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김광석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include(틀:다른 뜻1, other1=이 인물의 사망 의혹을 다룬 영화, rd1=김광석(다큐멘터리), other2=동명이인, rd2=김광석(동명이인))] [include(틀:김광석)] ---- ||<-2> {{{#ffffff '''{{{+1 김광석}}}[br]金光石 | Kim Kwang Seok'''}}}[* 여권에 표기된 정식 영어 표기. [[https://v.daum.net/v/JrvFd3vBfP|#]] 그의 미국 공연 실황을 담은 영상에서는 'Kim Kwang Suk'으로 표기되어 있다. [[https://riss.kr/search/Search.do?isDetailSearch=N&searchGubun=true&viewYn=OP&query=%EA%B9%80%EA%B4%91%EC%84%9D&queryText=&iStartCount=0&iGroupView=5&icate=all&colName=bib_t&exQuery=&exQueryText=&order=%2FDESC&onHanja=false&strSort=RANK&pageScale=10&orderBy=&fsearchMethod=search&isFDetailSearch=N&sflag=1&searchQuery=%EA%B9%80%EA%B4%91%EC%84%9D&fsearchSort=&fsearchOrder=&limiterList=&limiterListText=&facetList=&facetListText=&fsearchDB=&resultKeyword=%EA%B9%80%EA%B4%91%EC%84%9D&pageNumber=1&p_year1=&p_year2=&dorg_storage=&mat_type=&mat_subtype=&fulltext_kind=&t_gubun=&learning_type=&language_code=&ccl_code=&language=&inside_outside=&fric_yn=&image_yn=®nm=&gubun=&kdc=&ttsUseYn=|그의 음악 행보와 김광석거리를 주제로 다른 논문들]]의 표제의 영어 표기에는 'Seok'과 'Suk'이 혼용된다.]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김광석1131.jpg|width=100%]]}}} || ||<|2> '''출생''' ||[[1964년]] [[1월 22일]] || ||[[경상북도]] [[대구광역시|대구시]] [[남구(대구광역시)|남구]] [[대봉동]][* 출생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서울특별시]]로 올라갔기에, 사실상의 출신지는 [[서울특별시]]이다. 그의 주민등록번호(640122-1001817)의 지역 란에는 [[서울특별시]]에 해당하는 '''00'''으로 표기되어 있다. [[주민등록번호]]가 1968년 말부터 전 국민에게 순차적으로 부여되었고, 주민등록번호가 부여될 당시에는 서울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00이 부여된 것으로 보인다.][*봉덕동 그의 친형인 김광복씨는 김광석의 출생지이자, 생가를 [[남구(대구광역시)|남구]] [[봉덕동]] 구 남도극장네거리 일대로 증언하고 있다. 4남매는 모두 범어동 본가에서 태어났고, 막내인 김광석은 봉덕동에 있었던 번개전업사로 이사온 뒤 태어났다고. [[https://m.yeongnam.com/view.php?key=20140207.010330741310001|#]]] 번개전업사[br](現 [[대구광역시]] [[중구(대구광역시)|중구]] [[대봉동]]) || ||<|3> '''사망''' ||[[1996년]] [[1월 6일]][* 빈소는 [[세브란스병원]]에 마련되었고, [[1월 8일]] 서울시립승화원에서 화장되었다.] '''(향년 31세/28주기)'''[* 현재 김광석의 음반 등 저작권을 소유하고 있는 회사가 'With33엔터테인먼트'인데, 이는 김광석이 사망할 당시의 [[세는나이]]였던 33세에서 따온 것이다. 만약 살아있었다면 세는 나이로 [age(1963-01-01)]세, 만 나이로 [age(1964-01-22)]세로, 2024년에 환갑을 맞이하였을 것이다.]||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신촌동(서울)|신촌동]] [[세브란스병원]][* 아내인 서해순이 발견 후 30분 뒤에 신고해, 1시간 후인 새벽 4시 30분에야 병원에 도착하는 바람에 ([[심정지]]가 일어나고 4분 뒤부터 뇌에 손상이 가기 시작한다.) 서교동 자택에서 [[DOA|이미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되나]], [[의료법]]상 사망 판정은 의사만 내릴 수 있기 때문에 공식적인 사망 장소는 세브란스병원으로 본다.] || ||불완전 의사[* 신체의 일부가 지상 또는 주위의 물체에 지지되어 체중의 일부만이 목을 조여 [[질식사]]한 것을 의미.] || || '''거주지''' ||[[서울특별시]] [[마포구]] 독막로7길 39 원음빌딩[* 본인 소유의 건물이었다. 1994년 10월 14일에 전입. 202호에는 [[https://m.blog.naver.com/black_stones/20149336030|팬클럽인 '둥근소리'가 들어와 있었고,]] 403호에는 본인의 자택이 있었다.]{{{#!folding [ 이전 거주지 ] [[경상북도]] [[대구광역시|대구시]] [[남구(대구광역시)|남구]] [[대봉동]][*봉덕동],,(1964 - 1969),,[br][[서울특별시]] [[중구(서울특별시)|중구]] [[동호로(서울)|동호로]],,(1969 - 1972),,[br][[경상북도]] [[대구시]] [[동구(대구광역시)|동구]] [[범어동(수성구)|범어동]] 268,,(1973 - 1974),,[br][[서울특별시]] [[종로구]] [[창신동]] 창신5길 47[* 김광석이 분가한 이후에도 부모가 살고 있었으며, 김광석의 모친 이달지씨가 2013년 건강 악화([[치매]])로 거취를 옮기기 전까지 거주하게 된다. 이후 [[2015년]] [[11월 2일]]에 매각된다. [[http://bujadongne.com/news/newsview.php?ncode=1065625196815332|#]]],,(1974 - 1990),,[br][[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동안로]] 283 [[e편한세상|뉴타운삼호아파트]],,(1990 - 1994),,[br][[서울특별시]] [[마포구]] 독막로7길 39 원음빌딩[* 현재는 이정빌딩으로 이름이 바뀌었다.],,(1994 - 1996),,}}} || || '''장지''' ||[[경상북도]] [[봉화군]] [[청량산]][* 2003년에 유골과 사리가 뿌려졌다.[[https://weekly.donga.com/3/search/11/77876/1|#]] 위치는 불명. 유골이 산속에 뿌려진 관계로 추모 관련 행사는 [[서울특별시]] [[노원구]] [[상계동]]에 위치한 청광사에서 진행한다.] || || '''국적''' ||[include(틀:국기, 국명=대한민국)] || || '''직업''' ||[[싱어송라이터]] || || '''본관''' ||[[김해 김씨]][* [[http://m.jabo.co.kr/13814|#]]] || || '''데뷔''' ||[[1984년]] [[5월 31일]] [[노래를 찾는 사람들]] [[노래를 찾는 사람들 1|1집]][br]{{{-2 (데뷔로부터 '''D[dday(1984-05-31)]일, [age(1984-05-31)]주년''')}}}|| || '''서명'''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background: #FFF; border-radius: 4px" [[파일:김광석 서명.svg|width=200]]}}} || || '''링크''' ||[[http://www.kksstory.house/ko/|[[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width=20]]]] [[https://kkshappy.modoo.at/|[[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width=20]]]] [[http://kimkwangseok.or.kr|[[파일:대봉문화마을협의회 마크.jpg|width=20]]]] [[https://www.youtube.com/channel/UCSHLx6dH6hLY7anLF9nFPdg|[[파일:유튜브 아이콘.svg|width=20]]]]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본적''' ||[[경상북도]] [[달성군]] [[수성구|수성면]] [[범어동(대구)|범어동]] 268[br](現 [[대구광역시]] [[수성구]] 범어로18길 22 [[힐스테이트 범어]])[* [[http://theme.archives.go.kr/viewer/common/archWebViewer.do?bsid=200301394224&dsid=000000000044&gubun=search|1912년 당시 지적원도 참고]]. 힐스테이트 범어 101, 102동과 [[경신고등학교(대구)]] 건물 일대로 추정된다.] ---- [[경기도]] [[안양시]] [[비산동(안양)|비산동]] 354-10[br](現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동안로]] 283 [[평촌 자이 퍼스니티]])[* 결혼 이후부터 [[1994년]] [[10월 13일]]까지 거주하였던 뉴타운삼호아파트의 주소. 공교롭게도 본적지 두곳 다 재개발이 진행되어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사망진단서 사망진단서에 적힌 본적지. 분가 등으로 본적지가 바뀐 것으로 보인다.] || || '''신체''' ||164cm[* 콘서트 중에 본인의 일화 하나를 소개하며 밝혔다.], 58kg || || '''학력''' ||서울창신국민학교 {{{-2 (전학)}}}[br][[대구동덕초등학교|대구동덕국민학교]] {{{-2 (전학)}}}[* 이미 6살 때 서울로 이사를 갔지만, 대봉동 본가에 계신 조부모의 건강 문제로 누나와 함께 1년 간 대구에서 보내다가 다시 서울로 간다. [[https://m.yeongnam.com/view.php?key=20110114.010340759390001|#]]][br]서울창신국민학교 {{{-2 (졸업)}}}[br][[경희중학교]] {{{-2 (졸업)}}}[br][[대광고등학교]] {{{-2 (졸업)}}}[br][[명지대학교/학부/경영대학|명지대학교 경상학부]] {{{-2 ([[경영학]] [[1982년|82]] / [[학사]])}}} || || '''가족관계''' ||아버지 김수영^^(1920년대 ~ 2004년 10월 8일)^^[* [[6.25 전쟁]] 참전용사로 [[1953년]] [[12월 28일]] [[국방부장관]] 명의의 무공훈장을 받은 국가유공자로, [[제8보병사단]]에서 육군 [[대위]]로 복무했다. 아내 이달지와 함께 [[국립대전현충원]] 장병2묘역에 안장되었다.][br]어머니 이달지^^(1930년 9월 23일 ~ 2016년 4월 1일)^^[* 경상북도 [[달성군]] [[화원읍|화원면]] 설화리 (현재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설화리) 출신으로, 김광석이 서울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생가에서 2013년까지 살다, [[강북삼성병원]]에서 사망하였다. 남편 김수영과 함께 [[국립대전현충원]] 장병2묘역에 안장되었다.][br]아내 서해순^^(1965년 9월 14일 ~ )^^[* With33엔터테인먼트 대표이사. 김광석이 사망했던 그해 나이(세는나이로 33살)를 따서 이름을 지었다.][br]외동딸 김서연^^(1991년 5월 30일 ~ 2007년 12월 23일 / 향년 16세)^^[* 개명 전 본명은 김서우였으며 [[자폐성 장애]]가 있었던 고인의 아픈 손가락이었다.][* 전에는 [[미국]] 유학 중인 것으로 알려졌으나, 2007년 12월 23일에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고매동]] 자택에서 의식불명으로 발견되어 [[수원시|수원]] [[아주대학교병원]]으로 이송되던 중 사망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납골함에 성도라는 글자와 크리스천을 뜻하는 십자가 표시가 있는 것으로 보아, 무종교인인 부친과는 달리, [[크리스천]]이었던 듯하다.][br]큰누나 김광나[br]작은누나 김광득[br]큰형 김광동^^(1950년대 중반 ~ 1980년 10월 3일)^^[* 사망 당시 최종 계급은 [[대위]]. 군복무 중 사고로 1980년에 순직했다고 김광석이 생전 언급한 바 있다. 안타깝게도 결혼을 이십 일 앞두고 있었다고 한다. 생전에 [[경기도]] [[연천군]]에 있는 [[28사단]]에 마지막으로 근무하였으며,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이 되어있다. 제29묘역 2행 39열에 안장.][br]둘째형 김광복^^(1959 ~ )^^[* 김광석의 가족을 대표해서 서해순을 고소하러 법정에 모습을 드러낸 사람이다.] || || '''병역''' ||[[대한민국 육군]] 이병 소집해제 {{{-1 ([[방위병]])}}}[* 큰형 김광동씨의 사망으로 구 병역법 제54조 1항의 4(부 또는 형제중 전사ㆍ순직자가 있는 경우)에 따른 방위병 복무.] || || '''종교''' ||[[개신교]]([[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예장통합]])[* [[대광고등학교]]가 개신교계 고등학교였던지라 교회에 다녔었다고 한다. 동대문 동신교회에 출석했으며, [[조영남]]의 교회 후배였다고.] → [[무종교]][* 흔히 [[불자#s-1|불자]]라고 알려져 있지만, 여러 차례 인터뷰에서 종교가 없다고 밝힌 적이 있다. 다만, '둥근 소리'라는 뜻의 원음(圓音)이라는 [[불교]] [[법명]]을 받은 적이 있으며, 불교방송의 진행을 맡기도 했고, 사망 당시 위패도 수안사에 안치되는 등 불교계와의 교류가 잦았다.] {{{-2 ([[법명]]: 원음)}}}[* 원음이라는 법명은 불교시민운동단체 '맑고 향기롭게'의 활동에 참가한 인연으로 [[법정(승려)|법정스님]]이 지어주었다고 한다. 본인은 생전 이 법명을 매우 마음에 들어해 본인의 자택 이름을 '원음빌딩'이라 짓고, 팬클럽 이름도 원음을 직역한 '[[둥근소리]]'로 짓기도 하였다.] || || {{{#fff '''퍼스널 컬러'''}}} ||{{{#!wiki style="display: inline; background: #435F4E; border-radius: 3px; padding: 3px 4px" {{{#ffffff '''수박색 (#435F4E)''' }}}}}}[br]{{{#!wiki style="display: inline; background: #996633; border-radius: 3px; padding: 3px 4px" {{{#ffffff '''고동색 (#996633)''' }}}}}} || || '''별명''' ||'''가객(歌客)''', '''[[음유시인|노래하는 시인]]''',[br]숏다리(휜다리)[* 본인의 공연 진행 중 밝힌 내용. 아는 지인이 오토바이를 타는 것을 보고, 40살때에(7년 뒤라는 언급으로 보아 공연의 연도가 [[1995년]]인걸로 보인다.) [[할리 데이비슨]]의 오토바이를 타고 싶었다고 한다. 그랬더니 주변에서 ''''[[숏다리|다리가 닿겠니?]]''''라고 걱정을 했다고. 다행히 충무로 매장에서 시승한 결과, 닿긴 닿았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이루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였다.], 반쪽, 작은 돌, 또해[* 공연을 계속 하여 ''''또 해?''''라는 별명이 붙었다. [[별이 빛나는 밤에|문화방송의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하려 기다리고 있을 때, 누군가가 자신을 보고 '''"또해 왔다"'''고 말해 그 별명을 알게 되었다고. 그러나 김광석 본인은 ''''해''''라고 불러주길 원했다고 한다.], 아저씨(형)[* 김광석의 팬들과 그와 친했던 사람들이 그를 부르는 애칭. 사후에 친근한 이미지였던 그를 추모하는 의미로 붙은 호칭은 아니고, [[https://m.blog.naver.com/black_stones/20149333652|그가 살아있을 당시에도 쓰였다.]]] || }}}}}}}}} || [목차] [clearfix] == 개요 == ||||{{{#!wiki style="margin:10px" {{{-1 '''사람들이 너무 쉽게 포기하고 잘못된 사실에도 대충 익숙해져버리려는 것 같아 안타까울 때가 많아요.[br]그런 사람들이 제 노래를 듣고 한 번쯤 '아, 나도 저런 때가 있었지?' 하고 돌아보는 계기가 된다면,[br]제 노래 인생은 충분한 가치를 지닌다고 봅니다.'''}}}}}} ---- {{{#!wiki style="margin:4px" {{{-2 김광석, 1995년 9월 『월간 샘터』 인터뷰 中 }}}}}} || [[대한민국]]의 [[가수]], [[싱어송라이터]]. 흔히 알려져 있는 별명은 '가객(歌客)'. 진정성 있고 마음을 울리는 목소리로 많은 명곡을 남긴 [[싱어송라이터]]로, 대한민국에 [[포크송]] 붐을 일으켰던 전설적인 가수이며, 시간과 공간에 상관없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노래해 한국인들의 인생과 감성을 감미롭게 표현한 가수다.[* 또한 포크 음악을 리메이크한 [[다시 부르기 1]]과 [[다시 부르기 2]] 음반을 발매, 큰 인기를 끌며 한국 음악계에 '[[커버(음악)|리메이크]]' 열풍을 이끌어 낸 장본인이다.] == 생애 ==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WTmZJU_Vyo)]}}} || || '''김광석의 미공개 연습 영상'''[* 김광석 생전에 촬영된 영상 중 유일하게 김광석의 집 내부와 가족들의 모습이 나온 영상이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김광석_역대 프로필 사진.jpg|width=100%]]}}}|| || {{{#ffffff ''''''}}}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김광석_딸과.jpg|width=100%]]}}}|| || {{{#ffffff '''딸 김서연 양과 함께 있는 사진'''}}} || [* 위에서 세 번째의 얼굴은 그의 고등학교 졸업 앨범에 실린 사진이기도 하며, [[다시 부르기 2]]의 앨범 커버에도 들어가게 된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김광석/img_20130713_16.jpg|width=100%]]}}}|| || '''{{{#FFFFFF {{{-2 왼쪽부터}}}[br][[안치환|{{{#FFFFFF 안치환}}}]] • [[김광석|{{{#FFFFFF 김광석}}}]] • {{{#FFFFFF 배훈}}}}}}'''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551039944_57FzhU1S_img_20160330171827_686f1cbd.jpg|width=100%]]}}}|| || {{{#ffffff '''카페 '고리'를 운영하고 있는 김광석 (1987년 5월 25일)'''}}} || === 학창 시절부터 음악 활동 초반까지 (1964 - 1988) === ||김광석 본인이 '렛츠' 1995년 12월호에 기고한 글과, 잡지 '샘터'에서 김광석과 인터뷰한 글, 책 '김광석 평전'을 바탕으로 작성되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김광석_대광고 학생증.gif|width=100%]]}}}|| || {{{#ffffff '''김광석의 대광고등학교 학생증'''}}}[* 본적인 [[대구시]]가 별도의 광역자치단체가 아닌 '''[[경상북도]]''' 소속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대구직할시]]로 승격되고 범어동이 [[수성구]]에 편입되는 것은 그의 학생증이 발급되고 4개월 뒤인 [[1981년]] [[7월]]에 이루어진다.] || 1964년 1월 22일, [[경상북도]] [[대구시]] [[남구(대구광역시)|남구]] 대봉동[*봉덕동]에서 김광석이 태어난다. 그의 아버지 김수영씨는 [[대구사범대학]] 출신의 국민학교 교사로 재직하고 있었는데, [[4.19 혁명]] 직후인 [[1960년]] [[5월]],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의 전신이 되는 교원노조를 결성하는 데 동참하여 대구지부장과 교원노조 회지의 집필자로 활동하는 등 교원노조 결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 가 [[전국교직원노동조합/역사#s-5|교단에서 추방당했고]], 집안사람이 운영하는 전당포에서 일하다가[* 이때 어떤 사람에게 받은 회중시계에서 [[삐라|북한의 선전 유인물]]이 발견되어 간첩으로 의심받는 등 큰 곤혹을 치렀었다고 한다. 당시 반공 정서가 극심했던 것도 있었고, 거기에 교원노조 활동 이력이 있었기에 [[누명|어떤 죄목이 만들어져서]] [[중앙정보부|남산으로]] 갈 지 몰랐기에, 결국 '''다시 입대해서''' 대위까지 복무했다.] 시장에 전업사를 차려 생계를 꾸려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전업사는 장사가 잘 되어가지 않았고, 그의 아버지는 [[아메리칸 드림|서울로 가야 더 사업이 탄탄해질 것이라 믿고]] 김광석이 5살이 되던 해 [[장충단공원]] 인근인 서울 [[중구(서울특별시)/행정#s-7|장충동]]으로 이사를 갔고[* [[태극당]] 본점 뒤 골목이었다고 한다.], 초등학교 3학년이 되던 1972년에 옆 동네인 [[창신동]]으로 옮겨간다.[* 김광석이 초등학교 4학년이 되던 1973년, 범어동 본가에 계신 할머니의 건강이 악화되자, 김광석과 그의 누나는 다시 대구로 내려가 1년여간을 보낸 뒤 다시 서울로 올라온다.][* 원래는 [[대구 사투리]]를 썼던 것으로 보이나, 사투리로 또래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았다는 본인의 회고로 보아 스스로 말투를 고친 것으로 보인다. 표준어를 구사한 김광석과는 달리, 그의 가족들은 사투리 억양이 약간 묻어나는 말투를 구사한다.] [[경희중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는 특별활동으로 현악반에 들어가 [[바이올린]][* 1992년 6월 13일, 충남 예산에서 책마당 운영기금 마련을 위한 초청공연에서 안치환과 함께 나와 노래 부르는 유튜브 영상들이 있는데, 안치환이 '마른 잎 다시 살아나'를 부를 때 김광석은 바이올린을 주섬주섬 꺼내들고 연주한다.([[http://youtu.be/IrS1ZUx8lg4|#]])] 등의 다양한 악기를 배우며 악보 보는 법을 익혔고, [[1978년]] [[대광고등학교]]에 입학해서는 [[성가대]]와 합창단에서 활동하기도 했었다. 이후 김광석을 눈여겨본 교사가 [[음대]]에 진학할 것을 권유했고, 가족들도 반대를 하지 않았지만, 가난한 집안 형편에 더 부담을 주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결국 관심분야와는 거리가 먼 [[명지대학교]] [[경영학과]]에 들어간다. 대학교 1학년 때까지 그는 사회 문제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다. 친구들과 만나면 오히려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 [[국군기무사령부|보안사]] 다니는(= 자주 불려가는) 사람들은 가끔 사람 구실을 못 해서 문제다"'''라며 [[전두환 정부|정부]]의 공포정치를 합리화하는 모습도 보였을 정도였다. 그러나 세미나에서 [[사회과학]]을 공부하면서부터 그의 마음 속에는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기득권 세력들이 가난하고 못 사는 사람들에게 부린 횡포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고, 고교 때 진실이라고 배웠던 것들 가운데 진실이 아닌 것도 많음을 알게 됐다. 하지만 그러한 사회의 모습을 하나 둘 깨달으면서 적극적으로 저항하려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삶의 의욕을 잃게 되었다. 친구들과 함께 데모 대열에 합류해 구호도 외쳐봤지만, [[운동권]]은 자신이 설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삶의 목적을 잃은 채 방황하던 어느 날, [[서울대학교]]를 다니던 친구에게 '젊은 예수'라는 노래책[* 중간중간 시도 적혀 있고, 노래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고 한다.]을 받게 되고, 그 노래책에 있는 노래들을 살피다 그가 생각하던 현실과는 전혀 다른, 또다른 현실을 다룬 노래를 찾게 된다.[*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다룬 노래였다. 김광석 본인의 회고로는 이때까지 돈이 생기면 맨날 친구들이랑 술만 마시고 다녀서, 주변 사람들이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생활하는지 전혀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그 노래를 보고 다른 노래들도 찾아보며 본인 왈 ''''라디오에서 나오던 사랑 노래들이 아니라 세상을 향해 부르는 노래들''''에 관심을 갖게 되고, 그것을 계기로 그는 대학연합 노래패 서클인 '연합메아리'에 가입해 첫 음악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같은 해인 1982년 9월, 그는 이곳저곳 레스토랑을 찾아 다니다 [[서울특별시]] [[중구(서울)|중구]] [[무교동]]에 있는 '코스모스 코러스'라는 레스토랑에서 처음으로 노래하기 시작했으며, 그 이후로도 [[신촌(상권)|신촌]]과 [[이대]] 앞 등지를 떠돌며 밤무대에 섰다. 라이브 카페의 아르바이트와 대학 노래패 활동을 이어가던 [[1983년]] 2학기, 기어코 명지대학교로부터 [[학사경고]]를 받게 됐고, 가족들의 반대는 더욱 심해져 갔다. 바이올린과 기타를 사주며 그의 음악 활동을 가장 많이 지원해준 형 김광복은 그에게 '''"왜 그러고 사냐"'''며 질책하기도 했을 정도였다.[* 사실 김광복은 김광석이 음악을 취미생활로만 즐기고,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평범한 회사원으로 살아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근데 그런 동생이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밤무대나 돌다가 대학에서 경고까지 받았다.] 학사경고로 대학 생활에 위기가 닥치자, 군 입대를 결심하고 휴학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84년 여름, 대학 노래패 '연합메아리'에 초기 멤버로 참가했던 것이 계기가 되어 [[김민기(가수)|김민기]]와 함께 그의 동요 뮤지컬 개똥벌레 이야기 음반 제작에 참여했다. 그러나 김민기의 작품[* 과거 발표한 '''[[아침 이슬]]'''이라는 곡이 학생운동의 상징이 되어버린 것이 컸다.]이라는 이유로 심의에서 탈락했고, 김민기는 이를 만회하기 위해 '새벽'이라는 노래패와 음반의 기획을 제안했다. 그리고 이 음반은 훗날 [[노래를 찾는 사람들 1|노찾사 1집]]이 된다. 1985년 1월, 김광석은 6개월 단기 사병으로 군 복무를 했고, 1986년에는 제대를 했지만, 그가 활동하던 무교동과 대학교는 이전의 모습과는 많이 바뀌어 있었다. 라이브 무대를 주무대로 삼던 선배들은 방송으로, 친구들은 군 복무 중이거나 각자의 길을 찾아서 떠난 상태였다. 그는 다시 한 번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부모님은 가수라는 직업을 '딴따라'라고 여기며[* 특히 아버지가 자신의 사촌이 음악판에 뛰어들었으나 실패하고 미국으로 이민을 갔던 적이 있었기에 더더욱 반대했다고 한다.] 좀 더 평범한 직업을 가지길 바랬다. 그러나 형 김광복은 달랐다. 동생의 음악에 대한 열정을 잘 알고 있었던 그는 김광석이 최소한의 생활비라도 마련하라는 의미로 [[고려대학교]] 앞에 '고리'라는 카페를 차려주었다.[* 이름은 김광석 본인이 직접 지었는데, 이 카페가 사람들 사이의 인연을 이어주는 연결고리가 되길 바라는 의미였다고 한다.] 그렇게 그는 음악 활동을 계속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 복학과 함께 노래패 '새벽'의 활동을 재개한 김광석은 1987년 10월,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첫 공연에서 [[https://youtu.be/K5aP5zZBBOY?si=nhklq5i6fuCMZINk|'녹두꽃']][* [[김지하]]의 시를 원작으로 한 노래.]과 [[https://youtu.be/OwE86adWkHU?si=p73YnjjQ4NV2yDqv|'이 산하에']]를 불러 매우 뜨거운 반응을 얻었고, 집회 현장에서, 그리고 선거 유세[* [[제1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백기완]] 후보의 선거 유세에서 '[[타는 목마름으로]]' 등을 불렀다.]에서 단골 가수로 불러다니게 되었다. 그러나 민중가수로서의 활동은 노찾사의 두 번째 공연으로 마무리했다. 한편, 김광석과 신촌 등지에서 함께 어울려 다니는 6명의 친구들이 있었는데, 그 친구들과 함께 그때까지 만들어놓았던 노래를 녹음해보자는 친구 유준열의 제안으로 카세트테이프 음반을 만들어 친구들끼리 기념품 삼아서 나누어 가졌다. 그런데 어느 날, 어떤 사람이 그 테이프를 듣고 김광석을 포함한 7명을 불러 '''진짜 음반을 내자'''고 했다. 그는 다름아닌 [[산울림]]의 리더인 [[김창완]]. '김창완과 꾸러기'에서 같이 활동하던 멤버를 통해서 알게 된 것이었다. 음반은 제작에 들어갔고, 테이프에 있던 30개의 곡 중 11개가 추려져 마침내 '[[동물원(음반)|동물원]]'이라는 음반이 발매되었다. 친구들과 재미로 녹음하던 음악이 세상으로 나온 것이다. '이대생만 공략해도 괜찮겠다', '이런 음반을 사는 사람은 이상한 사람일 것이다'라는 반응을 보이며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음반이었지만, 예상과는 달리 '''매우 잘 팔렸다.''' 그리고 동물원의 성공은 김광석이 노찾사에서 나와 보다 대중적인 공간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주는 발판이 되었다. 이후 김광석은 음악에 대한 생각 차이로[* 친구들은 아마추어이길 원했으나, 김광석은 이미 음악을 직업으로 하기로 마음 먹은 상태였다.], [[동물원 두 번째 노래모음|동물원 2집]]까지만 활동하고 친구들의 도움을 받기도 하며 [[김광석 1]]을 발매하게 된다. === 솔로 활동 (1989 - 1996) === > "'''나의 노래는, 나의 힘''' > '''나의 노래는, 나의 삶"''' >---- > - 김광석, 「[[나의 노래]]」중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김광석_89년.png|width=100%]]}}}|| || {{{#ffffff '''음악 프로그램 '쇼특급'에 출연한 김광석 (1988년 12월 4일)'''}}}[* 이때 부른 노래는 [[거리에서#s-2|'거리에서']] 였다.] || 1989년 동물원을 나온 김광석은 '[[기다려줘]]', '[[너에게(김광석)|너에게]]'를 담은 솔로 [[김광석 1|1집]]을 내놓으며, 계몽문화센터에서 첫 개인 콘서트를 시작했다. 음악 활동을 하던 중 1년의 열애 끝에 90년에 서해순과 결혼하게 된다. 1991년에 발표한 [[김광석 2Nd|2집]]은 [[한동준]]이 제공한 '[[사랑했지만]]'과 [[김형석]]의 '[[사랑이라는 이유로]]', 김창기의 '[[그날들]]' 등이 사랑을 받으면서 김광석을 더욱 대중적인 위치로 올려놓았다. 1991년 10월 14일부터 1995년까지는 [[불교방송]]에서 송출된 라디오 프로그램인 '밤의 창가에서'의 [[DJ]]로도 활동하기도 했다. 1992년 김광석은 '[[나의 노래]]'와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등이 담긴 [[김광석 3번째 노래모음|3집]]을 발매하면서 [[민중가요|민중가수]] 출신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히 했다. 민중가수로의 입지가 다시 재조명받은 것이 3집 이후이다. 1993년 7월, 김광석은 자신의 노래 생활 10년을 결산하는 취지에서 대학로 [[학전]] 소극장에서 한 달간의 장기 공연을 열고 '[[다시 부르기 1]]'을 발표했다. '거리에서'와 '[[광야에서]]' 등이 수록된 다시 부르기 1집은 대중음악계를 강타한 '[[리메이크]]' 선풍의 도화선이 되었다. 1994년 '[[일어나]]' 등 그를 대표하는 여러 곡이 실린 [[김광석 네번째|4집]]의 성공으로, 김광석은 한국의 소시민을 대표하는 가수로 확고한 위치를 잡는다. 1995년에는 김민기, 김의철, 이정선, 백창우, [[김목경(기타리스트)|김목경]], 양병집[* 김민기, 한대수와 함께 70년대의 대표 저항 포크가수로 유명했던 가수이다. 2021년 12월 24일 자택에서 별세하였다.] 등 1970년대 포크 1세대로부터 이어져 오는 한국 [[포크송#s-3|포크 음악]]의 계보를 하나의 앨범으로 정리한 '[[다시 부르기 2]]'를 발표하면서 전국 8개 도시를 순회하는 'Green Tree Story' 투어 콘서트를 열었다. '다시 부르기 2'는 그가 90년대 한국 모던 포크의 진정한 계승자로서 자리매김하게 해준 명반이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김광석_1000회공연.jpg|width=100%]]}}}|| || {{{#ffffff '''1000회 기념 공연 포스터'''[* 오랜 친구이자 [[학전]] 동료인 [[이창우(그래픽디자이너)|이창우]]가 만든 포스터]}}} || 워낙 많은 공연을 했던지라 '또 공연을 하느냐'는 의미로 '또 해'라는 별명이 생겨났을 정도로 매해마다 음반 발표와 소극장 라이브 공연을 병행하며, 관객과의 직접적인 교감에 전력을 쏟은 김광석은 1995년 [[8월 11일]] 마침내 대학로 [[학전]] 소극장에서 '''1000회 기념 공연'''[* 실제로 그의 공연 기록을 보면, 최소 1달에 한 번 이상은 하였고, '''1달 내내''' 하기도 하였다.]이라는 금자탑을 이뤘고 기념으로 2개월 간 전국 투어를 돌았다. 20대 여성층은 물론 30대 남성 직장인, 60대 노부부들까지 몰려드는 김광석의 공연은 대학로를 중심으로 한 소극장 공연 문화를 정착시키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11월 18일에는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11월 23일부터 11월 24일까지는 [[뉴욕]] [[맨해튼]] 머킨 콘서트홀에서 공연을 했다. 그리고 이것이 그의 마지막 공연이 되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qjQlD6KmDfI)]}}}|| || {{{#ffffff '''박상원의 '겨울나기'에 출연한 김광석'''}}} || 1996년 1월 5일 [[박상원(배우)|박상원]]이 진행하던 [[현대방송|HBS]] '겨울나기'에 출연을 하였는데 여기에서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그녀가 처음 울던 날' 을 부른 것이 마지막 모습이 되었다. 이 노래를 부른 후, 그의 마지막 7시간 30분[* 1996년 1월 5일 오후 8시 ~ 1996년 1월 6일 오전 3시 30분]은 사망 문서에서 후술한다. === [[김광석 사망 사건|사망]]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김광석 사망 사건)]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김광석 사망 사건/의문사 음모론)] ||<-2>{{{#!wiki style="margin: -20px -10px -17px" ||||<#ffffff,#191919>{{{#!wiki style="margin:13px 5px 14px" 정말 힘들다. 바쁘고 열심히 사는 것이 돈을 버는 것에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 날짜 미상 }}} || }}}|| ||<-2>{{{#!wiki style="margin: -20px -10px -17px" ||||<#ffffff,#191919>{{{#!wiki style="margin:13px 5px 14px" 공연이 중반을 넘어섰고, 다들 축하해주고 열심이었다고, 특종이라고 악의 없는 칭찬들이다. 나의 마음속에 일고 있는 허전함의 본질은 무엇인가. 나를 치열하게 해준 것은 무엇이었나. 후회도, 보람도 아닌 그저 살아 있음에 움직인 그 움직임이 불쌍한가. 무료하다. 즐겁지 않은 이유를 모른 채, 나는 즐겁지 않다. 또 이러다 가라앉는 것인가. 무섭구나. 몇 년 전 내 틀을 넘어선 내 외로움을 부정하지 않았는가. 나는 늘 도망가고 싶어 하는, 어쩔 수 없는 쫓기는 자로 태어났는가. 무엇인가? 날 이토록 흔들고 있는 것은. 내 심연의 욕심의 근원을 모르는 것인가. 무얼 위해 보고 먹고 느낀 건가. 쓸데없는 짓을 한 건 아닌 것 같은데 대체 내 허무의 기저에서 끊임없이 날 잡아내리는 것은 누구인가. ---- 1995년 8월 }}} || }}}|| ||<-2>{{{#!wiki style="margin: -20px -10px -17px" ||||<#ffffff,#191919>{{{#!wiki style="margin:13px 5px 14px" 끊임없이 생각하는 사람의 끝은 끝없는 관념 속의 바다, 그 심연을 오르지 못하고 헤매는 것이다. ---- 1995년 11월 29일 }}} || }}}|| ||<-2>{{{#!wiki style="margin: -20px -10px -17px" ||||<#ffffff,#191919>{{{#!wiki style="margin:13px 5px 14px" '''"부모님 놔두고, 친구들 다 놔두고, 그냥 실수예요. 그냥 술먹고 장난하다가 그렇게 된 거예요."'''[* 20년 후 [[손석희]]와의 인터뷰에서 [[셰익스피어|'연극하듯이 장난처럼 갔다']]는 비유적 표현이 와전된 것 같다고 해명했고, 이에 대해 손석희가 의문을 제기하자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을 바꿨다.] ---- 김광석의 아내 서해순, 1996년 1월 6일 [[이상호(기자)|이상호]]와의 인터뷰 中 }}} || }}}|| ||<-2>{{{#!wiki style="margin: -20px -10px -17px" ||||<#ffffff,#191919>{{{#!wiki style="margin:13px 5px 14px" 아빠 서우가 벌써 4학년이 됐어요 키도 많이 크고 엄마말도 잘 들어요 아빠 생각 많이나요 그리고 사람들이 아빠노래 좋아하면 저두 너무 기뻐요 아빠가 자랑스러워요. 보고싶어요 아빠 ---- 김광석의 딸 김서우 (1991 ~ 2007) }}} || }}}|| [[1996년]] [[1월 6일]], 일과를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온 김광석은 그곳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사망 전 날까지도 이후의 일정들을 계획해두고 있었고, 갑자기 사망한 것에 대해 많은 추측이 돌아다녔다. 이는 [[이상호(기자)|이상호]] 기자가 [[김광석(다큐멘터리)|동명의 영화]]를 만들며 사망 관련 음모론의 확산으로 이어지게 된다. == 음악성 == === 가창력 === 김광석에 관하여 설명할 때, 흔히 '진정성이 있는', '마음을 울리는', '우리들의 감정을 건드려주는 목소리' 등등의 말들. '전위적인 실험정신을 지닌', '뛰어난 기교를 지닌' 등의 표현을 사용하곤 한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들은 김광석을 수식하지는 않는다. 그러지 않을뿐더러, 그렇게 표현할 수도 없다. 그가 생전에 부르고 만들었던 노래와 앨범에서 그러한 요소들을 찾아내기란 솔직히 어렵다. 기교라는 측면에서건 아니면 전위성이라는 측면에서건, 김광석보다 훌륭한 대중음악가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이 차라리 빠를 것이다. 다만 김광석이라는 가수가, 혹은 그가 남기고 간 노래가 청자들에게 어떻게 소비되고 있는지 짧게 소개하는 것으로 본 항목의 서론을 대신하고자 한다. 김광석의 음악이 아직도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이유는 그의 [[목소리]], 더 정확히 말하면 음색과 거기에 실린 짙은 감정 때문이다. 특히 김광석의 비브라토는 비브라토라고 부르기에도 애매하다. 기교를 위해서 목소리를 떠는 것이 아니라 마치 '''울음을 참듯이 목소리가 떨리기 때문'''이다.[* 김광석 특유의 비브라토이 나오는 이유는 첫 번째. 김광석이 사람이 울음을 참을 때처럼 목을 잡고 노래를 부른다는 점과 두 번째. 울음을 참다가 터뜨릴 때 목을 잡은 상태에서 힘을 줘서 소리를 내듯이 비브라토을 해서 그렇다.] 김광석의 그 창법은 따라한다고 마음대로 되는 것도 아니라서 완벽한 모창은 불가능하다는 게 정론[* 타고나지 않은 일반인은 김광석처럼 발성하기에도 무리가 있다. 거기다가 완벽한 모창이면 김광석이 노래를 부를 때 느껴지는 필링과 연륜까지 모창해야 하기 때문에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히든싱어 김광석 편에서 예상과 다르게 4라운드를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틀렸지만, 가수가 직접 부르는 게 아닌 음원 특성상 음원에 맞춰 연습을 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그리고 해당 방송에서도 "[[서른 즈음에|~계절은~]]" 부분이 결정타가 되어 최종 우승을 김광석이 했다.][* 오히려 국내 가수들에게서는 김광석의 이런 비브라토을 찾아볼 수 없고, 현재 전 세계의 트랜드를 선도하는 [[빌리 아일리시]]의 보컬에서 김광석의 그것과 흡사한 비브라토을 찾아볼 수 있다. 둘 다 목을 잡고 울먹이는 느낌의 비브라토인데, 놀라울 만큼 흡사하다.]이다. '서른 즈음에'도 그렇고 영화 [[클래식(영화)|클래식]] OST에 사용되면서 영화에 너무나도 잘 매치되는 꽤나 주목받기도 한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같은 노래들을 김광석보다 잘 부를 수 있는 가수는 없을 것이다. 김광석은 노래할 때 또박또박하게 발음한다. "[[광야에서]]"의 가사 중, '흙이여'는 흔히 [흐기여]로 잘못 발음되는데, 김광석은 [흘기여]로 아주 정확히 발음한다. 라이브를 할 때에도 놀랄 만큼 또박또박 발음을 한다. 다만 처음 이 곡을 부른 [[안치환]] 또한 '흙이여'를 [흘기여]라고 발음하므로 이 점 또한 감안해야 할 것이다. [[https://youtu.be/pYKzJlXvuME|#]] 하지만 테크닉이 뛰어난 가수는 아니었다. 그의 라이브 음원이나 영상을 들어보면 '사랑했지만'을 부를 때는 후렴구에서 발음이 살짝 뭉개지는 걸 확인할 수 있는데 감정을 많이 실어서 부르는 것에 초점을 둔 것인지, 단순히 발음 뿐만 아니라 음정을 내뱉은 입술의 모양도 불안정해진다. 입을 크게 벌리지 않고 노래를 부르는 것은 좋지 못한 습관 중 하나이다. 실제로도 김광석의 다른 공연 영상들을 보면, 일부러 입술을 작게 한다거나 이를 앙다물고 노래를 부르는 등 발성적으로 좋지 않은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고음낼 때 후두가 너무 올라가서 짜내듯이 소리가 나오는 인골라, 작게 벌리는 입,[* 이게 뭔 대수인가 하겠지만... 발성에서 소리를 가장 많이 울려주는 주 공명기관이 입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굉장히 안 좋은 습관이다.] 목을 잡는 소리[* 목을 잡는 소리는 우는 듯한 느낌을 주기 때문에 표현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김광석은 '[[나의 노래]]'란 곡을 들으면 밝은 노래에서도 목을 잡고 노래를 부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목을 잡으면 노래에 힘을 싣기도 더 어려워져서 밝은 노래 부를 때는 오히려 방해된다. 즉 김광석을 노래를 부를 때 발성적으로 안 좋아서 목을 잡으면서 부른다는 소리. 게다가 목을 잡는 것은 목에 무리도 많이 가는 습관 중 하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광석은 1000회 공연을 무리 없이 해내고, 저음부터 고음까지 소리를 안정적으로 사용했다는 점에서 정말 대단하다고 볼 수 있다.] 등이 대표적이다. 즉, 좋지 못한 발성으로 노래를 하다보니 테크닉적으로도 떨어지는 것. 발성과 테크닉이 떨어지는 이유는 일단, 김광석이 프로로 데뷔하기 이전에 오늘날의 전문적인 보컬 트레이닝은 커녕, 과거의 미8군 무대와 같은 트레이닝도 받은 적이 전무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또한 박자감각도 떨어지는 편이라 그의 라이브 공연을 보면 발로 박자를 맞춰가며 노래를 부르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럼에도 중간중간 박자를 자주 틀린다. 하지만 테크닉으로 점철된 교과서적인 기준으로 그의 가창력을 논하는 것은 섣부른 짓이다. 비유컨대, 프로바둑선수에게 왜 정석대로 수를 두지 않느냐고 하는 꼴이다. 그의 목소리에는 자신만의 느낌과 감성과 연륜[* 대단한 것은 고작 서른초반의 젊은 나이인데도 특유의 감성과 연륜이 느껴진다는 것이다.]이 있고, 그 목소리로 '''자신이 부른 곡에서는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감성의 영역을 보여준다.''' 가창력이란 결국 노래를 표현하는 능력, 그런 관점에서 보면 김광석은 자신의 곡에 한정해서는 최고의 가창력을 지닌 가수이기에 엄청난 가창력의 소유자라할 수 있으며, 가수가 표현의 예술을 하는 사람이라는 점을 본다면, 그가 노래를 부르며 감정을 표현하는 점에 있어서는 가히 '''표현력의 교과서'''라고 할 만하다. 게다가 김광석은 생전에 저런 창법으로 10년 넘게 녹음과 공연을 수없이 해왔음에도 라이브에서 기복이 거의 없었다. 김광석은 심지어 '''1000회 라이브 기록'''을 세워 뉴스에도 나올 정도로 가수 기준으로도 라이브 활동을 많이 갖는 가수였으며, 그럼에도 당대에 라이브를 잘하는 가수로 통해 대학 축제 등 여러 무대에서 사랑받던 사람이다.[* 당시 라이브 자료는 지금도 유튜브에 업로드가 되어 있기 때문에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도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같은 곡에선 '''3옥타브 레'''의 고음을 라이브에서도 원키로 안정적으로 소화했다. 즉 이것은 교과서적이지 못하단 소리를 들어도 본인에겐 노래하는데 있어 전혀 무리가 가지 않는 창법이었단 이야기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두고 김광석의 발성이 좋지 못하다고 비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오히려 김광석 입장에선 큰 무리도 가지 않고 노래 표현에도 알맞은 좋은 창법인 것이다.[* 록의 전설 [[로니 제임스 디오]]의 경우에도 발성학 코치들이 그의 발성법을 칭찬하면서도 성대를 마구 긁는 창법에 대해 목에 무리가 가는 창법이라 지적한다. 그런데 디오는 그 창법으로 '''60대 후반까지''' 멀쩡히 라이브를 했으며, 40대까지는 라이브에서 기복도 거의 없었다. 김광석이든 디오든 창법 자체는 일반적으로 봤을때 정석에 벗어났으며 목이 상할 수도 있는 방법은 맞지만, 정작 그 창법으로 부른 본인들이 멀쩡하다면 이것은 단점이라고 볼 수 없다.] 애초에 대중음악은 성악이 아니기 때문에 모든 성공한 가수들이 클래식에서 말하는 정석과는 조금 다른 독자적인 창법을 쓰며, 사람의 성대 역시 저마다 다르기 때문에 김광석이 저런 창법을 안정적으로 사용했던 것도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다. 위에서 말하고 있는 지점들을 종합적으로 따져보면, 김광석과 같은 가수가 다시 나오기 힘든 이유도 명확해진다. 흔히 김광석을 가리켜 '우리에게 독특하면서도 큰 울림을 준 음악가'라고 말하는데, 이때 주목할 부분은 '독특함'이다. 그 독특함은 그가 누구나 보편적으로 쓰는 효율 좋은 발성법에 집착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요즘에는 실용음악의 발달로 수많은 가수 지망생들이 안정적인 발성을 배우고 데뷔를 준비하지만, 그때의 김광석은 뛰어난 발성보단 자신의 섬세한 감수성과 표현력을 갈고 닦는 데 더 집중했던 것이다. 여기서 분명한 사실은, 오늘날에는 보기 어려운 김광석의 독특한 개성에서 우러나오는 노래들이 그가 세상을 떠난 지 30여 년이 다 되어가는 현재에도 우리의 마음을 읽는다는 점이다. 김광석과 같은 가수가 다시 나오기 어렵기 때문에, 더더욱 김광석을 그리워한다고 할 수 있다. === 편곡 ===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ITbDoW7xGMg)]}}} || || '''[[송창식|{{{#fff 송창식}}}]]의 [[고래사냥(가요)|{{{#fff 고래사냥}}}]]을 부르는 김광석 (1994.08.18)'''[* 댓글을 보면 김광석의 편곡 실력 및 가창력에 감탄하는 내용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IxX56cRcrgQ,start=1800)]}}} || || '''[[김민기(가수)|{{{#fff 김민기}}}]]의 [[상록수(가요)|{{{#fff 상록수}}}]]를 부르는 김광석 (1994.04.22)''' || 그의 대표곡으로 알려진 [[거리에서]], [[먼지가 되어]],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 [[이등병의 편지]],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등은 사실 '''그가 편곡하고 리메이크한 커버곡이다.'''[* 이 이외에도 [[타는 목마름으로]] 등을 편곡하였고, 장기적으로는 [[시인과 촌장]]의 [[사랑일기]]를 편곡해 음반에 실을 예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노래들을 모두 김광석이 작사, 작곡한 곡으로 아는 사람들이 훨씬 많은데, 김광석의 뛰어난 편곡 실력을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 성실성 === 김광석은 엄청난 '''노력가'''였고 성실한 인물이었다. 김광석이 만들거나 참여한 초기 앨범들과[* '''김광석 [[김광석 1|1집]], [[김광석 2Nd|2집]]''' 혹은 노래만 몇곡 부른 정도긴 하지만 동물원 [[동물원 1집|1집]], [[동물원 두 번째 노래모음|2집]].] 중기 앨범[* [[김광석 세번째 노래모음|김광석 3집]]], [[다시 부르기 1]]~후기 앨범[* [[김광석 네번째|김광석 4집]], [[다시 부르기 2]]]들을 비교해서 들어보자. 초기 앨범들이 그 뒤의 앨범들과 비교해 보았을 때 완성도라는 측면에서 뒤떨어진다는 것을 부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물론 초기 앨범 속에서도 몇곡의 노래들은 그 나름대로 빛나는 좋은 음악들이지만,[* 2집의 [[사랑했지만]], [[그날들]], [[사랑이라는 이유로]]나 1집의 [[기다려줘]] 등이 대중들로부터 사랑받은 초기 대표곡들일 것이다.] 그럼에도 적지 않은 곡들이 그 음악적인 면에서나 가창력 즉 노래적인 측면에서나 훌륭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곡들이다. 작곡적인 측면에 있어도, 1집의 수록곡 중에서 김광석 본인이 작곡한 곡은 5곡이지만 그중에서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말할 수 있는 곡은 사실상 없다. 그러나 그가 사망하기 전, 마지막으로 발매한 4집 앨범 중에서 김광석이 작곡한 곡 4곡 중에서 [[일어나]], [[바람이 불어오는 곳]], 그리고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은 음악에 크게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라도 한 번 쯤은 들어봤을 정도로 높은 인지도를 점하고 있으며, 곡의 질 또한 월등하게 높은 편이다. 게다가 김광석은 사망 전에 제작하고 있었던 5집 앨범에서도 자작곡을 다수 수록할 예정이었다. 즉, 작곡적인 측면을 봐도 크게 발전한 것이다. 실제로도 많은 평론가들이 그의 4집 앨범이나 2장의 다시부르기 앨범 중에서도 특히 2집을 높게 평가하고 있다. 그리고 3집이나 특히 다시부르기 1집은 일종의 과도기적 앨범, 달리 말하면 김광석이 자신의 음악적 색깔을 찾고 정립해나가는 과정에 있는 앨범으로 평한다. 이것이 무슨말인가 하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김광석을 높게 평가하는 대부분의 이유는 그의 후기 앨범들(4집과 다시부르기 2집)이 이룬 성과에 기반해있다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상대적으로 뒤늦은 음악적 성취가[*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그는 84년도에 음악 커리어를 본격적으로 시작했으며 그의 4집은 94년에, 다시부르기 2집은 95년에 발매되었다.] 그의 성실성이나 노력이 아니면 대체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대체 그가 성실하고 노력가였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는 반문이 있을 것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그는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무려 소극장 공연을 1000회나 했다. 그가 처음 대학로에서 소극장 공연을 한 날은 91년 7월 1일이었고 1000회를 달성한 년도는 95년 8월 11일인데 91년 ~ 95년 기준으로 계산해보면 '''대략 2일에 한 번 꼴로''' 공연을 한 것이다. 그리고 그의 솔로 앨범 발매 년도를 살펴보면 1집(89년) - 2집(91년) - 3집(92년) - 다시부르기 1집(93년) - 4집(94년) - 다시부르기 2집(95)년 순이다. 1집에서 2집의 2년 공백을 제외하면 전부 1년 마다 앨범 작업을 한 셈이며 새 앨범들은 전의 앨범들 보다 음악적으로도 성장한 면모를 보였다. 이러한 점들로 판단컨대, 그의 음악적 성취라는 것은 그의 재능이라기 보다는 그의 피나는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보는 것이 보다 타당하다. === 음악 활동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 === > Q. 가수 김광석이 유명한 이유가 뭔가요? > A. 이 사람 노래가 내 마음을 읽습니다 >---- > - [[네이버 지식iN]]에 올라온 질문과 답변. 이후 성지가 되었다.[[https://kin.naver.com/qna/detail.nhn?d1id=3&dirId=302140101&docId=158819556|#]] 국내의 [[장덕]], [[김현식]], [[유재하]], [[신해철]]과 함께 '조금만 더 오래 살아서 노래해줬다면'이라는 아쉬움을 남기는 '비운의 천재'로 평가받는 가수 중 하나이다. 그의 예술적 재능이 우선된 이야기지만, 인품마저 겸비했으니 '조금만 더 오래 살아서', 그를 본받는 가수들이 계속 나왔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크다. 그만큼 존경받을 만한 가수이고 인물이었다. 그는 '1990년대의 마지막 정통 포크 가수'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실제로 그의 죽음 이후로 포크 음악은 메이저로 치고 올라오고 있지 못한 실정이다. 2010년대에 들어서 [[장범준]]이 그 뒤를 잇고 있고 대중적인 지지를 얻고 있음은 다행한 일이다. 물론 그의 음악적 성과를 단지 포크라는 장르 하나만으로 국한시킬 수만은 없다. 그는 늘 소극장 무대를 고집하며 관객들과 함께 호흡하길 원했고 결국엔 1,000회라는 기록적인 공연 횟수를 달성했다. 또한 소박한 포크 음악에 애착이 깊었다. 김광석의 바이오그래피는 주류에서 밀려난 모던 포크를 살려내기 위한 혼신이 담긴 노력의 연속이었다. 끝까지 라이브와 콘서트를 고집했으며, 이런 모습은 아직까지 많은 후배 가수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가수 [[이적(가수)|이적]]은 "콘서트장에서 기타를 연주하며 열창하는 그의 모습은 나에겐 가수의 원형처럼 남아 있다"라고 회고하기도 했으며 또한 그의 음색과 그의 전반적인 음악색은 삶에 지친 사람들의 감정을 정확히 짚어내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80년대 후반 [[민중가요|민중가수]]로 김광석을 기억하던 사람들은 김광석의 음반을 혹평하기도 했다. 민주화를 이뤄내고 그 직후 [[노태우]] 정권 하에서 민주화에 대한 열기가 뜨겁기 그지없던 시절, 김광석이 처음 내놓은 음반은 발라드, 댄스 가수 등이 내놓은 음악과는 색채가 전혀 다르긴 하였으나, 사랑 노래 위주였다. 원래는 사랑 노래 일색은 아니었는데, 1집 앨범에서 유명해진 노래들이 대부분 사랑 노래[* '[[너에게(김광석)|너에게]]', '[[기다려줘]]' 등]라서 이런 이미지가 생겼다. 대부분 이 때문에 '변절자', '대중성만 추구한다'는 평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90년대에 들어 민주화 운동 시기의 음악을 리메이크해 음반에 수록했으며[* 대표적으로 [[다시 부르기 1]]의 '그루터기', '[[광야에서]]', 그리고 대학가요제에 초청가수로 나와서 편곡해 부른 '[[타는 목마름으로]]'가 있었으며, 본인의 노트에도 통일을 염원하는 노래를 만들려던 흔적이 남아 있다.], 3, 4집에서는 리메이크를 넘어선 자작 명곡들을 본격적으로 쏟아내며 자신의 음악 세계를 확고히 해나간다. 당시 김광석의 곡은 주제의 분화 또한 다양하게 일어나고 있었기에, 김광석이 이 시기에 비운의 가수로 세상을 떠나간 것 또한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 김광석의 모든 노래는 기타 하나로 연주할 수 있는 포크송이라 세월이나 세대를 타지 않는다. 말 그대로 10대부터 80대 노인까지 동감하고 같은 감동을 느낄 수 있는 경우가 대부분으로 김광석 노래의 힘은 그의 이름을 계속 기억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 김광석이 떠난 뒤, 김광석 다시 보기 == === 도서 === 사진작가 임종진은 김광석 팬으로 유명한데, 2008년에 그가 소장하고 있던 미공개 사진과 작가 자신의 자전적 수기, 작가 주변 인물들의 김광석과 관련된 이야기를 포함한 <김광석, 그가 그리운 오후에>를 출간한다. 2017년 기준으론 절판된 상태이다.[[http://www.yes24.com/24/goods/2830057?scode=029|#]] 2013년 말에 김광석이 생전에 남긴 메모, 편지, 문서[* 일기장에 적은 글, 콘서트에서 했던 어록, 나우누리 '둥근소리' 페이지에 올린 글들이 포함되었다.] 등을 모아 만든 에세이 <미처 다 하지 못한>이 출간되었다. 책 뒷면에 김광석이 남긴 작곡 노트가 있는데, 원본의 느낌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미완성된 가사들[* '슈퍼 마리오 주제가', '마음의 이야기'와 같은 생전에 부른 음원이 남아 있다.]을 그대로 실었다. 이로 인해 페이지의 절반 넘는 부분이 미완성된 채 비어 있는데, 보고 있으면 '''만약 김광석이 살아 있었으면 이 페이지가 다 차서 노래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든다는 평이 많다. 이 외에도 <김광석 악보집>과 노래 가사 모음집 <김광석 부치지 않은 편지>, <김광석 앤솔로지>등이 있다. === 뮤지컬 === 2013년 김광석 탄생 50주년을 맞아 무려 3개의 김광석 쥬크박스 [[뮤지컬]]이 초연되었다. 일정한 주제를 가지고 이미 발표된 곡들을 묶어서 뮤지컬을 만드는 형식으로 흔히 한 가수가 발표한 노래를 묶어서 뮤지컬을 만드는 경우가 많다. 최초의 작품이자 가장 유명한 '[[Mamma Mia]]'([[ABBA]]]) 외에도 '[[All Shook Up]],'([[엘비스 프레슬리]]), '[[We Will Rock You]]'([[퀸(밴드)|퀸]]), '락 오브 에이지즈'(70년대 록 음악) 등이 있다. 2016년에 김광석 20주기 기념으로 뮤지컬 '바람이 불어오는 곳'과 '그 여름, 동물원'이 시작한다. 2016년은 김광석 20주기가 되는 해이다. ==== [[그날들(뮤지컬)|그날들]] ==== 2013.4.4 대학로 뮤지컬센터 대극장 초연을 시작으로 2016년 충무 아트센터 대극장에서 세번째 공연이 올라갔다. [[김종욱 찾기]], 오! 당신이 잠든 사이, 형제는 용감했다 등으로 유명한 장유정 연출가의 [[주크박스 뮤지컬]]. 장유정 연출이 최초로 발표하는 대극장 작품이기도 하다. 장유정 연출이 극본을 썼고 [[나는 가수다]] 출연으로 유명한 장소영 음악감독이 참여했다. [[유준상]], [[지창욱]], [[오종혁]], [[오만석]], [[민우혁]], [[강태을]], [[양요섭]] 등이 출연했다.([[http://tvdaily.mk.co.kr/read.php3?aid=1365675754496010002|#]]) 김광석의 곡들을 완전히 뮤지컬 작법으로 편곡하고 일부는 매쉬업했다. 이런 탓에 혹자는 김광석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거의 없다고 비판 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혼자 남은 밤'은 김광석 본인은 방에 앉아서 기타치면서 부르던 편한 노래지만 그녀가 이 노래를 부르는 상황은 부모님께 '보내주긴 한다는데 슬슬 불안하다'라는 편지를 보내며 부르는 노래다. 하지만 뮤지션의 감성에 구애받지 않고 독자적인 감성을 구축한 것이 단점이자 장점으로 꼽히기도 한다. 연출가 장유정은 이런 비판에 대해 그의 음악 특유의 정서는 극을 관통하는 '그리움'이라는 정서로 표현하려고 노력했다고 인터뷰 하기도 했다. 장유정 연출답지 않게 스토리라인이 다소 빈약하다는 평을 받았다. 그래도 '바람이 불어오는 곳'이나 '디셈버'보다는 훨씬 평이 좋은 편이다. '그날들'은 청와대 경호실을 배경으로 과거와 현재 넘나드는 구성을 취한다. 한중수교의 비밀을 덮으려는 정부와 그 사건에 휘말린 두 남녀의 실종사건이 발생하는 과거와 영애양이라는 지위의 무게에 환멸을 느끼는 영애양과 경호인 대식의 실종사건이 발생하는 현재가 대응을 이뤄 이야기가 전개된다. 작품집 '오 당신이 잠든 사이'에 따르면, 장유정 연출은 이 작품 이전에 김광석의 음악으로 쥬크박스 뮤지컬을 준비한 적이 있다고 한다. 여러 번 재공연되고 있는 형제는 용감했다가 바로 그 작품. 다만 공연 준비 단계에서 새 노래들을 작곡해서 넣는 것으로 수정되었다. ==== 바람이 불어오는 곳 ==== 2012년 11월 30일 대구 떼아뜨르 분도 극장에서의 초연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공연을 이어오고 있는, 김광석 추모 뮤지컬의 대표주자다. (사실, 2008년 5월 15일 홍대 상상마당에서 한 회의 공연을 한 적이 있다. 그 당시는 뮤지컬이 아니었음) 대구 초연 이후에 바로 서울로 올라와서 `어쿠스틱 뮤지컬`이라는 장르를 개척하며 공연을 이어가고 있다. (2013.3.15 ~ 5.19 대학로 아트센터 K 네모극장 이후, 현재 2017.11.10~2018.1.21 예그린 시어터까지) 참고로, LP STORY 기획사(대표: 이금구)에서 제작한 공연이 바람이 불어오는 곳의 오리지널리티를 가진다. 소극장 뮤지컬로 김광석의 유족들과 팬클럽이 후원하는 작품. 최근 유행인 콘서트 형식의 뮤지컬이다. 박창근 최승렬 박정권 등이 출연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3&aid=0004994060|#]] 정통성을 따지자면 가장 앞선다. 특히 라이브 무대를 중심으로 김광석 노래들의 감성을 충실하게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는 평을 받았다. 주인공 이풍세 역의 최승열은 히든싱어 김광석 편에서 준우승을 차지한 바 있다. 우승은 김광석... 의외로 표차는 크지 않았는데 김광석 45표 최승열 35표. 박창근은 내일은 국민가수에 출연하여 우승을 차지했다. ==== 디셈버: 끝나지 않은 노래 ==== [[장진(영화 감독)|장진]]이 연출을 맡은 작품. 2013년 12월 19일부터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공연했다. 김광석을 주제로 한 뮤지컬 중 가장 규모가 큰 작품으로, [[박건형]], [[김준수(JYJ)|김준수]] 등이 출연했다.[[http://news1.kr/articles/1429833|#]] 하지만 작품성으로는 가장 혹평을 받았다. 장진 특유의 연극적인 정서가 뮤지컬에는 맞지 않는다는 의견이 대다수였으며 여주인공 이름은 또 화이. 유화이라는 이름은 장진이 제일 많이 써먹던 여주인공 이름이다. 무엇보다 '''스토리라인이 조잡했다.''' 인생의 굽이굽이마다 만나는 가수라는 평이 있을 정도로 김광석의 노래들은 삶의 진정성을 노래하는 것들인데, 이런 노래들을 싣고 흘러가기에는 줄거리가 지나치게 빈약했다. '''그럼에도 또 김광석의 이름값에는 지나치게 의존했다.''' 공연 초기에는 2막 시작과 함께 김광석이 홀로그램으로 관객들 앞에서 노래하는 씬이 있었을 정도다. 이 씬은 프리뷰 1회 공연 후 지나치게 작위적이라는 평을 받아 삭제되었다. 하지만 [[평가와는 별개로 흥행한 작품|형편없는 평가와는 별개로 흥행은 성공한 작품]]으로, 특히 김광석의 생전 모습을 직접 보아 왔던 중년층 관객들이 많았다. 제작을 맡은 NEW 대표 김우택이 영화 [[7번방의 선물]]과 뮤지컬 디셈버의 흥행 수익이 엄청났다고 회고했을 정도였다. ==== 기타 ==== * 그 여름, 동물원 * 우리들의 사랑 * 다시, 동물원 === [[김광석다시그리기길|추모 공간]]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김광석다시그리기길)] == 음반 목록 == [include(틀:김광석)]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김광석_앨범모음.png|width=100%]]}}}|| || {{{#ffffff '''김광석의 음반 (1989 - 1995)'''}}} || 김광석이 살아 생전에 발표한 음반들이다. 정규 앨범을 따졌을 경우 4장이며, 리메이크 앨범인 다시부르기 1,2집을 포함하면 총 6장이다. 이 중에서 1995년 발매된 다시부르기2는 신문 형태로 앨범 커버가 제작되었다. === 기타 === * [[먼지가 되어]][[http://www.youtube.com/watch?v=AfsDlfP0fsM|#]] * [[부치지 않은 편지]]#1[[http://www.youtube.com/watch?v=gnRdXgeMiQA|#]] * [[부치지 않은 편지]]#2[[http://www.youtube.com/watch?feature=player_embedded&v=3z1ebldYtkE|#]] * [[타는 목마름으로]] * 이젠 떠나가세요 동물원 5-2집에 실린 노래이다. 이미 동물원을 탈퇴한 김광석이 동물원의 정규 앨범에 김창기가 만든 노래인 이 노래를 녹음해 실었다는 건 그 만큼 김광석과 동물원 멤버들의 우정이 각별했다는 걸 보여주는 반증이다. * [[내가 필요한거야]] * [[마리오 시리즈|슈퍼 마리오]] 비디오판 오프닝[[https://www.youtube.com/watch?v=DPeRTolYixw|#]] 김광석이 부른 곡 중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곡으로[* 정확하게 말하면 노래는 알아도 김광석이 불렀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많다.] 김광석이 생전에 작사와 작곡을 모두 본인이 직접한 정말 몇 안되는 노래이기도 하다. 미국에서 방영되었던 '[[Super Mario Bros. Super Show!]]'의 한국어 비디오판의 오프닝이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그 속편인 [[The Adventures of Super Mario Bros. 3]]과 월드의 오프닝이다.([[http://pub.chosun.com/client/news/viw.asp?cate=C05&mcate=M1005&nNewsNumb=20160620566&nidx=20567|관련 기사]]) * 배트를 들라 한국프로야구 공식앨범 '꿈의 구장' 수록곡. 'Collection : My Way' CD3에 'Little Hero'라는 이름으로 다시 실렸다. 위의 마리오 오프닝처럼 김광석이 작사ㆍ작곡한 곡 중 하나이다. === 사후 출시된 앨범 === 김광석이 직접 낸 게 아니라 세상를 떠난 후 추모앨범, 다시부르기1,2, 김광석 베스트, 김광석 나의 노래 BOX 등의 앨범이다. 김광석의 사후 앨범 확인 정보는 비트(BEAT),[* [[미투데이]]를 관리하던 회사가 만든 음악 어플리케이션이다. 2016년 11월 30일 이후에 서비스 종료 되었다.] 네이버 뮤직로 확인이 되었다. * 김광석 인생 이야기,노래 이야기(1996.7.1) : 김광석이 생전 소극장에서 부른 노래들를 모은 앨범이다. 즉 쉽게 말하다면 라이브 음반. * 1+2(1998.7.1) : 1+2가 발매된 같은 날 가객- 부치지 않은 편지도 같이 발매. * 가객-부치지 않은 편지(1998.7.1) : 같은 날 1+2도 발매. * 다시부르기 1(2000.7.1) : 생전 다시부르기 1를 다시 판매 한것 같다. 이등병의 편지 라이브 버젼도 있다. * Anthology 1(2001) : 김광석이 세상을 떠난 후 2001년에 낸 추모앨범,김광석의 대표곡과 김광석이랑 친분이 있던 가수들이 부른 앨범이다. 참여한 가수들은 [[윤도현]], [[이소라(가수)|이소라]], [[김건모]], [[안치환]], [[김창기]], [[박학기]], [[여행스케치]] 등 꽤 인기가 있는 가수들이나 김광석의 절친한 친구들이 김광석의 노래를 불렸다. 타이틀 곡인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는 이 앨범에 참여한 가수들 모두가 함께 녹음한 합창곡. * 5집 The Classic(2001) : 김광석의 대표 곡을 클래식으로 편곡한 앨범. 5집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보니 김광석의 정규 앨범으로 착각되는데 '''절대 정규 앨범이 아닌 리메이크 앨범이다.''' * Collection - My Way (1964 ~ 1996)(2002) : 김광석의 정규 앨범중에 인기가 좋았던 노래만 묶어서 판매한 노래. 즉 다시부르기에서 녹음한 노래가 아닌 원곡 노래만 모은 앨범이다. Disc 3에서는 미공개곡과 이미 발표된 곡의 미공개 버전, 라이브 버전 곡 등이 담겨져 있다. * 김광석 베스트(2005) : 김광석의 인기 곡(베스트 노래)들만 모음. * 김광석 셋,넷(2006) : 김광석의 정규앨범 3,4집을 묶음. * 다시부르기1,2(2006) : 다시부르기 1,2를 묶음. * 인생+노래 이야기(2007) : 1996년에 냈던 인생+노래 이야기를 묶음. * 나의 노래 BOX SET(2012.7.9) : 김광석의 정규앨범+다시부르기1,2+인생,노래 이야기가 들어 있는 앨범. * Unforgettable(2012.8.9) : [[http://m.music.naver.com/album/index.nhn?albumId=327783&type=description|소개]] 저작권 때문인지 이 앨범의 경우 직접 앨범을 사서 들을수 밖에 없다. * 김광석 4집 리마스터링 앨범(2014.11.11) : 4집을 리마스터링 한 앨범.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였음을에선 원곡과 꽤 차이가 있다. * 연결의 신곡발표 프로젝트(2015. 10. 30) : 김광석의 미완성곡을 [[심현보]], [[성시경]], [[정재일]][* 2000년 긱스로 데뷔한 싱어송라이터.], 이지혜[* 번역가로 활동하는 사람인데 이번에 가사를 응모해서 당선되었다. 심현보가 어느 정도 가사를 다듬었지만, 정작 심현보는 작사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등 여러 사람들이 완성시켜 만들어진 신곡이다. 부른 가수는 [[성시경]]이었으며 편곡은 [[심현보]]와 [[정재일]]. 하지만 김광석의 곡이라는 느낌보다 성시경-심현보의 느낌이 너무 강했는데다가 이 프로젝트 자체가 대기업 [[SK그룹|SK]]에서 내놓은 프로젝트라서 [[호불호]]가 갈렸다. * 김광석 다시부르기 1&2 2[[LP]](2016.4.27.) : 김광석 다시부르기 1, 2를 재발매한 앨범. 슬픈 노래, 광야에서, 그대 웃음소리 등 3곡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LP에 스크래치와 손자국이 많아, 수많은 구매자들이 환불을 요구한 바 있다. LP 표지는 민중화가 이종구가 디자인했고, 더블게이트식 양장형 LP커버, LP속봉투 2종으로 구성되어 있다. * 김광석 다시부르기 1&2 2[[LP]]아트 콜렉터스 에디션 #2(2016.8.25) '전작과 다른 공장에서 제작되었습니다'라는 문구와 함께 판매되고 있다. 저번 레코드판에 흠집이 많아 구매자들의 항의가 빗발쳐서 다시 발매한 것으로 보인다. 오랜 친구이자 [[학전]] 동료인 [[이창우(그래픽디자이너)|이창우]] 화가가 LP표지를 디자인했다. 제작 공장과 표지만 다르지 내용은 바뀐 것이 없다. * 김광석, 다시(2016.12.7) : 12월 1일에 가수 [[정인]]과 콜라보한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가 먼저 공개되었고, 12월 7일에 [[로이킴]]과 콜라보한 김광석의 1집노래인 [[너에게]] 등 9곡이 추가로 공개되었다. == 어록 == === 노트 및 메모장 === ||<-2>{{{#!wiki style="margin: -20px -10px -17px" ||||<#ffffff,#191919>{{{#!wiki style="margin:13px 5px 14px" 일반적 사랑의 결론은? '''스스로 선택한 사랑의 방법이 어렵더라도, 그 누군가 만든 기준에 의해 우리 사랑의 방법을 평가할 것인가?''' 가장 솔직해야 할 사랑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힘들어하는가. 사랑함, 주저함이 없는 것, 사랑함에 떳떳할 수 있는 것, 굳이 드러내지 않아도 사랑하는 것을. '''마음의 평안이나 그저 안일한 평화가 주는 심심함보다, 가슴이 파이고 흐느끼는 밤이 있더라도 사랑하는 쪽을 택하리라.''' 적어도 내 자신에게만은 부끄럽지 않은 솔직한 사랑을 위해 요구하지 않으며, 내 스스로 사랑함을 그 누가 모르겠는가. ---- 연도 미상, 12월 17일 }}} || }}}|| ||<-2>{{{#!wiki style="margin: -20px -10px -17px" ||||<#ffffff,#191919>{{{#!wiki style="margin:13px 5px 14px" 기대 욕심 바람이 간절하여도 채워지지 않음에 실망하는가. 확실한 모습을 꿈꿀 수 없어 상심하는가. 또 묻는다. 선택함에 주저함 없었듯이 지금에 충실할 수 있는가. ---- 1993년 1월 1일 }}} || }}}|| ||<-2>{{{#!wiki style="margin: -20px -10px -17px" ||||<#ffffff,#191919>{{{#!wiki style="margin:13px 5px 14px" (중략) [[기형도]] 산문집을 읽다. 짧은 여행의 기록. 느낌이 많다. '짜쉭' 스물아홉[*오류 기형도는 25살에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다.]에 [[신춘문예]] 당선이라니. 그럴 만도 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관심사에 목매다는 것이니까. 다른 이들보다 좀 나은 것은 그는 그렇게 자신의 삶으로 시를 완성했다는 사실이다. 스물아홉 살, 어느 삼류 극장에 앉아 조용히 숨을 거둔, 그 짧은 여행의 마지막 눈빛은 어떠했을까. ---- 연도 미상, 1월 10일 }}} || }}}|| ||<-2>{{{#!wiki style="margin: -20px -10px -17px" ||||<#ffffff,#191919>{{{#!wiki style="margin:13px 5px 14px" 하루 종일 누군가를 그리워했습니다.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를 그리워하며 내 속의 일부가 되어 있었던 그가 그리워 미치도록 보고팠던 겁니다. 구부러진 환기통 사이로, 내 피워 문 담배 연기는 소리 없이 사라집니다. 그도 사라졌습니다. 흔적 없이 내 잘못이 아니라 우기고 싶겠지만 내 잘못입니다 그를 보고 싶습니다 ---- 연도 미상, 3월 19일 }}} || }}}|| ||<-2>{{{#!wiki style="margin: -20px -10px -17px" ||||<#ffffff,#191919>{{{#!wiki style="margin:13px 5px 14px" 온통 네 생각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 밤이 싫다. 말없이 웃음으로 모든 걸 감싸 안을 수는 없는가. 사람을 사랑하는 것 나의 무게와 나를 둘러싼 주위를 거부하는 것 자아의 무게를 책임짐과 동시에 사회의 무게에 정면으로 반항하는 것 ---- 연도 미상, 3월 23일 }}} || }}}|| ||<-2>{{{#!wiki style="margin: -20px -10px -17px" ||||<#ffffff,#191919>{{{#!wiki style="margin:13px 5px 14px" 시간은 놀라지도 아쉬워하지도 않는다. 안타까울 이유도 없는 것 지난 시간들을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매어놓지도 않는다. 스치는 바람이 끝이나 시작이 없는 것처럼 인생도 애당초 의미 없는 것 삶의 힘을 얻고 싶은 사람들이 애써 만들어놓고 스스로의 행동에 힘겨워하며 지내고 있는 것이다. 사람, 사람, 참 어리석은 동물이다. 스스로 함정을 파놓고 그 안에서 행복이 어디에 있는 것일까 고민하는 답답한 생물. ---- 연도 미상, 8월 30일 }}} || }}}|| ||<-2>{{{#!wiki style="margin: -20px -10px -17px" ||||<#ffffff,#191919>{{{#!wiki style="margin:13px 5px 14px" 비상구는 때로 등한시한다. 어떤 건물에선 아예 잠가놓기도[* 현재는 소방시설 설치 및 관리에 관한 법률 제16조에 따라 금지된다.] 한다. 도둑 때문일까? 급할 때만 쓰는 걸까? 늘 다니는 곳, 일상적인 비상구의 반대말은 말 그대로 비상사태가 아닌 안정 상태의 '안정구'인가? 비상구 비상구의 위태로움 청소하고 자주 보수해주지 않으면 정말 급할 시에는 정작 쓰지 못하는 경우도 있음 비상구 비상구의 외로움 많은 사람이 없고 어쩌다 이동하는 사람이 있기에 늘 혼자인 듯한 외로움 불안함 ---- 작성일 미상 }}} || }}}|| ||<-2>{{{#!wiki style="margin: -20px -10px -17px" ||||<#ffffff,#191919>{{{#!wiki style="margin:13px 5px 14px" 1993년을 보내며, 한 달간의 공연이다. 이번 이야기는 잃어버린 꿈이다. 꿈에 보이는 모습은 현실과는 대조적이면서도 현실을 비춰주는 것들이 있다. {{{#AA9872 사랑이라 쓰면서}}}[* 실제 노트에도 이 부분을 금색으로 썼다.] 금색이 나오니, 왠지 사랑의 느낌이 아닌 듯하다. ---- 1993년 12월 2일 }}} || }}}|| === 방송 및 인터뷰 === ||<-2>{{{#!wiki style="margin: -20px -10px -17px" ||||<#ffffff,#191919>{{{#!wiki style="margin:13px 5px 14px" 차가워진 바람 속에 서서, 지구가 자전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문득 별 하나가 빛을 내며 나를 지켜보기 시작합니다. 안녕하세요! '밤의 창가에서' 김광석입니다. "어? 김광석이가 웬 일이지?" 뭐 이렇게 말씀하시고,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이 계시겠죠. 오늘부터 제가 황청원 선생님[* 전남 진도 출신의 시인. 탤런트 [[김혜정]]의 전 남편이며, 음악 교과서에 수록된 국악가요 [[https://youtu.be/PDJ-CqCQ28c?si=-q131KAItsacqNI8|'소금장수']]의 작사가이다.] 뒤를 이어서, 이 시간 여러분들 만나 뵙게 됐습니다. 글쎄요, 다른 사람들은 다들 아주 근사하게 첫 인사를 하시던데요, 전 역시 뭐 이렇게 근사한 놈은 못 되나 봅니다. 하지만 이런 말씀은 꼭 드리고 싶네요. __진짜, 여러분들을 만나게 돼서 정말 너무너무 반갑다는 것.__ __그리고 정말 앞으로 열심히 하겠다는 것,__ __그리고 여러분들과 매일 밤마다 할 얘기들이 너무너무 많이 남아 있다는 것.__ 어떠세요? 여러분들, 잘 아시겠죠? ---- 1991년 10월 14일, [[불교방송]] 라디오 '밤의 창가에서'를 시작하며 [[https://www.youtube.com/watch?v=0d4PqD1PAYg|#]] }}} || }}}|| ||<-2>{{{#!wiki style="margin: -20px -10px -17px" ||||<#ffffff,#191919>{{{#!wiki style="margin:13px 5px 14px" 이 사회가 기피하는 부분들을 [[즐거운 사라 음란물 지정 및 탄압 사건|은폐하려고만 하면]] 아이들은 어디서 알고 어디서 느끼나요? ---- 1993년 2월, 월간 『길』과의 인터뷰 중 }}} || }}}|| ||<-2>{{{#!wiki style="margin: -20px -10px -17px" ||||<#ffffff,#191919>{{{#!wiki style="margin:13px 5px 14px" 주변에, 살아가시는 분들이 다들 자기 직업에 충실해서 직장 다니시고 그러듯이, __저도 제 가수라는 직업에 충실하고 싶었어요.__ 그래서 공연 열심히 하다 보니까 1,000회 되데요? ---- 1995년 8월 11일, 국내 최초 1000회 공연 기록 달성 직후 [[SBS]]와의 인터뷰에서 }}} || }}}|| ||<-2>{{{#!wiki style="margin: -20px -10px -17px" ||||<#ffffff,#191919>{{{#!wiki style="margin:13px 5px 14px" 문명이 발달해 갈수록 오히려 사람들이 많이 다치고 있어요. 그 상처는 누군가 반드시 보듬어 안아야만 해요. __제 노래가 힘겨운 삶 속에서 희망을 찾으려는 이들에게 비상구가 되었으면 해요.__ {{{#!folding [ 전문 펼치기 · 접기 ] '''<노래는 삶의 상처를 감싸주는 것>''' 일상에 쫓겨 바삐 살아가다 보면 가끔 우리는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서마저 잊어버리곤 한다. 주어진 삶의 무게로 하루를 마무리할 때면 어둠과 함께 텅 빈 외로움이 찾아든다. 바로 이런 인정에 목마른 사람들을 향해 통기타와 하모니카로 인생을 조율하며 친근한 목소리로 다가오는 사람이 있다. 김광석(金光石, 32세, [[마포구]] [[서교동(마포구)|서교동]] 398-2[*오기 398의 2번지가 아닌 398의 1번지이다.] 원음빌딩 202호). 노래는 진실한 삶의 이야기라는 믿음으로 지난 '84년부터 줄곧 관객들과의 만남을 가져온 그가 국내에서는 전례 없는 라이브 공연 1천회를 맞아 서울 동숭동 [[학전]] 소극장에서 기념 콘서트를 열었다.(8.1~8.31) BBS '밤의 창가에서' 녹음차 불교 방송국에 들른 그를 17층 로비에서 만났다. "제가 좀 늦었죠?" 바로 이웃집 형을 생각게 하는 외모와 말투, 가슴에 범선이 그려진 흰 티셔츠를 입은 모습이 산뜻해 보였다. "우선 1천회 공연 기념 콘서트를 축하드립니다. 라이브 무대를 고집해 오신다는 게 쉽지만은 않았을 텐데요?" "사실 천(千)을 바라보고 노래하진 않았어요. 바둑을 둘 때처럼 __결과에 집착하기보다는 한집 한집 만들어가는 데 정성을 다하듯 매번 공연에 전력투구하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되었네요.__" '84년 민중노래 서클인 '[[노래를 찾는 사람들]]'로 공연 활동을 시작한 그는 '88년 그룹 '동물원'을 결성하면서 본격적인 라이브 가수로 활동을 시작했다. '[[거리에서]]'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등 호소력 짙은 그의 음악은 대학가를 중심으로 인기를 끌면서 듣는 이에게 가슴을 휘어잡는 잔잔한 울림과 함께 조래가 끝난 뒤에도 뭔가를 생각게 하는 독특한 흡인력이 있다. '''<마음이 닫힌 사람들의 비상구>''' "김광석씨를 '노래하는 [[음유시인]]'으로 표현하곤 하는데요, 노래와 삶에 관한 철학이 있다면......" "__문명이 발달해 갈수록 오히려 사람들이 많이 다치고 있어요.__ 그 상처는 누군가 반드시 보듬어 안아야만 해요. __제 노래가 힘겨운 삶 속에서 희망을 찾으려는 이들에게 비상구가 되었으면 해요.__" 사람들에게 위안과 힘을 주려는 자신의 노래가 자칫 교과서적 충고나 교훈조로 흐르지는 않을까 항상 조심스럽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승만 정부|자유당 시절]], 아버님께서 [[전국교직원노동조합/역사#s-4|교원노조]][* [[4.19 혁명]] 직후 민주화를 열망하던 교사들에 의해 탄생한 노동조합.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의 전신이다.]사건으로 교단을 떠나셔야 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게 대학시절 민중음악을 선택하신 계기가 아닌지......" "직업적인 계기는 아니었어요. 아버님께서는 항상 남들에게 피해주는 일은 하지 말고, 경우에 바르게 살아갈 것을 말씀하셨어요. __사회라는 체계는 보다 나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도움이나 위로보다는 종종 피해를 입히더군요.__ 대학을 졸업할 무렵 이러한 현실이 제겐 맞지 않는다는 걸 느꼈죠. 사람들과 함께 따뜻함을 나누며 살아가려던 제겐 다행히도 음악이 있었습니다." '90년 6월 동갑내기 서해순 씨와 결혼, 다섯 살 난 딸 서연이를 두고 있는 김광석씨는 지금의 그가 있기까지 아내의 헌신적인 사랑을 결코 잊을 수 없다고...... "결혼하고 나서 4, 5개월 동안 통장은 항상 '0'이었어요. 총각 시절엔 그저 내 한몸 버텨가면 그만이었는데 가장이 되어 아내에게 아무런 힘이 되지 못 하는 것 같아 몹시 괴롭더군요...... 아내는 직장생활로 가계를 꾸려나가면서 말없이 나를 밀어주더군요. 인정받는 것은 우선 아내로부터 시작된 것이지요." 요즈음은 콘서트 외의 시간은 딸과 함께 놀아주는 시간을 가지려고 애쓴다. 서연이에겐 항상 바르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아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고...... '''<맑은 향기 나누며 살자>''' '94년 [[김광석 네번째|4집 앨범]] 출반 이후 김광석 씨의 30대 가수로서의 완숙미가 한껏 고조되고 있다. 그러나 그에게도 서른을 넘어설 무렵 심한 상실감에 빠지게 된 때가 있었다. 삶에 대한 기본적인 고민으로부터 허무가 몰려 왔다고...... "정말 견디기 힘들었어요. __20대의 가능성들은 대부분 좌절되고 30대의 한계를 분명 인정해야만 했었죠.__ '[[서른 즈음에]]'라는 곡은 그때의 심정을 노래하고 있죠."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내뿜은 담배 연기처럼 / 작기만 한 내 기억 속에 무얼 채워 살고 있는지 / 점점 더 멀어져 간다......' 하지만, 그냥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는 그는 생활 속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 다시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결심을 하고 '[[일어나]]'를 힘차게 노래한다. '일어나 일어나 다시 한 번 해보는 거야 / 일어나 일어나 봄의 새싹들처럼......' "4집 앨범에 수록된 '맑고 향기롭게'라는 곡은 [[법정(승려)|법정 스님]]이 함께 참여하셨다고 들었는데 가까이서 법정 스님을 대한 느낌은 어떠셨는지요?" "저는 특별한 종교를 갖고 있지는 않지만 법정 스님을 뵈면서 마음을 잘 닦으신 분은 절로 몸에서 향기가 베어 나옴을 느낄 수 있었어요. '가만히 옆에만 계셔도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구나' 생각하니 앞뒤 가리지 않고 제 욕심만 앞세우는 요즘 사람들이 배워야 할 점이 많다는 걸 느꼈어요." __노래의 참된 의미는 상처받은 사람들을 부드럽게 감싸주는 역할__이라고 그는 말한다. 일상의 조그마한 얘깃거리, 재밋거리가 모이면 그것이 바로 삶의 큰 힘이라고, 처음부터 너무 큰 의미만 좇다보면 마치 동화속의 '무지개를 찾아가는 소년'의 이야기처럼 허황될 것이라며 웃는다. "사람들이 너무 쉽게 포기하고 잘못된 사실에도 대충 익숙해져버리려는 것 같아 안타까울 때가 많아요. 그런 사람들이 __제 노래를 듣고 한 번쯤 '아, 나도 저런 때가 있었지......'하고 돌아보는 계기가 된다면 제 노래 인생은 충분한 가치를 지닌다고 봅니다.__"}}} ---- 1995년 샘터 9월호 중에서 }}} || }}}|| ||<-2>{{{#!wiki style="margin: -20px -10px -17px" ||||<#ffffff,#191919>{{{#!wiki style="margin:13px 5px 14px" 가을철 이맘때 쯤 되면요, 묘하게도 저는 그 대학교 2학년 때, 겨울 방학 지나고 나서 한참 놀 때 생각이 납니다. 그맘때 뭐, 성적표가 일찍 왔나 싶어요. 지금 생각으로는. 근데 아버님이 성적표를 이러고 보시더니, [[엄마가 딸에게|"광슥아, 고마 쉬이라"]] 그래, 휴학계 내고, 1년 놀고, 그리고 6개월 갔다 오고, 그리고 학기 안 맞는다고 6개월 또 놀고. 노니깐 참 좋데요. 뭐 사실 하는 일 없고, 아침에 일어나서 배고프니깐 "밥 주세요" 밥 먹고. 심심하니깐 나가서 (놀고), 할 일 없죠. 그냥 지나다니는 사람들 얼굴 구경이나 하고 멀뚱히 보다가 배고파지면 또 집에 가서 "엄마 밥 줘" 그러고 또 밥 먹고 자고. 아마 20대 초반에 누구나 비슷한 경험들 하셨을 것 같아요. __사실 뭐 기대도 크고, 가능성도 많고. 하지만은 미래에 대해서 어떻게 보면 좀 불확실하고요. 구체적이지 못하다 보니깐 아무래도 어떤 조급함이나 답답함, 뭐 이런 것들이 분명히 있었던 것 같습니다.__ 아마 그래서, 제가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이 노래]]를 그렇게 좋아했는지 몰라요. 그 다음 부를 곡이요. 다는 못 보내드릴 것 같고요. 조금만 보내드리면, '불행아'라고 하는 노래인데요, 그맘때 뭐 허구한 날 부르고 그랬던 노래입니다. 뭐 그런 심정하고 비슷하게 맞아떨어져서 그랬는지는 몰라도요. 보내드릴게요. (노래를 부르고 나서) ([[이문세]] : 앞으로도 계속 공연하실 거에요?) 아마 [[1996년|내년]]부터는 그렇게 많이 하진 못할 것 같습니다. 아내가 어디로 공부를 하러 가는데, 아이 봐 줄 사람이 없어서 제가 애 봐야 돼요. (집에서, 아니면 외국에서 같이?) 외국에서 같이요. 해마다 하는 여름 정기 공연은 계속 해야죠. 그래야 생활이 될 테니깐. ---- 1995년 10월 28일 이문세쇼[* 이 날은 가수 [[이소라(가수)|이소라]]와 훗날 최초 4선 [[서울특별시장]]이 되는, [[오세훈/생애#s-2|변호사로 큰 인기를 끌던]] [[오세훈]]도 출연했다.] [[https://youtu.be/zvVZNgn14Ds|#]] }}} || }}}|| === 콘서트 === ||<-2>{{{#!wiki style="margin: -20px -10px -17px" ||||<#ffffff,#191919>{{{#!wiki style="margin:13px 5px 14px" 끝 인사'는 이런 말을 하겠습니다. "행복하셔요" 인데요, __자기 일을 열심히 하고 그 속에서 보람을 느끼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__입니다. 여러분들도 열심히 사시고, 보람도 느끼시고 그래서 행복해지기를 바라겠습니다. '''행복하셔요.''' ---- 콘서트를 비롯해 그가 언제나 사람들과 헤어질 때의 인사말인 '행복하세요'에 대한 본인의 설명[* 그는 평소 '행복하세요'라는 말을 자주 하였으며, 상단 틀에 있는 서명에도 '행복하세요'를 적기도 하였다.][* '미처 다 하지 못한', 107p] }}} || }}}|| ||<-2>{{{#!wiki style="margin: -20px -10px -17px" ||||<#ffffff,#191919>{{{#!wiki style="margin:13px 5px 14px" 뭔가 스스로 가진 한계라는것, 꼭 나이 때문만은 아닌것 같습니다. 생활하다보면, 졸업하고 20대가 지나가고, 20대가 참 좋은것 같아요. 제 느낌으로는 이때까지 제 생각으로는 기대도 크고 가능성도 있고 뭐 그래서, 이리저리 시도했다가 또 깨지기도 하고, 그래도 꿋꿋하게 다시 일어설수 있고, '뭐, 그럴수 있지? 뭐' 이러면서, 큰 실패를 보아도, 그냥 툭툭 털고 일어날수 있는 나이가 20대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30대쯤 되면 뭐 하나 정해놓고 아둥바둥, 잡고 있을수밖에 없죠. ---- 1995년 6월 29일, '[[서른 즈음에]]'와 '[[거리에서]]'를 부르고 난 후 }}} || }}}|| ||<-2>{{{#!wiki style="margin: -20px -10px -17px" ||||<#ffffff,#191919>{{{#!wiki style="margin:13px 5px 14px" 다음 곡이,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 인데요. 사실, __상식적이지 않은 것이 상식화되어가는 그런 모습들이 많습니다.__ 주변에. '''오늘 뭐, 또. 비상식적인 일들이 또 한번 벌어졌더군요.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삼풍백화점 무너졌다]]고 그래서...''' 일찍 오신 분들은 모르시죠? 900명이 뭐 이렇게 깔려있다고... 뭐 여튼 정확한 숫자는 모르겠고요. (객석이 술렁이자) 술렁거리시네.. 다 끝나고 확인해보십시오. 무너졌다 그래서, 걱정돼서 집에 전화해봤더니 집사람이 삼풍백화점에 갔대요. 그래서 어떻게 된거냐고 물어봤더니 3시 반에 나왔대요. (웃음소리 들리자) 무슨 얘기인지... 에, 참. 황당한 일이 많이 벌어져서 마음이 좀 붕~뜨는 것 같습니다. 하여튼, 많이들 안 다쳤으면 좋겠고요. 두바퀴로 가는 자동차 시작하겠습니다. ----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1995년 6월 29일''']],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를 부르고 난 후[* 응답하라1994 12회 [[https://youtu.be/ZukRapkXT70|#]] 이 영상 51초 지점에 1995년 김광석 슈퍼 콘서트 장면이 잠깐 나오면서 '사랑이라는 이유로'가 배경음악으로 깔려서 나온다. 위 영상 1분14초부터.] }}} || }}}|| ||<-2>{{{#!wiki style="margin: -20px -10px -17px" ||||<#ffffff,#191919>{{{#!wiki style="margin:13px 5px 14px" 그, 사랑이 아니라고 우기고 싶겠지만 뭐, 스스로 투자한 시간이나, 주었던 정이나, 이게 아까워서 아플수도 있구요. 혹은, 자기 마음을 전혀 몰라줘서, 그럴수도 있구요. 그저 자존심이 상해서 아플수도 있습니다. __여튼. 근데 안아프면, 사랑이라고 할수가 없겠죠? 그만큼 희생이 따르고, 그러는게 아닌가 싶습니다.__ ---- 1995년 6월 29일,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 '[[나의 노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을 부르고 난 후 }}} || }}}|| === 노래에 대한 소개 === ||<-2>{{{#!wiki style="margin: -20px -10px -17px" ||||<#ffffff,#191919>{{{#!wiki style="margin:13px 5px 14px" '''[[그녀가 처음 울던 날]]''' 이정선씨가 만들고 취입했던 곡이죠 10년 전 쯤에 좋아했던 노래였습니다. 가사를 잘 들어보면 아시겠지만, 아주 즐거운 느낌의 곡은 아닌데 음악은 또 그렇지 않죠. '절묘한 매칭이 필요한 곡'이라고 생각되네요. 왜 가사를 음미해보면 말예요, 이런 생각이 들어요. 그녀는 참 착했어요. 그가 아무리 잘못해도 웃어주고, 약속시간에 늦게 나와도 미소로 맞아주고.. 그가 그녀에게서 한눈을 팔아도 따뜻하게 대해주고. 그러다가 참다참다 못해 그녀가 처음으로 울어버리죠 그런데 그게 끝이었어요. 한번 울고 간거죠. 그러게 있을 때 잘하지 왜 가고 나서 '가슴이 온통 무너진다'는 둥 '하늘이 캄캄하다'는 둥 하는지 '''여러분 모두 있을 때 잘하세요''' ---- 1995년 6월 3일, [[둥근소리]] 노래이야기 게시판에 올라온 글 [[https://m.blog.naver.com/black_stones/20142529109|#]] }}} || }}}|| ||<-2>{{{#!wiki style="margin: -20px -10px -17px"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