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류소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분류:고려의 배향공신]][[분류:정주 류씨]][[분류:1038년 사망]] [include(틀:고려의 배향공신)] ---- [include(틀:고려 정주 류씨)] ---- ||<-2> '''천리장성 건설자[br]{{{+1 류소}}}''' || || '''시호''' ||'''양의공(襄懿公)''' || || '''삼사''' ||'''태위(太尉)''' || || '''직위'''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 || '''본관''' ||정주 류씨 || || '''이름''' ||소(韶) || || '''생몰연도''' ||? ~ 1038.04 || [목차] [clearfix] == 개요 == [[고려]]왕조 [[덕종(고려)|덕종 경강대왕]] 대의 문신. 정주 류씨의 시조라고도 전한다. 그를 기점으로 그의 아들, 그의 손자가 모두 시호를 받고 묘정의 배향공신이 되어 최고의 문벌귀족 가문 중 하나가 되었다. 류소는 현종, 덕종, 정종 3대 임금을 섬겼으며, 현종의 명령으로 조정의 3인자급인 참지정사가 되어 천리장성 축조의 책임자가 되었다. 덕종 대엔 2인자급인 평장사가 되어 북방 외교를 주도한다. == 상세 == === 초기 커리어 === 현종 때 등용된 후 중앙의 관직을 거쳤다가 1029년 왕명으로 흥화진 서북쪽 40리에 있던 석성 수리 및 진 설치를 맡으며 변방에서 근무하기 시작한다. 정융진(定戎鎭), 위원진(威遠鎭)을 설치했으며 이 때부터 현종의 눈에 띈 것으로 보인다. === 흥료국 사태 === 류소는 1020년대엔 서북면 병마판사(西北面 兵馬判事)[* 병마판사는 판병마사의 별칭으로 지금의 군단장급 직위이다.] 직을 맡고 있었다. 류소는 고려 서북면으로 나가있다가 상을 당해 임시 휴직을 낸 상태였는데, 거란에서 [[흥료국]]이 건국되어 반란이 터지자 변방이 혼란스러워질 것을 걱정한 현종은 류소에게 다시 돌아오라는 교지를 내린다. 이에 장례식을 중단하고 병마판사로 돌아온 류소는 유사시 빠르게 대응할 수 있도록 판상서이부사(判尙書吏部事)[* 상서성 소속인 이부의 장관.] 및 참지정사(叅知政事)[* 중서문하성 소속 직위로 서열 3위인 최고위 관직이다.]로 승진하여 조정의 3인자가 된다. === 천리장성을 쌓다 === 이후 현종이 붕어하고 덕종이 즉위하자 중앙으로 돌아와 평장사 벼슬을 지내게 되는데 이 벼슬은 종 2품으로서 당시 수상격이었던 [[문하시중]] 다음가는 고위직이었다. 1033년(덕종 2년) 고려는 국경방어를 위한 장성의 축조를 기획하게 되었고, 변방 경험이 많은 류소가 이 일을 담당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천리장성]]이다. 조정의 No. 2 대신이 직접 담당할 정도였으니 덕종이 매우 야심차게 준비했음을 알 수 있다. 류소는 우선 옛 석성(石城)을 수리하고 위원진, 정융진을 두어 국방을 강화하였다. 그리고 수리한 석성들을 바탕으로 축성 계획을 세웠고, 국경 각 지에 산재해 있던 성들을 연결하고 새로 축조하거나 보수하였다. 류소는 1034년 장성 축조의 공으로 추충척경공신(推忠拓境功臣)에 봉하여졌으며, 은청광록대부[* 문산계 품계로서 정 3품 품계.] 상주국[* 최고위 훈위. 명예직이다.] 태위[* 정 1품 삼사직. 천자의 스승이라는 명예직이다.] 문하시랑평장사(銀靑光祿大夫 上柱國 太尉 門下侍郎平章事)가 되었다. === [[북벌]] 시도 === 거란이 지속적으로 압록강에 다리를 만들려 하는 등 견제 행위를 멈추지 않자 평장사 류소는 덕종에게 거란을 먼저 침공하자는 제안을 올린다. 류소는 압록강 이북의 성을 파괴하고, 군대를 북진하여 주둔시키려 한 것으로 보이는데, 당시 매파였던 [[왕가도]], [[이단]] 등이 열렬히 찬성했다. 덕종 역시 상당한 강경파였기에 꽤나 고민한 것으로 보이는데, [[서눌]], [[황보유의]], [[최충]] 등 신하들의 강한 반대로 결국 태묘에서 친 점괘가 불길하다는 이유로 각하된다. 점괘의 결과는 사실 어쨋든 좋은 핑계이고 실제 이유는 덕종이 비둘기파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이 이후 류소는 별 다른 기록이 안보이는 것으로 봐선 천리장성 축조에 신경을 쓴 듯하다. === 사망과 이후 === [[천리장성]]의 완성은 1044년(정종 10년)에 이루었는데, 류소는 1038년 4월 무진일에 죽어 그 완성을 보진 못하였다. 하지만 현종, 덕종 양대에 걸쳐 국방 및 외교에 커다란 존재감을 드러낸 덕분에 덕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아들로 [[류홍]]이 있었는데, 그는 생전 자신의 직위인 문하시랑평장사까지 올랐고 사후 문하시중에 추증되었다. 류소의 친손자 [[류인저]]도 크게 중용되어 류소, 류홍, 류인저 삼대가 배향공신이 되었다. 류소의 친손녀 [[명의태후]]는 숙종의 왕후가 되어 이후의 고려왕가는 류소와 혈연을 가지게 되었다. == 둘러보기 == [include(틀:고려사)]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