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서는 rr20240101판에서 저장되지 않은 문서입니다.자동으로 r20210301판 문서를 읽어왔습니다. 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노석호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include(틀:김해시의 독립운동가)] ||<-2> [[파일:노석호.jpg|width=300px]] || || 성명 ||노석호(盧奭鎬) || || 이명 ||조대영(曺大永) || || 생몰 ||[[1916년]] [[11월 17일]] ~ [[1944년]] [[11월 11일]] || || [[출생지]] ||[[경상남도]] [[김해시|김해군]] 생림면 생철리 || || 사망지 ||장춘형무소 || ||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 [목차] == 개요 ==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노석호는 1916년 11월 17일 경상남도 김해군 생림면 생철리에서 태어났다. 1942년 [[박시목]]의 지시로 동지규합과 군자금모집을 위해 귀국한 박진목(朴進穆)이 경북 대구에 잠입하자, 그는 박진목과 접촉한 뒤 [[박봉필]], 박희규, 심재윤[*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심재윤(독립운동가)|심재윤]]과 동명이인이다.] 등과 함께 국내 비밀결사 조직, 독립운동자금 모집 등을 위해 활동했다. 이후 1943년 초 박진목의 주선으로 박희규, 심재윤과 더불어 중국 베이징을 거쳐 옌안으로 망명했고 모종의 임무를 띠고 박희규와 함께 옌안에서 봉천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도중에 산해관에서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어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장춘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가혹한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1944년 11월 11일에 옥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3년 노석호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 여담 == 2020년 4월 14일, 노석호의 아들 노석호가 독립유공자 후손 1544명과 더불어 "친일반민족 방송 [[TV 조선]], [[채널 A]] 재승인을 취소하라"는 내용의 의견서를 [[방송통신위원회]]에 전달했다.[[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6532|#]] [[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김해시 출신 인물]][[분류:1916년 출생]][[분류:1944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족장]]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