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경종(고려)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include(틀:역대 고려 국왕)]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e6bd0e, #f9d537 20%, #f9d537 80%, #e6bd0e)" {{{#670000 '''경종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역대 고려 왕태자)] ---- [include(틀:고려의 왕자/국조 ~ 문종)] ---- [include(틀:고려사)] }}} ||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e6bd0e, #f9d537 20%, #f9d537 80%, #e6bd0e); color: #670000" '''고려 제5대 대왕[br]{{{+1 경종 | 景宗}}}'''}}} || ||<-2>{{{#!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external/photo-media.daum-img.net/20090309105101.460.0.jpg|width=100%]]}}} || ||<-2> {{{#670000 {{{-2 영릉 전경}}} }}} || ||<|2> '''출생''' ||[[955년]] [[11월 9일]] || ||[[고려]] [[개성시|황도 개주]][br](現 [[경기도]] [[개성시]] 만월동) || ||<|2> '''즉위''' ||[[975년]] [[7월 4일]] || ||[[고려]] [[개성시|황도 개주]] [[만월대|정궁]][br](現 [[경기도]] [[개성시]] 만월동) || ||<|2> '''사망''' ||[[981년]] [[8월 13일]] (향년 25세) || ||[[고려]] [[개성시|황도 개주]] [[만월대|정궁]] 정전[* 당시 만월대의 정전은 천덕전(天德殿)이므로 천덕전에서 붕어한 것으로 보인다.][br](現 [[경기도]] [[개성시]] 만월동) || || '''능묘''' ||[[영릉#s-1.1]](榮陵) || ||<|4> '''재위기간''' ||'''{{{#f9d537 고려의 정윤}}}'''[* 경종은 왕태자-정윤(王太子-正胤)이였다.] || ||[[965년]] [[3월]] ~ [[975년]] [[7월 4일]] {{{-3 (10년)}}} || ||'''{{{#670000 제5대 대왕}}}''' || ||[[975년]] [[7월 4일]] ~ [[981년]] [[8월 13일]] {{{-3 (6년)}}}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본관''' ||[[개성 왕씨]] || || '''휘''' ||주(伷) || || '''부모''' ||부왕 [[광종(고려)|광종]][br]모후 [[대목왕후]] || || '''형제자매''' ||2남 3녀 중 장남 || || '''배우자''' ||[[헌숙왕후]], [[헌의왕후]], [[천추태후|헌애왕후]], [[헌정왕후]] || || '''[[정윤#正胤]]''' ||[[성종(고려)|왕치]] || || '''자녀''' ||[[목종(고려)|1남]] || || '''종교''' ||[[불교]] || || '''자''' ||장민(長民) || || '''묘호''' ||'''[[경종]](景宗)''' || || '''시호''' ||공의정효순희명혜성목'''헌화대왕'''[br](恭懿靖孝順熙明惠成穆'''獻和大王''')[* 《고려사》 <경종 세가> 마지막 조 기준.] || || '''연호''' ||태평(太平, [[976년]] ~ [[981년]])[* 당시 북송 태종의 연호인 '태평흥국'에서 뒤 2글자인 '흥국'만을 제외하고 사용하였다. 이런 경우 독자적 연호로 보기는 어렵다.][* 북송 태종이 태평흥국 연호를 사용한 기간이 고려 경종의 재위기간과 완벽히 겹쳐 이런 혼동이 생긴 듯하다. 물론 고려 측에서 '흥국' 자를 제외하고 내부적으로는 독자적인 연호처럼, 외부적으로는 송나라의 연호인 것처럼 사용했을 가능성도 있다.] ||}}}}}}}}} || [목차] [clearfix] == 개요 == 고려의 제5대 대왕. 묘호는 경종(景宗), 시호는 헌화대왕(獻和大王). 휘는 주(伷), 자는 장민(長民), 연호는 태평(太平, 976년 ~ 981년)인데 독자적인 연호인지는 논란이 있다. 고려의 후삼국 통일 이후 태어난 첫 번째 군주로 20세에 즉위해 26세에 [[요절]]한 청년 군주였다. 마음이 굳세지 못했고 음주가무를 좋아했다. 하지만 정종, 광종의 [[대숙청]]으로 인해 공포와 두려움 속에 빠진 조정을 안정화시키고, '''[[전시과]]'''[* 고려를 대표하는 토지 제도인 관계로 이것 외에는 치적이 없다시피한 경종이 [[한국사]] 관련 시험에서 종종 나온다.]를 시행하는 등의 치적을 남겼다. 경종은 부왕 광종의 숙청 기간과 사촌 동생인 성종의 발전 기간 사이에 있는 과도기였다고 볼 수 있고, 이 기간 동안 경종은 무난하게 정치를 펼치며 성종에게 바통을 넘겨주었다. == [[묘호]]와 [[시호]], 별칭 == 후계자 성종이 올린 공식 묘호는 '''[[경종]]'''(景宗)이다. 경종의 시호는 여러 고려 황제들이 그렇듯 두 버전이 있다. * 《고려사》 <경종 세가> -총서- 기준: * 지인성목명혜헌화대왕(至仁成穆明惠獻和大王) * 《고려사》 <경종 세가> 마지막 조 기준: * 공의정효순희명혜성목헌화대왕(恭懿靖孝順熙明惠成穆獻和大王) 후계자 성종이 '헌화'를, 아들 목종이 '성목'을, 사촌동생 현종이 '명혜'와 '순희'를, 문종이 '정효'를, 고종이 '공의'를 추가로 올렸다. 경종의 긴 시호 중 중요한 부분은 정윤 성종이 올린 대표시호 '헌화대왕'(獻和大王)이다. 그래서 묘호와 합쳐 부르면 '경종 헌화대왕'(景宗 獻和大王), '경종 헌화왕'(景宗 獻和王)이다. 시호 '헌화'(獻和) 중 '헌'(獻) 자를 돌림으로, 경종의 네 왕후는 모두 '헌' 자 시호를 받았다. 헌숙, 헌의, 헌애, 헌정왕후. 경종 재위 7년차에 만들어진 '지곡사진관선사비'엔 경종이 '영주'(英主), 고려는 '대방'(大邦)으로 등장한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photo-media.daum-img.net/20090309105101.460.0.jpg|width=100%]]}}} || || ''' {{{#670000 [[개성시]][* 구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 눌목리. 참고로 북한에서는 개성시를 2019년부터 황해북도를 포함한 어느 도에도 속하지 않게 행정구역을 개편했다.]에 있는 고려 경종과 [[헌숙왕후]]가 안장된 [[영릉]]}}} ''' {{{-2 [[북한]] 치하의 [[고려왕릉]]들 중에서는 보존 상태가 그나마 나은 축에 속한다. }}} || == 연호 == 태평(太平)이라는 [[연호]]를 사용했다고 한다. 근거는 금석문을 통해 알 수 있는데 경기도 [[하남시]] 선법사에 있는 [[대한민국의 보물|보물]] 제981호 [[하남 교산동 마애약사여래좌상|마애약사여래불]]의 명문(銘文)에 아래와 같은 문구가 쓰여 있다. 하지만 경종의 독자적인 연호인지 여부에는 다소 [[논란]]이 있는데 당시에 고려는 [[송나라]]와 긴밀한 [[외교]] 관계를 맺고서 연호도 갖다 썼으며 당시 송나라 황제인 [[태종(송)|송 태종]]의 연호가 '''태평흥국'''(太平興國)이었기 때문에 자세한 논의가 필요하다. 송 태종의 태평흥국 연호는 976년 12월부터 썼기 때문에 977년은 '''태평흥국 2년'''이다. >[ruby(太,ruby=태)][ruby(平,ruby=평)][ruby(二,ruby=이)][ruby(年,ruby=년)][ruby(丁,ruby=정)][ruby(丑,ruby=축)][ruby(七,ruby=칠)][ruby(月,ruby=월)][ruby(二,ruby=이)][ruby(十,ruby=십)][ruby(九,ruby=구)][ruby(日,ruby=일)][ruby(古,ruby=고)][ruby(石,ruby=석)][ruby(佛,ruby=불)][ruby(在,ruby=재)][ruby(如,ruby=여)][ruby(賜,ruby=사)][ruby(乙,ruby=을)][ruby(重,ruby=중)][ruby(脩,ruby=수)][ruby(爲,ruby=위)][ruby(今,ruby=금)][ruby(上,ruby=상)][ruby(皇,ruby=황)][ruby(帝,ruby=제)][ruby(萬,ruby=만)][ruby(歲,ruby=세)][ruby(願,ruby=원)]。 >'''태평 2년'''(977년) 정축년 7월 29일 옛 석불이 있던 것을 금상이신 황제를 위해 중수하오니 만세하시기를 기원합니다 > ---- >선법사 <마애약사여래불 명문>(銘文). == 생애 == === 즉위 이전 === ||<-3><:><#FEDC89>'''{{{#670000 경종의 등극 이전 관작}}}'''|| ||<:><#FEDC89>'''{{{#670000 작위}}}'''||<(> '''황태자(王太子) - 정윤(正胤)''' ||<(> 전통적 후계자의 작위 [[태자]]에 고려 고유의 작위 정윤을 겸했다. || ||<:><#FEDC89>'''{{{#670000 직위}}}'''||<(> 내사제군사(內史諸軍事) - 내의령(內議令) ||<(>내사제군사가 정확히 어떤 직위인지는 미상이다. 그러나 제군사가 고려 군대 지휘관의 직함인 것을 감안하면 '내사성의 군대 지휘관' 정도일 것으로 보인다. 겸한 내의령은 명예직으로 명목상 내의성 장관이다. || 아버지 광종의 [[호족(한국사)|호족]] 숙청 작업으로 인해 차기 [[후계자]]라는 신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불우한 유년기를 보냈다고 한다. 그 이유는 호족들이 [[태자]]를 등에 업고 반란을 일으킬까봐 광종이 두려워한 탓에 항상 태자를 의심하고 경계하여 야단을 쳤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숙청되지는 않았는데 이는 경종이 광종의 살아있는 유일한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차남]] 효화태자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경종의 동복동생이라는 것과 시호만 남아 있어 일찍 [[요절]]한 것으로 추정된다. 게다가 어머니인 [[대목왕후]] 덕분으로도 볼 수 있는 부분이 많다. [[최승로]]는 <[[시무 28조]]>에서 >"경종께서는 깊은 [[궁궐]]에서 태어나 아녀자의 손에서 자라서 궁궐 문 밖의 일에 대해서는 일찍이 알지 못하였으나 다만 타고난 성품이 총명하였기 때문에 후회와 과실을 면하고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습니다" 라고 말하고 있다. 아녀자의 손에 자랐다는 것은 아버지와는 교류가 어려웠고, 철저히 어머니나 외가 쪽 세력의 보호 아래서 자랐음을 의미한다. 광종과 관계가 가깝거나 적어도 나쁘지만 않았어도 정통성을 의식해 부자 관계를 실제보다 잘 포장해 적었을 것이기 때문. 대목왕후가 광종이 실시한 [[노비안검법]]에 대해 간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데 이런 것으로 보아 대목왕후가 자신의 [[친정]]인 황주 황보씨를 포함한 호족 세력들의 대변자였음을 알 수 있으며, 아무래도 이 역시 광종이 모후 혹은 외가의 [[교육]]을 받았던 태자 시절의 경종을 경계했던 이유 중 하나로 추정된다. "경종은 천성이 총명하였으므로 후회와 과실을 면했다"는 부분은, 아버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고 무사히 왕위를 계승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 즉위와 치적 === 975년 광종이 향년 51세의 보령에 붕어함으로써 왕위를 이어받았다. [[광종(고려)|선왕]]이 피를 너무 많이 묻혔고 자신 역시 늘 위협에 시달리며 살아왔던 탓에 [[공포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 또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목숨을 잃은 혼란상 때문에 사회 전체가 그야말로 원한이 판을 쳤던 탓인지 몰라도 경종이 [[임금]]이 되자마자 한 일은 사회 분위기를 수습하기 위해 가장 먼저 호족과의 화합 [[정책]]을 펼치는 것이었다. 호족 출신의 [[왕선]]을 집정([[재상]])으로 채용하고, 흉흉한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효자 표창도 많이 하는 등 [[백성]]들에게 부모에 대한 효도를 강조하였다. 문제는 왕선이 건의한 법안[* 호족들에게 [[합법]]적으로 보복할 수 있는 법안]인 '''[[복수법]]'''을 통과시키면서 사달이 났다. 경종이 이 법안을 통과시킨 이유에 대해서는 사실 현대 [[역사]]학계에서도 자세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일단 경종이 [[효도]]를 강조했던 성향을 가진 것으로 보건데 진짜 복수법이 옳다 생각하고 이 법을 승인했을 여지도 있겠지만 결과적으로 광종 시절 득세했던 세력들이 모조리 [[버로우]]하게 되었던 것으로 볼 때 이 목적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나중에 가면 왕선과 호족 세력이 이를 악용하는 문제가 생겼고, 이 와중에 경종의 [[삼촌]]들[* 천안부원낭군(천안낭군, 사후 효성태자로 추존)과 진천낭군(진주낭군, 사후 원녕태자로 추존).]이 이 법에 얽혀 [[살해]]당하는 촌극까지 벌어지게 된다. 최승로는 >"경종 시대에 복수법의 [[희생양]]이 된 사람들은 대부분 후생[* 왕에 영합한 [[간신]]이라는 뜻이지만 실제로는 광종 대에 등용된 신진 세력으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들이라서 죽어 마땅한 인간들" 이라고 까면서도 두 [[왕자]]에 대해서만은 >"광종도 연좌시켜 처벌하지 않고 관용한 사람들이었다며 살아있었다면 족히 [[왕실]]의 웃어른 노릇을 할 수 있었을 것" 이라고 자뭇 아쉬워하는 반응을 보였다.[* 광종이 이들의 목숨을 빼앗지 않은 것은 이들의 뒷배경이었던 [[천안시]]와 [[진천군]]이 광종의 외가였던 [[충주시]]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광종과 가까운 사이였기 때문이라고 보는 설도 있다.(출처 : 김창현 《광종의 제국》)] 이렇게 복수법의 폐단이 우후죽순 번지자 이를 묵과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경종에 의해 입안자인 왕선은 파직된 뒤 지방으로 쫓겨났다. 이 때 경종은 본래 한 사람만 담당하던 집정을 좌집정과 우집정으로 나누어 [[권력]]을 분산시키는 동시에 두 집정들끼리 서로 견제하게 만들었다. 이후 사적인 복수를 행한 사람들을 모두 처벌하는 동시에 복수법을 없애버렸다. 이 정책으로 인해 다음 왕인 [[성종(고려)|성종]] 시대에 등장한 최승로가 쓴 <시무 28조>에서 까이게 된다. 경종은 이후에 '''[[전시과]]'''(일명 시정 전시과)를 실행하여 [[관료]]들의 급여 체제를 확립시켰는데 이는 [[조선시대]]까지 쓰이게 될 정도로 합리적이었다. 그러면서 광종 시절에 자리잡은 [[과거 제도|과거]]를 통해 인재를 선발하면서 안정적인 [[정치]]를 펼쳐나갔다. 하지만 말년에는 주색과 [[바둑]]에만 몰두하며 정사를 돌보는 것을 소홀히 했다. 이에 대해 역사학계에서는 광종 시절의 공포 정치와 그 이후로 끊임없이 반복된 호족들 사이의 정쟁 및 복수법의 참상으로 인해 정치에 환멸을 느꼈기 때문으로 추정하고 있다.[* 똑같이 정치에 환멸을 느껴서 [[플레이보이|노는 소년]]이 된 명나라 신종 [[만력제]]와도 얼추 비슷한 부분.] === 붕어와 유조 === >과인(寡人)은 4조(四朝)[* 경종의 전 4대 [[임금]]. [[태조(고려)|태조]], [[혜종(고려)|혜종]], [[정종(고려 3대)|정종]], [[광종(고려)|광종]]을 가리킴.]의 위대함을 이어 [[삼한]](三韓)의 패도(霸圖)를 이어받으니 산천토전(山川土田)을 지키게 되었다. > >[[종묘]][[사직]](宗廟社稷)을 편안하게 하기 위해 매일 걱정하며 사니 7년의 시간이 지났다. 근로(勤勞)로 인해 질병(疾疹)에 걸리니 부담을 놓아 정신을 편하게 하고, 거룩함을 전해 아름다운 자에게 넘기고자 한다. > >'''[[성종(고려)|정윤(正胤) 개령군(開寧君) 치(治)]]는 나라의 현명한 친척이며 내(予)가 아끼는 자다. 그는 반드시 조종(祖宗)의 대업(大業)을 받들고 [[고려|국가(國家)]]의 창기(昌基)[* 국가의 창성한 기틀, 기반.]를 보호할 것이다.''' > >'''아! 너희(爾) 공경재신(公卿宰臣)들아, 내 개제(介弟)[* 큰동생, 성종을 의미.]를 존경하고 보호하라. [[고려|우리(我) 대방(大邦)]][* 고려는 자국을 [[대국]], [[천조]]로 칭하는데에 거리낌이 없었다.]을 영원히 빛나게 하라.''' > >[[과인]](寡人)이 늘 예경(禮經)을 보니 '남자는 부인(婦人)의 손을 잡고 죽지 않는다'라 했으니 늘 이를 보고 감탄하였다. 그리하여 금일(今日) 좌우빈(左右嬪)을 물러가게 했으니 혹시나 대기를 맞이하더라도 한스럽게 여길게 뭐가 있겠는가? > >제사의 일정은 한제(漢制)에 맞춰 1일을 1달로 계산하라. 원릉(園陵)의 제도(制度)는 검약(儉約)하게 하라. > >[[서경(고려)|서경]](西京),[[정읍시|안남]](安南)[* 현 전라북도 정읍시 지역에 설치됐던 안남[[도호부]]를 말한다.],등주(登州) 등(等) 제도(諸道)는 진수(鎭守)해야 할 임무(任)가 있으니 [[만월대|궐(闕)]]로 달려 오지 말고 각지에서 애도하라. 3일 안에 상복을 벗게 하고 나머진 사군(嗣君)[* 다음 군주, 역시 성종을 의미.]이 알아서 하라. >---- >《[[고려사절요]]》 제2권 <경종 헌화대왕> 중. 서기 [[981년]] 7월에 유조(遺詔)를 전하며. 붕어 1개월 전인 981년 6월에 병이 들었고, 981년 7월에 도학군자로 이름이 높았던 사촌동생 정윤 개령군 [[성종(고려)|왕치]]에게 "나의 뒤를 이으라"는 유조를 남긴 뒤 26세라는 젊은 [[나이]]에 붕어했다. == 가족관계 == 왕후들의 관계가 그야말로 족내혼의 극치를 달린다. 왕후 넷 모두 사촌관계이고 후궁도 사촌 관계이며, 왕후 두 명은 자매 사이다. 심지어 제1비인 헌숙왕후를 빼면 부모들이 모두 이복 남매 관계이다.[* 아래에 서술된 가족관계를 보면 [[태조(고려)|태조 왕건]]의 아들들은 대부분 이복누이와 혼인한 것을 알 수 있다.] 그 덕에 경종의 유일한 아들 [[목종(고려)|목종]]의 증조부모와 조부모, 부모가 모두 왕과 왕후이며, 목종도 족내혼을 하여 처가까지 모두 태조 왕건의 후손이다. * 제1비: [[헌숙왕후]] 김씨 고모 [[낙랑공주(고려)|낙랑공주]]와 [[경순왕]] 김부의 딸로서 경종과는 고종사촌 지간이다.[* 경순왕의 첫 부인 [[죽방부인]]의 딸이라는 말도 있다.] * 제2비: [[헌의왕후]] 류씨 숙부인 [[문원대왕]]과 문혜왕후 류씨[* [[태조(고려)|태조 왕건]]과 제6비 [[정덕왕후]] 류씨의 딸. 즉, 문원대왕과 문혜왕후는 이복남매지간]의 딸로서 경종과는 친사촌 지간이다. * 제3비: [[헌애왕후]] 황보씨 제4비인 [[헌정왕후]]와 같이 외삼촌이자 숙부인 [[대종(고려)|대종]][* 아버지 [[광종(고려)|광종]]의 이복형제이자 어머니 [[대목왕후]]의 친형제. 이복남매인 광종과 대목왕후가 혼인하면서 관계가 이렇게 꼬였다.]과 선의왕후 류씨[* [[태조(고려)|태조 왕건]]과 제6비 [[정덕왕후]] 류씨의 딸. 대종도 문원대왕처럼 자신의 이복누이와 혼인한 것이다.]의 딸들[* 즉, 헌애왕후와 헌정왕후는 경종의 후임인 6대 국왕 [[성종(고려)|성종]]의 누이들이다.]로 경종과는 친사촌이자 외사촌 지간이다. 헌애왕후 보다는 '''[[천추태후]]'''라는 호칭으로 더 유명하며, 경종의 유일한 아들 '''[[목종(고려)|목종]]'''을 낳은 여인이다. 목종은 성종 이후 유일한 왕위 계승자가 되어 보위를 이었지만, 아이를 낳지 못하고 [[강조의 정변]] 이후 목종이 시해당하면서 경종의 후사는 끊기게 된다. * [[목종(고려)|목종]] * 제4비: [[헌정왕후]] 황보씨 경종 재위 시기에는 별다른 기록이 없지만 경종이 승하한 이후, 숙부인 [[안종(고려)|왕욱]][* [[태조(고려)|태조 왕건]]과 [[신성왕태후]]의 아들]과 사통하여 [[현종(고려)|사생아]]를 낳는 희대의 스캔들을 일으키면서 역사에 기록되었다. 남편인 경종이 빨리 승하한 탓인지 자매지간인 헌애왕후와 헌정왕후는 경종 사후 남자 문제로 여러가지 물의를 빚었다. * 후궁: [[대명궁부인]] 류씨 경종의 고모 흥방궁주와 태조 왕건과 제6비 [[정덕왕후]] 류씨 사이에서 태어난 숙부 원장태자(元莊太子)의 딸이다. == 평가 == >王溫良仁惠, 不好遊戲. 末年, 厭倦萬機, 日事娛樂, 沈溺聲色. 且好圍碁, 昵近小人, 踈遠君子, 由是, 政敎衰替. > >왕은 성품이 따뜻하고 어질었으며 놀이 따위를 즐기지 않았다. 그러나 말년에는 정치에 염증을 내어 매일 오락을 일삼고 주색에 탐닉했다. 또 바둑을 좋아하며 소인들을 가까이 하고 군자들을 멀리하니 이에 정치와 교화가 점점 쇠퇴해졌다. >---- >《[[고려사]]》 분명 [[복수법]]이라는 실책을 저질렀고, 말년에는 정사를 멀리하며 주색에 탐닉하는 등 놀고 먹기만 했지만 그럼에도 후대의 평가가 생각보다 괜찮은 편이며 불우한 유년기로 인해 그를 동정하는 [[여론]]도 꽤 많다. 전시과라는 훌륭한 제도를 성립시켰다는 점을 볼 때 꽤 유능한 [[군주]]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며 경종의 뒤를 이은 성종 대부터 [[고려]]는 본격적으로 안정된 [[왕조]] 체제를 구축하게 된다. 또한 [[강조의 정변|목종 때의 일]]을 예견했는지는 몰라도 자신에게 [[후계자]]가 버젓이 있었음에도 나이가 어려서 [[왕위]] 계승 분쟁을 우려한 것인지 사촌이자 매부인 [[성종(고려)|성종]]에게 왕위를 넘겨줬는데 성종은 지방 제도와 여러 업적을 남기고 결과야 어찌되었든 고려 [[행정]] 체계의 기초를 닦고 유학 중심의 [[정치]] 체제 확립에 노력을 기울이는 등 경종의 안목이 틀리지 않았음을 스스로 증명해보였다. == 대중매체 == * 2002년 [[KBS]] 드라마 《[[제국의 아침]]》에서는 [[대목왕후]]의 외가에서 보살핌을 받다가 [[평산군|평주]] 호족들의 반란에 어린 아이임에도 억울하게 엮여 누명을 쓰고 광종이 사약을 내린다고 했다. 하지만 일단 궁에 유폐만 된 상태에서, 신료들의 간곡한 요청과 대목왕후의 자결 위협으로 후에 사면되고 막판에 정식으로 태자에 책봉되었다. * 2009년 [[KBS]] 드라마 《[[천추태후(드라마)|천추태후]]》에서는 배우 [[최철호]]가 연기했다. 2002년 [[SBS]] 드라마 《[[야인시대]]》에서 맡은 [[신마적(야인시대)|신마적]] 역의 광기어린 모습과는 상반되게 아들에 대한 절절한 부성애 연기를 선보이며 호평을 받았다. 작중에서 경종의 광적인 행동이 강한 인상을 남기며 화제가 되기도 했지만 이 광증(狂症)은 실제 역사에 비해 매우 과장된 것이다. >왜 이리 풍악 소리가 작은 게냐? 오늘은 즐거운 날이 아니더냐? 근심 걱정 다 떨치고, 마시고 취하는 날이란 말이다! > '''풍악! 풍악! [[부왘|풍악!]] [[풍악을 울려라|풍악을 더 크게 울려라!]] 풍악! 풍악...! 하하하... 풍악!''' [[분류:955년 출생]][[분류:981년 사망]][[분류:개성시 출신 인물]][[분류:고려 국왕]]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