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명사(역사책)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include(틀:중국 흠정 24사)] ||<-2> '''{{{+1 명사}}}[br]明史[br]History of Ming''' || || '''저자''' ||장정옥 등|| || '''시기''' ||[[18세기]] [[청나라|청]] || || '''언어''' ||[[한문]]|| || '''권 수''' ||332권|| || '''분량''' ||1344년 ~ 1644년 (300년)[br] [[혜종(원)|원 혜종]] 12년 ~ [[숭정제]] 17년|| [목차] [clearfix] == 개요 == 明史 중국 정사 [[24사]] 중 하나이다. 《명사》는 [[홍무제]] 주원장이 대명을 건국한 1368년부터 [[숭정제]] 치세인 1644년까지 277년간의 역사를 [[기전체]]로 엮은 중국 [[정사(역사)|정사]]이다. == 편찬 과정 == 《명사》의 찬술은 이미 1625년, 명사관(明史館)이 설치되면서 시작되었다. 풍전(馮銓)이 중심이 되어 편찬을 진행했지만, 당시 명조와 청조가 [[영원성 전투|영원성에서 대격돌을 벌이는 시점에서]] 정상적인 편찬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명나라의 관련 사료를 수집했을뿐 그외의 진전은 없었고, 이마저도 곧 중단되었다. 명나라가 아직 존속했던 시기에 《명사》를 찬술 시작했다는 것은, 정사의 편찬이 이전 왕조가 망하고 새 왕조가 들어섰을 때 편찬 시작된다는 점을 고려해봤을 때 명나라의 운이 다했다는 프로파간다적인 성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1665년, 명나라가 완전히 정리되고 나서야 [[청나라]]는 다시 명사관의 업무를 재개하도록 했으나, 당시 청의 《세조실록》(世祖實錄)을 찬수하고 있어서 다시 중단되었다.[* 《명실록》을 상당 부분 참고할 수 있었지만,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의 실록이 명나라의 멸망으로 편찬되지 않아 숭정제 재위 기간의 역사를 파악하기 위해 당대의 공문서 및 저보(현대의 [[관보]]에 상응) 등의 자료를 수집하는 작업에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 것도 편찬 작업이 지연된 한 원인이었다.] [[삼번의 난]]이 진압되고 나서야 1679년, 《명사》의 편찬작업이 본격적으로 재돌입되었다. 청은 내각대학사 서원문(徐元文)을 감수로, 한림원 장원학사 섭방애(葉方藹)와 우서자 장옥서(張玉書)를 총재로 임명했다. 또한, 명말의 유망한 대학자들이 대거 참여했으며, 편찬 과정에서 성조 [[강희제]] 자신도 초고를 열람하는가 하면 내용의 정확성을 강조하는 등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1723년, 총재를 맡았던 왕홍서가 《명사고》(明史稿)[* 《명사고》는 《횡운산인명사고》(橫雲山人明史稿)라고도 하는데 만사동(萬斯同)이 실질적으로 정리했다. 그런데 1703년, 만사동이 죽자 왕홍서는 만사동의 원고를 인수하여 삭제, 정정하고 합병해서 자기의 작품으로 올렸다.]를 마련시켜 놓았고, 그 후, 총재를 맡은 장정옥(張廷玉)이 이를 초고로 삼아 정리하여 1735년에 《명사》를 간행, 공포했다.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500px-Mingshigao.jpg|width=100%]] || || 《명사고》(明史稿) || == 구성 == [include(틀:명사)] <본기>(本紀) 24권, <지>(志) 75권, <표>(表) 13권, <열전>(列傳) 220권, <부록>(附錄) 1권, 총 332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 의의와 평가 == [[청나라]]의 저명한 역사가 조익(趙翼)은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근대의 여러 역사서 가운데 《명사》와 같이 완벽한 것은 없었다. 대개 60여 년을 경과한 다음에 일을 끝냈으니, 예로부터 역사 편찬에 이처럼 시일이 오래 걸리고 깊이 공들인 적은 없었다. 또 강희 연간에 편찬되어 전 왕조와 시간적으로 멀지 않으므로 사적(事迹)의 근원과 결말이 진실을 많이 담고 있고, 또 수십년 걸려 참고하고 정정했으며, 첨가하거나 삭제하고 분리하거나 합쳤음으로 사실은 더욱 상세해지고 문장은 더욱 간결해졌다. 또 시비(是非)가 오랜 후에 확정되어 집필자가 그 사이에 은폐함이 없어 더욱 근거 있고 신빙성 있게 되었다” >----- >《이십이사차기》(二十二史箚記)』 권31 <명사> 《명사》는 강희제의 주도하에 오랜 시간을 투자하여 정밀한 검정을 통해 위와 같이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중국 관찬사서의 한계로 당시 정권의 정통성을 건드릴 수 있는 문제는 감추거나 왜곡했다.[* 일부 역덕들이 중국 당국이 펴내는 《[[청사고|청사]]》가 중국공산당의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해 역사를 왜곡하면 어떡하냐고 걱정하고 있지만, 실제로 중국의 다른 관찬사서들도 거의 같은 목적으로 서술된 것이다. ] 예를 들어 명나라의 신하를 자처했던 청나라의 전신인 건주위에 관한 사실을 감춘 것은 대표적인 예이다. 또한 청나라가 반란세력으로 간주했던 남명의 [[홍광제]](弘光帝), [[융무제]](隆武帝), [[영력제]](永曆帝) 등 [[남명]]의 황제들을 <부전>(附傳) 속에 격하시켜 남명의 역사적 사실을 자세히 다루지 않거나 은폐했다. 특히 [[명청교체기]] 당시 청나라와 대적한 한족 지도자들이 이끈 농민봉기에 대해선 평가가 매우 나빠서 명사 [[장헌충]]전의 경우 '''장헌충이 사천의 남녀 6억을 학살했다'''는 말도 안 되는 기사를 실었으며[* 명사 장헌충전은 청나라 황제들의 의도에 따라 '수구기략(綏寇紀略)'이라는 사료에 근거하여 작성했다. 그러나 '수구기략'의 저자인 오위업은 당시 성도지현을 역임했다가 장헌충에 의하여 죽임을 당한 오계선의 집안사람이라 그 사실성이 크게 의심되는 사료다.] 이 때문에 '장헌충이 사천인들을 모조리 몰살시켜 사천인들의 계보가 끊겼었다'는식의 잘못된 얘기가 현대에까지 전승되어 내려오는 원인중 하나가 되었다. 주목할만한 특징으로, 《명사》는 24사에 포함되는 역대 사서 중 유일하게 편찬의 기초 자료가 된 《[[실록]]》이 거의 온전하게 현전한다. 때문에 다른 사서들과 달리 내용을 《명실록》의 기록과 비교함으로서 《명실록》의 내용이 어떤 식으로 반영되었고 어떤 식으로 축약되었는지, 변형이 일어난 내용이 있다면 어느 내용이 어떻게 변형되었는지 파악할 수 있다. 사실 [[명청시대|명사가 편찬된 시기]] 쯤 부터는 굳이 정사에 의존하지 않아도 정사의 바탕이 된 각종 풍부한 문헌들이 많이 남아 있을 시기이기 때문에 명나라 역사 연구에 꼭 명사만을 의존할 필요가 없고 다른 사서를 같이 참고하는 것이 더 중요한 시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고려사 연구 한정으로 여말선초 시기를 잘 알 수 있는 사료이기도 하다. == 링크 == [[https://zh.wikisource.org/wiki/%E6%98%8E%E5%8F%B2|위키문헌 - 명사 원문]] [[분류:명나라]][[분류:중국 정사]][[분류:관찬사서]][[분류:기전체]][[분류:단대사]]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