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막시미누스 다이아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분류:로마 제국 집정관]][[분류:로마 황제]][[분류:사두정치]][[분류:4세기 집정관]][[분류:270년 출생]][[분류:313년 사망]][[분류:자예차르구 출신 인물]][[분류:로마 제국의 고대 로마 다신교 신자]] [include(틀:역대 로마 황제)] || '''{{{#FCE774 막시미누스 다이아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로마 제국의 전제정)] ---- [include(틀:역대 로마 집정관/4세기)] }}} ||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8F0E09, #9F0807 20%, #9F0807 80%, #8F0E09);" '''{{{#FCE774,#FCE774 로마 제국 제44대 황제}}}[br]{{{#FCE774,#FCE774 {{{+1 막시미누스 다이아}}}[br]MAXIMINVS DAZA}}}'''}}}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MaximinusDaiaFinds.jpg|width=100%]]}}} || || {{{#FCE774,#FCE774 '''이름'''}}} ||갈레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누스[br]Galerius Valerius Maximinus || ||<|2> {{{#FCE774,#FCE774 '''출생'''}}} ||270년 11월 20일 || ||[[로마 제국]] 다이아 || ||<|2> {{{#FCE774,#FCE774 '''사망'''}}} ||313년 7월 (향년 42세) || ||[[로마 제국]] 타르수스 || ||<|4> {{{#FCE774,#FCE774 '''재위 기간'''}}} ||{{{#000 동방 부제}}} || ||[[305년]] [[5월 1일]] ~ [[310년]] '''(5년)''' || ||{{{#000 동방 정제}}} || ||[[310년]] ~ [[313년]] [[7월]] '''(3년)''' || || {{{#FCE774,#FCE774 '''전임자'''}}} ||[[갈레리우스]] || || {{{#FCE774,#FCE774 '''후임자'''}}} ||[[리키니우스]] || || {{{#FCE774,#FCE774 '''부모'''}}} ||[[아버지]] : [[갈레리우스]] || || {{{#FCE774,#FCE774 '''배우자'''}}} ||2명 || || {{{#FCE774,#FCE774 '''종교'''}}} ||[[로마 신화|로마 다신교]] || [목차] [clearfix] == 개요 == [[로마 제국]]의 황제. 전대에 [[군인 황제 시대]]를 열어젖혔던 [[막시미누스 트라쿠스]]가 같은 막시미누스라는 이름을 쓰고 있으므로 거기에 연이어서 [[막시미누스 2세]]라고 하기도 한다.[* [[영어 위키백과]]에는 항목명이 [[https://en.wikipedia.org/wiki/Maximinus_II|막시미누스 2세]]로 되어 있다.] 파라오 지위를 가졌던 최후의 [[파라오]]이다. == 생애 == 로마시대 [[갈레리우스]] 황제의 외조카로 305년 외삼촌인 [[갈레리우스]]에 의해 동방 부제의 자리에 올라 이집트와 시리아의 통치권을 위임받았다. 하지만 308년 자신의 외삼촌에 의해 [[리키니우스]]라는 무명의 군인이, 전현직 여러 황제들을 소집한 회동에서 서방의 [[정제#s-3]][* 저 회동 자체가, [[사두정치|4두정치]]를 지키려는 의도였겠지만, '''오히려 스스로 4두정치를 파괴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정제를 부제에서 올려야지, 웬 듣보잡을 자기 친구라고 해서 바로 정제로 올렸기 때문이다.]에 오르게 되자 불만을 품게 된다. 그래서였는지, 동방 정제인 삼촌이 멀쩡히 살아있던 310년에, 자신에게도 정제 지위를 달라고 삼촌에게 요구했지만, 삼촌 갈레리우스는 정제의 희소성을 생각해서 딱 잘라 거절하고 대신 Filius Augusti(아들 황제)라는 칭호를 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것에 아랑곳없이 막시미누스는 정제의 복장과 상징을 자기 멋대로 그냥 썼다고 한다. 기독교를 싫어해서, 외삼촌 갈레리우스가 사후 한 달 전쯤(311년 4월) 발표했던 기독교 관용령([[https://en.wikipedia.org/wiki/Edict_of_Toleration_by_Galerius|Edict of Toleration by Galerius]])를 그냥 무시하고 자신의 지배 영역에서 유혈 탄압을 행했다고 한다. 심지어 병사들이 기독교인들을 쫓다가 어느새 '''아르메니아 국경을 그냥 넘어가서'''(...) 아르메니아 쪽에서 크게 항의를 했다고도 한다. 그래서 그런지, 기독교 사가 [[락탄티우스]]의 <박해자의 최후>(De Mortibus Persecutorum)에 의하면, 그의 최후에 대한 묘사는 삼촌 [[갈레리우스]]처럼 최대한 리얼하게 나와 있는데, 잘 죽었다고 비꼬는 것으로 보인다.[* 음독 후 며칠에 걸쳐서 정신착란, 발작, 흙 집어 먹기, 맨벽에 이마 찧기, 안구에서 빠져나온 눈알 등등... ] [[311년]] 외삼촌 갈레리우스 사후 서방 정제의 직위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동방으로 오게 된[* 서방에는 경쟁자가 콘스탄티누스, 막센티우스 둘인데 동방에는 경쟁자가 다이아 하나인 점 때문으로 보인다.] 리키니우스와는 관할권을 두고 싸움을 벌일 수밖에 없게 되었고([[사두정의 내전]]), 2:2 구도가 되니 [[적의 적은 나의 친구]]의 원리로 [[막센티우스]][* 원래 리키니우스는 서방 정제로, 서방에서 가장 중요한, 즉 정제가 영유할 땅은 당연히 로마 시가 있는 이탈리아고, 그런 이탈리아는 식량 안보 및 지정학적 특징 때문에 북아프리카와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원래라면 리키니우스의 땅이었을 곳을 막센티우스가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와 동맹을 맺게 된다. 하지만 막센티우스가 콘스탄티누스에게 [[밀비우스 다리 전투|패해 죽어서]] 먼저 떨어져 나갔고, 결국 [[313년]] [[4월 30일]] [[트라키아]]의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Tzirallum|치랄룸(Tzirallum)에서 리키니우스에게 패하게 되면서]][* 에디르네(아드리아노플) 근교라, 이 전투가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Adrianople_(disambiguation)|역사상 여러 아드리아노플(에디르네) 전투 목록]]의 처음을 장식한다.] 결국 몰락하고 후퇴하면서[* <비잔티움 연대기>에 의하면 노예로 위장하고 달아났다고 한다.(...)] [[니코메디아]]를 거쳐 그 해 8월, [[소아시아]] 남동부의 [[타르수스]]에서 향년 만 42세로 죽었다.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 제국 쇠망사]]에 의하면 독(Poison)이 확실히 언급되었으므로, 독살이었거나 독으로 자살했을 것으로 보인다.[* His death was variously ascribed "to despair, '''to poison''', and to the divine justice".] 당대의 자료인 위에 언급했던 <박해자의 최후>에서도 '''그는 독을 삼켰다.'''고 하고 있다.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