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레바논 영화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include(틀:세계각국 영화)] [include(틀:레바논 관련 문서)] [목차] == 개요 == [[레바논]]의 [[영화]] 산업에 대한 문서. 시장 규모는 영세하지만, [[중동]] [[국가]] [[영화]] 산업 중에서 특이할 정도로 '''거장들과 명작들이 넘쳐나는, 매우 수준 높은 영화 산업 기반을 보유하고 있다.''' == [[영화 시장]] == [[레바논]]의 [[영화 시장]]은 추산치가 매우 오래되었다. [[레바논]] 나라 자체가 주변국들의 혼란으로 제대로 신경 쓸 겨를이 없기 때문이다. [[2006년]]이 최신 자료로 4840만 [[레바논 파운드]]의 연간 총 수입을 올렸다. [[대한민국 원]]화로 3,600만원, [[미국 달러]]로 고작 30,000 달러 수준이다. 3억 달러도 아니고 300만 달러도 아닌 '''고작 3만 달러''' 수준인 것이다. 자국 영화 비중은 2006년 기준 '''4.1%''', 한국 원화로 치면 고작 1년에 110만 원 정도가 자국 영화 소비에 쓰였다는 뜻이다. [[영화관]] [[스크린]] 수는 [[2009년]] 기준 185개. [[2010년]] 기준 총 관람객 수는 2,794,708명으로, 당해 레바논 인구는 430만 명이었으니 인구 1인당 [[영화]] 연간 관람 횟수는 '''0.65회''' 정도이다. 영화 시장이 작기 때문에, [[상업영화]]는 [[수입]], [[예술영화]]는 자체제작하여 [[수출]]하고 있다. == 역사 == === [[시리아-레바논]] === 레바논에 [[영화]]가 도입된 것은 [[오스만 제국]]이 멸망하고 [[프랑스]]가 이 지역을 위임통치하기 시작한 [[전간기]] 때이다. [[1920년]] [[레바논]]에 첫 [[영화관]]이 설립되었다. [[프랑스 영화]] [[수출]]을 위해 프랑스 정부에서 정책적으로 레바논을 밀었기 때문에, [[1923년]]부터 [[1929년]]까지 레바논 [[영화관]] 수는 급격히 증가하였다. 정작 이 영화관은 [[1925년]] 이후 [[공산당]]의 집회를 위한 [[아지트]]로 이용되고, [[프랑스]] 위임통치 정부에 대한 [[테러]] 전진기지로 사용되기도 했다.(...) [[세계 대공황]]으로 인해 [[프랑스]]에서는 레바논 [[영화관]] 표값을 대폭 인상하였다. 이 때 [[시리아-레바논]]에서는 학생들이 동맹 휴교를 선언하고 영화 표값 인상철회를 요구하는 시위를 하기도 했다.[* Elizabeth (2000). Colonial Citizens: Republican Rights, Paternal Privilege, and Gender in French Syria and Lebanon. Columbia University Press. ISBN 978-0-231-10661-0. Retrieved 2 February 2013.] 이미 위임통치 시기에 레바논에 [[영화]]가 문화로 자리잡은 것이었다. 프랑스는 철저하게 레바논을 자국 영화의 [[수출]] 기지로 생각하였기 때문에, 레바논 자국 영화를 대부분 개봉 허가하지 않았고, 레바논의 독립을 나타내는 영화는 검열하였다. === [[1941년]] 독립 ~ [[1950년대]] === [[제2차 세계 대전]] 중인 [[1941년]], [[프랑스]]가 [[나치 독일]]의 [[프랑스 침공]]으로 멸망하자, 레바논은 이 때 독립을 선언하고 [[시리아]]와 [[레바논]]으로 독립한다. 레바논은 [[1941년]] 독립을 선언하고, [[1943년]] 결국 독립을 쟁취한다. 레바논이 독립을 쟁취한 이후, 수도인 [[베이루트]]에 경제력을 집중하고, [[영화]] 산업도 베이루트와 베이루트의 교외지역인 Aley에 집중하기로 했다. 레바논은 이런 집중 전략으로 일부 성공을 거둬, [[1940년대]] ~ [[1950년대]]까지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경험한다. 참고로 이 시기에 레바논 바로 아래가 [[이스라엘]]이었기 때문에, [[레바논]] 역시 [[중동전쟁]]에 참전했지만 이스라엘에 번번이 깨졌다.(...) 레바논이 성장을 겪던 시기에 조르주 나세르가 처음으로 [[칸 영화제]]에 [[1958년]] Ila Ayn을 상영시키는 데에 성공하며 본격적으로 레바논 영화가 세계 무대를 밟기 시작하였다. 조르주 나세르는 1927년생으로 놀랍게도 상당히 장수했다. 2019년 타계 당시 향년 92세. 비록 이후로 레바논 내전 등 어지러운 현실 때문에 딱 두 편만 만들고 은퇴한뒤 영화 학교 교수로 전업했지만, 죽기 직전 헌정 다큐멘터리를 찍고 칸에서 회고 상영이 열리는 등 제법 좋은 대우를 받았다. === [[1960년대]] ~ [[1970년대]] === === [[1980년대]] === [[1978년]] [[레바논 내전]]이 터지고 [[이스라엘]]이 레바논 내전을 핑계로 본격적인 국경분쟁을 일으키자 레바논은 급격히 위축되고 쇠락한다. 레바논 영화도 급격한 후퇴를 맞을 수밖에 없었다. === [[1990년대]] === === [[2000년대]] === === [[2010년대]] === [[2010년]] [[레바논]]에서 10편의 영화가 제작된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대침체]]의 여파를 이겨내고 레바논의 [[영화]] 생산이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2018년]] 제작된 [[가버나움]]은 [[칸 영화제]], [[베니스 영화제]], [[베를린 영화제]], [[아카데미 시상식]],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 부문에 진출하며 레바논 영화가 [[예술영화]] 분야에서 강한 나라라고 세계에 떨치고 있다. == [[영화 감독]] == * [[나딘 라바키]] == [[영화 배우]] == == 작품 == * [[가버나움]] * [[인설트]] * [[전장의 피아니스트]] == [[영화관]] == [[레바논]], [[시리아]], [[요르단]] 세 국가에 동시 진출한 [[영화관]]이 많다. ~~같은 레반트 지역이니까~~ [[분류:레바논 영화]][[분류:나무위키 영화 프로젝트]]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