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고요제이 덴노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include(틀:역대 일본 덴노)]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AF001F 0%, #bd0029 20%, #bd0029 80%, #AF001F)" {{{#dca600 '''고요제이 덴노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역대 일본 상황)] ---- }}} ||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AF001F 0%, #bd0029 20%, #bd0029 80%, #AF001F); color: #dca600" '''일본 제107대 천황[br]{{{+1 고요제이 덴노}}}[br]後陽成天皇'''}}}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1280px-Emperor_Go-Yōzei2.jpg|width=100%]]}}} || ||<|2> '''출생''' ||[[1571년]] [[12월 31일]] || ||[[야마시로|야마시로국]] [[교토부|교토]] 교토 어소[br](現 [[교토부]] [[교토시]]) || ||<|2> '''사망''' ||[[1617년]] [[9월 25일]] (향년 46세) || ||[[야마시로|야마시로국]] [[교토부|교토]] 다이리 키타고쇼[br](現 [[교토부]] [[교토시]]) || || '''능묘''' ||[[후카쿠사북릉]]([ruby(深草北陵, ruby=심초북릉)]) || ||<|4> '''재위기간''' ||'''{{{#dca600 제107대 천황}}}''' || ||[[1586년]] [[12월 17일]] ~ [[1611년]] [[5월 9일]] || ||'''{{{#dca600 일본 상황}}}''' || ||[[1611년]] [[5월 9일]] ~ [[1617년]] [[9월 25일]]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휘''' ||카즈히토([ruby(和仁, ruby=화인)]) → 가타히토([ruby(周仁, ruby=주인)]) || || '''부모''' ||부황 [[사네히토 친왕]][br]모후 후지와라 하루코 || || '''형제자매''' ||8남 6녀 중 장남 || || '''배우자''' ||고노에 마에코 || || '''자녀''' ||13남 12녀 || || '''종교''' ||[[불교]] || || '''아명''' ||차치마루([ruby(茶地丸, ruby=차지환)]) || || '''원호''' ||고요제이인([ruby(後陽成院, ruby=후양성원)]) || || '''시호''' ||'''고요제이 덴노([ruby(後陽成天皇, ruby=후양성천황)])''' || || '''연호''' ||[[덴쇼]]([ruby(天正, ruby=천정)], [[1586년]] ~ [[1592년]])[br][[분로쿠]]([ruby(文祿, ruby=문록)], [[1592년]] ~ [[1596년]])[br][[게이초]]([ruby(慶長, ruby=경장)], [[1596년]] ~ [[1611년]]) ||}}}}}}}}} || [목차] [clearfix] == 개요 == 일본의 제107대 천황. [[에도 막부]]의 첫 번째 천황이었으며, '''[[임진왜란]] 당시 천황이기도 했다'''. 원래 이름은 가즈히토(和仁)였지만, 후에 가타히토(周仁)로 고쳤다. [[오기마치 덴노]]의 황태자 [[사네히토 친왕]](誠仁親王)의 아들로, 고요제이 덴노는 즉위한 후 아버지를 요코 덴노로 추존했다. == 생애 ==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분로쿠(文禄) 2년(1593), 조선에서 약탈해 온 금속활자와 활자인쇄본 서적을 고요제이 천황에게 바쳤다. 천황은 그해 구게(공경)인 로쿠조 아리히로(六条有広, 1564 ~ 1616), 니시도인 도키요시(西洞院時慶, 1552 ~ 1640) 등에게 명령해 그 기술을 사용, 《고문효교》(古文孝教)[* 《[[효경]]》의 훈점본]를 인쇄하도록 했다{'''분로쿠칙판'''(文禄勅版)}. 이는 일본에서 금속활자를 사용한 최초의 인쇄 작업이었다. 또한 게이초(慶長) 2년(1597)에 조선 활자를 모방한 대형 목활자(木活字)를 제작해 《금수단》(錦繍段)을 개판하게 했다{'''게이초칙판'''(慶長勅版)}. 역으로 말하자면 한국사에서는 [[고려시대]] 때 개발된 금속활자가 이때까지도 [[일본 열도]]에는 없었다는 소리가 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천하의 운명을 건 '''[[세키가하라 전투]]'''가 일어나자 단고(丹後)의 타노베 성(田辺城)[* [[교토부]] [[마이즈루시]]에 있는 윤곽식 평성으로 훗날 에도 시대때 타나베 번의 번청으로 사용했지만 여러가지의 이유로 공원이 되었다.]에서 서군(西軍)과 교전 중이던 [[호소카와 유사이]]를 아껴서 양군에게 칙령으로 성을 열 것을 명령했다. 게이초 8년(1603)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세이이다이쇼군([[정이대장군]])으로 임명했고, '''이로써 역사상 세 번째 막부이자 가장 안정적이었던 [[에도 막부]]가 개창되었다'''. 조정의 권위를 억압하려는 도쿠가와 막부는 교토 조정에 대한 간섭을 강화해, 조정이 갖고 있었던 관위서임권이나 연호 개원(改元)까지도 막부가 가져왔다. 게이초 14년(1609)에 궁중에서 여관(女官)의 밀통사건{'''이노쿠마 사건'''(猪熊事件, 체웅사건)[[https://www.youtube.com/watch?v=Zrj17BJtsrM|#]]}이 일어나자 에도 막부는 교토 쇼시다이(京都所司代, 경도소사대)에 명령해 엄벌을 요청했다. 고요제이 덴노는 히데요시의 강권으로 제1황자였던 요시히토 친왕(良仁親王)을 차기 계승자로 삼았지만, 히데요시가 죽자 이를 꺼려 동생인 도모히토 친왕(智仁親王, 1579 ~ 1629)에게 양위하기를 바랬고, 조정 신료들이나 쇼군 이에야스는 이를 반대했다. 세키가하라 전투 뒤, 고요제이 천황은 이에야스의 동의를 얻어 요시히토 친왕을 강제로 닌나지(仁和寺)[* 교토시 우쿄구 오무로오우치에 있는 진언종어실파의 총본산 사원]에 출가시키고, 제3황자인 마사히토 친왕을 황태자로 세웠다. 게이초 16년(1611)에 마사히토 친왕(훗날의 [[고미즈노오 덴노]])에 양위하고, 센도고쇼(仙洞御所, 선동어소)로 물러났다. 그러나 [[고미즈노오 덴노]]는 상황의 처소에 좀처럼 찾아가지 않는 등 덴노와 상황 두 부자는 오랫동안 불화 상태였다고 한다. 겐나(元和) 3년(1617)에 47세로 붕어했다. 시신은 화장되었는데, 이후로 현대의 [[쇼와 덴노]]에 이르기까지 역대 덴노들은 모두 매장되었으므로, 화장으로써 장례를 치른 마지막 덴노로 기록된다. == 기타 == [[유학]]과 [[국학]]에 매우 능해서 《[[겐지모노가타리]]》, 《이세모노가타리》, 《구간쇼》를 지었다고 하며 《[[일본서기]]》를 게이초칙판으로 발행하기도 했다. [[도요토미 히데츠구]]가 참혹하게 죽은 후에, 히데츠구의 어머니를 위로하고자 '즈이류인'(瑞龍院, 서룡원)이란 원호를 내렸으므로 히데츠구와의 사이는 나쁘지 않았던 듯하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고요제이 칙서.png|width=100%]]}}}||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당시의 덴노이기도 하다'''. 그래서 일본에선 임진왜란/정유재란을 덴노의 연호를 따서 각각 '''분로쿠의 역'''(문록의 역, 文禄の役), '''게이초의 역'''(경장의 역, 慶長の役)이라고 부른다. '''정작 덴노 본인은 히데요시에게 조선으로 건너가지 말 것을 당부하는 서신을 보냈는데, [[허수아비|씹혔다(...).]]'''[* 그러나 이런 전적에도 불구하고 제국 시기의 일본은 히데요시가 고요제이 덴노를 수호했다며 빨아주었다.] 이 어명을 담은 친필 문서 원본이 [[교토국립박물관]]에 남아 있다.[[http://emuseum.nich.go.jp/detail?langId=ko&webView=null&content_base_id=101050&content_part_id=000&content_pict_id=000|#]] 《사명대사전》에서는 풍신수길을 앞세워 조선을 침공했다며 사명대사에게 농락당하는 신세로 나온다. 조선의 민간인들은 일본도 조선처럼 군주가 실권을 쥔 나라인 것으로 오해했기 때문에 그려진 잘못된 묘사였다.[* 다만 조선 조정에서는 천황이 허수아비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의 왕과 신하들의 회의를 보면 일본 천황은 수백년째 허수아비이고, 실권은 쇼군이나 칸파쿠(관백) 등의 신하가 쥐고 있다는 것 정도는 인지하고 있었다. 그런 사정을 잘 모르는 민간인이 쓴 소설에서나 오해한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같은 민간인 출신으로서 권력을 잡은 히데요시 역시도 비슷한 오류를 저지른 바 있다.] 오히려 고요제이 덴노는 임진왜란을 반대하는 인물이었다. [[분류:천황]][[분류:일본 상황]][[분류:1571년 출생]][[분류:1617년 사망]][[분류:교토시 출신 인물]][[분류:센고쿠 시대/인물]][[분류:개명한 인물]]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