어로 전락함과 동시에 완전히 퇴출되었는데 이 자는 그보다 더 악질인 강도살인을 저질렀다.] 때문에 오늘날 말레이시아 가요계 최악의 흑역사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 생애 == 1956년 1월 1일 [[프를리스|퍼를리스]] 주 [[캉아르]]에서 태어났으며, 1987년 앨범 "[[Diana I]]"를 내고 가수로 데뷔했다. 수록곡 "Ku Nyanyikan Lagu Ini", "Ratapan Anak" 등으로 이름을 알렸으나, 인기가 더럽게 없었는지 2년 만에 가요계를 떠났다. 본명은 마즈나 빈티 이스마일임에도 불구하고, 이 당시에 사용한 예명인 모나 펜디로 더 잘 알려져 있는데, 흔히 알려진 Mona Fendi라는 표기는 잘못된 것이고 Mona Fandey가 맞다. 가요계를 떠난 이후 [[보모]](말레이 전통의학)로 직업을 바꾸었고, 이후에는 의료인으로서의 활동을 이어갔다. === 범행 === 1993년 전후로 [[미국]] 유학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마즐란 이드리스]]가 당시 집권당 [[통일말레이국민조직]](UMNO)의 차기 유력 의원으로 바짝 떠오르고 있었고, 그의 출신지인 [[파항]] 주에서 지지세를 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는 냉전이 바로 끝나면서 말레이시아 내부에서도 변화가 오기 시작했고, 그동안 UMNO의 일당독주가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하고 [[민주행동당]](DAP) 등을 위시로 한 야당의 힘이 세지기 시작하면서[* 참고로 또다른 유력 야당인 [[인민정의당]](PKR)은 훗날인 1999년에 창당되었으며, 지금 PKR의 수뇌부들은 당시 UMNO에 있었다. 그러니까 당시에는 선명 야당 하면 DAP가 유일했다고 보면 된다.] 본인의 앞날도 가름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른다. 비록 파항 주가 다소 보수적인 지역이라 반이슬람 성향[* 다만 극우는 아니었다. 우경화가 본격화된 건 2000년대 전후였다.]인 DAP가 힘을 쥐기는 힘들었으며 더더욱이나 DAP가 혼자서 뛰던 때라 UMNO에게 유리한 구도였다지만, 그렇다고 해도 본인도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었다. 이러한 불안 속에 잠겨있던 마즐란은 의료인으로 전향한 모나에게 손을 뻗었다. 전통 의학의 힘을 빌리면 심적으로도 안정감을 취할 수 있었고, 그렇게 하면 당선이 무난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1993년 7월 1일, 모나와 그의 남편인 아판디는 마즐란을 부부의 집으로 초대했다. 마즐란은 [[제9대 말레이시아 총선거|조만간 있을 총선]]에서 당선되는 것이 목표라며[* 사실 9대 총선은 1995년에 치러졌지만, 바로 [[제8대 말레이시아 총선거|지난 총선]]이 1990년에 있었고, 말레이시아와 같은 내각제 국가에서는 조기총선이 가능하기 때문에 당초에는 1993년 말이나 1994년을 유력하게 보는 경우도 있었다. 이 때문에 차기 총선이 언제인지 당초에는 아무도 모르며, 마즐란 입장에서도 이를 미리미리 대비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던 모양.] 모나 부부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모나는 마즐란에게 바닥에 눕고 눈을 감으라고 지시했다. 마즐란은 그 지시대로 따랐고, 곧 모나가 말한 대로 "하늘에서 돈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같이 집에 있었던 보좌관 주라이니는 이 틈을 타서 도끼로 마즐란의 목을 쳤다. 그리고 3인방 일대는 마즐란의 시체를 거리낌 없이 토막내기 시작했고 곧바로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까지 이르렀다. 얼마나 심각했냐면, 무려 '''18조각'''으로 토막났다. 이 작자들은 시체를 자신들의 집 앞에 매장했고, 고인의 돈을 훔쳐다가 한참 떨어진 [[쿠알라룸푸르]]로 도주했는데 그 돈이 무려 30만 링깃으로 한화 약 '''1억원'''에 달하는 수치였다. 그리고 이 돈으로 비싼 [[메르세데스-벤츠]] 자동차를 샀고 성형수술까지 해 완전 딴 사람으로 위장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를 모를 경찰이 아니었다. === 구속 === 사건 바로 이튿날, 경찰은 마즐란이 실종되었다는 신고를 받고 곧바로 수사에 나선다. 당연히 모나 일대가 있던 쿠알라룸푸르에서도 수사가 이루어졌는데, 도중에 마즐란의 시체가 발견되자 주라이니는 경찰에게 "한번 보고 싶다"는 말을 전한다. 이 한 마디로 모나 일행이 유력 용의자로 지목되었고, 얼마 후 셋은 경찰에 구속되었다. 바로 [[트므를로]] 고등법원에서 재판이 진행되었고, 살인이나 유괴 등을 얄짤 것 없이 사형으로 다스리는 말레이시아 형법에 따라, 이들 셋은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제서야 뒤늦은 후회를 한 일행은 억울하다며 항소했지만, 용서는 없었고 2심 판결 또한 그대로 사형이었다. 참고로 한국과는 달리 말레이시아는 2심이 마지막이다. 이후 [[카장 교도소]]에서 형이 집행되기를 기다리며 복역하다가, 2001년 11월 2일 모나 일행은 형장에서 이슬이 되어 사라졌다. 언급했다시피 항소 당시 자신들은 잘못했다며, 한 번만 용서해 달라며 반성하는 척 했지만 이는 속임수였고, 죽기 직전에도, 그것도 교도소에서 [[KFC]] 치킨을 시켜달라며 교도관에게 끈질기게 요구했는데 결국 본인들이 원하는 대로 KFC 치킨을 맛나게 먹으며 일생의 마지막 끼니를 채웠다. 거기다가 피의자보다 피해자의 인권을 더 중시하는 말레이시아 사회를 감안한다면[* 범죄자의 인권을 중시하는 한국에서도 있을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거기다가, 그것도 흉악범이, 자신들의 잘못은 생각도 안 하고 저렇게 배달음식을 먹겠다고 교도관한테 조른다는 것 자체가 반성의 기미가 없다는 것과 같다. 실제로 [[김길태]]의 경우도 자장면을 시켜달라고 끈질기게 요구했으며 그의 팬카페에서도 "김길태에게 자장면 시켜 보내자"는 글이 올라왔었다. [[루마니아]]의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부부도 구속 직후 제공되는 음식에 불평을 해대면서 사과를 달라고 끈질기게 요구했었는데 어쨌거나 이들도 사과를 먹기는 했다.] 더욱이 재판장에서도 화려한 옷을 입고 나오면서 "나 봐, 팬이 많지?"라고 자랑하고 다녔다. == 사후 == 사형제를 무조건 반대하는 [[국제사면위원회]]에서 이들의 사형 집행을 규탄했지만, 말레이시아 정부는 이를 들은 척도 안 했고, 여론 또한 되레 앰네스티를 부정적으로 보았다. 현재도 말레이시아 살인계의 대표 인물로 꼽히며, 세간에 커다란 파장을 일으킨 21세기 최초의 말레이시아 살인사건이었다.[* 물론 사건 자체는 20세기에 일어났다.] 후에도 미디어에서 종종 화자되는 소재이기도 하다. 처음에 언급했다시피 모나는 가수로 출발했지만, 정작 사람들에게 각인된 이미지는 가수로서의 이미지가 아니라 살인자로서의 이미지이다. 그만큼 가수 시절에는 인기가 하나도 없었다는 얘기. [[방사포(가수)|그로부터 수십년 뒤 대한민국에서도 그녀와 마찬가지로 살인을 저질러서 중형을 선고받은 무명가수가 나왔다.]] == 앨범 == * [[Diana I]] (1987)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