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권탁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權卓 [[1544년]]([[중종(조선)|중종]] 39) ~ [[1593년]]([[선조(조선)|선조]] 26) [[11월 21일]] [목차] == 개요 == [[조선]] 중기의 무신이다. 본관은 [[안동 권씨|안동]](安東)[* [[https://www.gimhae.go.kr/00954/01019/01059.web?amode=view&idx=20134|#]]. 복야공파(僕射公派) 22세.], 자는 사원(思遠), 호는 묵암(默菴). == 생애 == [[1544년]]([[중종(조선)|중종]] 39) [[경상도]] [[선산군|선산도호부]] 신곡면 월동(現 [[경상북도]] [[구미시]] [[도개면]] 월림1리 월골마을)에서 아버지 월곡(月谷) 권종(權鍾)[* 자는 중임(重任).]과 어머니 [[김해 김씨]] 사이에서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https://www.gimhae.go.kr/00954/01019/01059.web?amode=view&idx=20134|김해시청 홈페이지 김해인물 - 권탁]] 등의 자료에서는 권탁의 아버지를 권길원(權吉元)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안동권씨대동세보 권1 635쪽에 따르면 권길원(權吉元)은 권탁의 조부이다.] 임진왜란 이전의 생애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알려진 게 없다. 그의 생애는 임진왜란이 시작되면서 역사의 소용돌이에 휩쓸리게 된다. 왜군이 임진왜란 초기 경상도 지역에 먼저 상륙함에 따라서 많은 경상도 지역의 성이 공격당하였는데, 김해성도 이들 중 하나였다. 당시 김해도호부사 [[서예원]]이 도망가는 바람에, 권탁이 자처하고 김해성의 수성장 역할을 맡았다. 권탁은 [[선조국문유서]]를 지니고 왜군 진영에 포로로 잡혀있는 조선 양민 100여 명을 구출하는데 성공하나, 구출 이후 김해성에서 상처가 덧나서 순국하였다. 1722년([[경종(조선)|경종]] 2) 1월, 장증손자 권재도(權載道) 등의 상소로 통정대부(通政大夫) [[장례원]] 판결사(判決事, 정3품)[* 이 때문에 권탁의 후손들은 스스로를 '안동 권씨 판결공파'라고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47/0002122390?sid=103|지칭한다]].]에 추증되었다. 이러한 충심을 기리고자, 조선 후기인 1870년([[고종(대한제국)|고종]] 7)에 이르러 [[https://terms.naver.com/entry.naver?cid=40942&docId=1195187&categoryId=33084|선조어서각]](宣祖御書閣)이 건립되었다. 김해시에서는 권탁 장군을 김해의 인물로 지정하는 등, 역사성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파일:권탁장군.jpg]] [[분류:1544년 출생]][[분류:1593년 사망]][[분류:구미시 출신 인물]][[분류:안동 권씨 복야공파]][[분류:임진왜란/군인]][[분류:임진왜란/사망자]]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