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공빈 최씨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분류: 조선의 후궁]][[분류:전주 최씨]] [include(틀:조선의 후궁(환조 ~ 연산군))]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6E1D55, #89236A 20%, #89236A 80%, #6E1D55); color: #FFD400" '''조선 예종의 후궁[br]{{{+1 공빈 최씨 | 恭嬪 崔氏 }}}'''}}}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include(틀:지도, 장소=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산27, 너비=100%)]}}} || ||<-2> {{{#ffd400 {{{-2 공빈 최씨묘 위치}}} }}} || || '''출생''' ||미상 || || '''사망''' ||미상 || || '''능묘'''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산27 || || '''본관''' ||[[전주 최씨]] || || '''부모''' ||부친 - 최도일(崔道一)[br]모친 - [[경주 정씨]]|| || '''형제자매''' ||남매 - 최세현(崔世賢) 자매 - 김제군부인 최씨(金堤郡夫人 崔氏) || || '''배우자''' ||[[예종(조선)|예종]] || || '''자녀''' ||없음 || || '''봉작''' ||소훈(昭訓) → 숙의(淑儀) → 귀인(貴人) → '''공빈(恭嬪)''' ||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 [[예종(조선)|예종]]의 [[후궁]]. 아버지는 군기시 판관을 지낸 최도일(崔道一)이며, 어머니는 조선의 개국공신이자 한성부판사를 지낸 정희계(鄭熙啓)의 딸 [[경주 정씨]]이다. 또한, 조선 후기에 이르러 [[문종(조선)|문종]]의 계비로 거론되면서 논란을 일으킨 주인공이다. == 생애 == 1462년(세조 8) 당시 [[세자]]였던 예종의 후궁이 되었다.[* 세조실록 28권, 세조 8년 6월 11일 갑술 1번째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ga_10806011_001|#]] ] 이때 그녀의 아버지 최도일은 죽고 없었지만, 집안 배경 덕분에 후궁이 될 수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최도일은 1461년(세조 7) 사망하여 세조가 관곽과 함께 쌀, 콩 20석과 종이 1백 권을 부조하였다. ] 본래 그녀의 집안은 왕실과 인연이 깊었다. 우선 고조부 최유경(崔有慶)은 [[태조(조선)|태조 이성계]]의 원종공신으로 6남 1녀를 두었는데, 그 중 둘째 아들 최사의(崔士儀)의 딸이 [[세종(조선)|세종]]의 후궁 [[귀인 최씨|명의궁주]]이다. 증조부 최사강(崔士康)은 최유경의 넷째 아들로 3남 2녀를 두었는데, 그 중 맏딸이 [[태종(조선)|태종]]의 아들 [[함녕군|함녕군 이인]]과 혼인한 전주군부인이고, 막내딸은 [[세종(조선)|세종]]의 아들 [[금성대군|금성대군 이유]]와 혼인한 완산부부인이다. 조부 최승녕(崔承寧)은 최사강의 맏아들로 3남 1녀를 두었는데, 맏아들이 최도일(崔道一)이고 외동딸은 세종의 아들 [[임영대군|임영대군 이구]]와 혼인한 제안부부인이다.[* 최승녕의 막내 동생인 최승종(崔承宗)의 6대손이 [[인조]] 대에 활동하는 [[최명길(조선)|최명길]]이다.] 그리고 최도일의 맏딸이 [[광평대군|광평대군 이여]]의 아들 영순군 이부와 혼인한 김제군부인이며, 막내딸이 예종의 후궁 '공빈 최씨'이다. >[[금성대군|유(瑜)]]의 처족인 최도일의 딸을 왕비(王妃)로 세우려다가 뜻을 얻지 못하고 드디어는 중궁(中宮)이 자기가 세운 바가 아니라 하여 온갖 계교로 이간(離間)하여 왔습니다. >---- >《[[세조실록]]》 세조 1년 윤6월 11일 또한, 1455년(세조 1) 금성대군을 논죄할 때 '최도일의 딸'이 언급되는데 이 딸이 '공빈 최씨'이거나 또는 그녀의 언니일 것이다.[* 일단 공빈 최씨의 언니일 가능성이 더 높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영순군 신도비에 1455년(세조 1) 3월에 세조가 잠저에 있으면서 영순군의 혼사를 주관하였고, 부인이 된 최도일의 딸은 15세에 시집왔다고 써있다. ] 즉, 금성대군이 [[단종(조선)|단종]]의 왕비로 세울 생각을 할 정도의 집안이었다. 이러한 집안 배경을 갖고 있었던 그녀는 처음에 소훈(昭訓)[* 세자 후궁의 품계로 종5품이다. ]으로 입궁했는데, 예종 연간에는 기록에서 보이지 않는다. 나중에 [[성종(조선)|성종]] 대에 "예종의 후궁인 숙의 최씨를 귀인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성종실록 155권, 성종 14년 6월 15일 병자 2번째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ia_11406015_002|#]] ] 다만, 빈(嬪)으로 품계를 올려주었다는 기록은 없고 [[전주 최씨]] 족보에서 공빈(恭嬪)으로 나온다. == 논란 == [[영조]] 대에 이르러 [[충청도]]의 유학 박통원이 상소를 올리면서 논란이 일어났다. >[[문종(조선)|문종]] 대왕 왕비 [[현덕왕후]]께서 승하(昇遐)하신 후 12년간 곤위(壼位)가 오래 비어 있었습니다. 사체(事體)로 헤아려 보건대 반드시 이러한 이치가 없습니다. 《명사(明史)》 열전(列傳)에 문종 왕후에게 고명(誥命)의 말을 내린 것이 있는데, 그 연월(年月)을 고찰하면 문종조(文宗朝)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또 고양(高陽) 땅에 한 고묘(古墓)가 있는데, 비석이 잘려서 고찰할 수가 없습니다만, 고로(古老)들이 서로 전하기를 공빈(恭嬪) 최씨(崔氏)의 묘라고 합니다. 그런데 최씨 집 족보 가운데 역시 공빈 최씨가 있습니다. 연대(年代)를 미루어 보면 역시 문종조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는 반드시 그 사이에 계빈(繼嬪) 최씨(崔氏)가 있었던 듯하나, 문헌으로는 징거할 수 없었습니다. 청컨대 문적(文蹟)을 널리 고찰하여 이를 정하여 처리하소서. >---- >《[[영조실록]]》 영조 23년 12월 16일 당시 이러한 논란이 불거진 데에는 ''''12년간 왕비 자리가 비워져 있었다''''는 이유가 가장 컸다. 멀게는 [[성종(조선)|성종]]이나 [[중종(조선)|중종]]도 왕비가 죽자 계비를 맞이하였고, 가까이는 [[숙종(조선)|숙종]]이 왕비가 세 명이다. 이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문종이 왕비 자리를 12년 동안 비워뒀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때 영조는 실록이 보관되어 있는 강화도까지 사람을 보내 알아보게 하였다. 영조는 "[[단종(조선)|원손]]이 이미 탄생하여 국가의 근본이 이미 굳어져서 계비를 맞이하지 않은 것"으로 결론을 내고, 전주 최씨 집안의 기록은 [[견강부회]]한 것으로 정리하였다.[* 영조실록 66권, 영조 23년 12월 21일 정축 2번째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ua_12312021_002|#]] ] 그러나 1791년(정조 15) 사간 윤행리가 상소하면서 논란이 지펴졌다가 실록을 살펴본 뒤에 [[정조(조선)|정조]]가 사실을 정리하였고, 또 1887년(고종 24) 부사과 이국응이 공빈 최씨에 대해 밝혀달라며 상소했으니 조선 후기는 공빈 최씨가 문종의 계비냐 아니냐로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 가족 관계 == * 증조부 : 찬성 증 좌의정 최사강(贊成 贈 左議政 崔士康) * 대고모 : 전주군부인 [[전주 최씨]](全州郡夫人 全州 崔氏) - [[함녕군]]의 부인 * 대고모 : 완산부부인 [[전주 최씨]](完山府夫人 全州 崔氏) - [[금성대군]]의 부인 * 대고모 : [[전주 최씨]](全州 崔氏) - [[경안공주]]의 며느리 * 조부 : 봉례 증 우의정 최승녕(奉禮 贈 右議政 崔承寧) * 고모 : 제안부부인 [[전주 최씨]](齊安府夫人 全州 崔氏) - [[임영대군]]의 부인 * 부 : 최도일(崔道一, ? ~ 1461) * 모 : [[경주 정씨]](慶州 鄭氏) * 남매 : 최세현(崔世賢) * 자매 : 김제군부인 [[전주 최씨]](金堤郡夫人 全州 崔氏, 1441 ~ 1493) - 영순군의 부인 * 남편 : [[예종(조선)|예종]](睿宗, 1450~1469)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