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경순왕릉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include(틀:신라왕릉)] [include(틀:경순왕)] ||<-5> [[파일:정부상징.svg|width=30&height=30]] '''[[대한민국의 사적#s-2|{{{#ffffff 대한민국의 사적}}}]]''' || || 243호 ||<|2> ← || '''244호''' ||<|2> → || 245호 || || [[석촌동 고분군|서울 석촌동 고분군]] || '''연천 경순왕릉''' || [[나정|경주 나정]] || || [[파일:정부상징.svg|width=28]] '''[[대한민국의 사적|{{{#f39100 대한민국의 사적}}}]] {{{#f39100 제244호}}}''' || || {{{#fff {{{+1 '''연천 경순왕릉'''}}}[br]{{{-1 漣川 敬順王陵}}}}}} || || {{{#!wiki style="margin: 0 -12px; border-right: 2px solid transparent; border-left: 2px solid transparent"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1px; margin-top: -6px; margin-bottom: -5px" || '''{{{#fff 소재지}}}''' ||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 산18-2번지 || || '''{{{#fff 분류}}}''' || 유적건조물 / 무덤 / 왕실무덤 / 고대 || || '''{{{#fff 면적}}}''' || 11,777㎡ || || '''{{{#fff 지정연도}}}''' || 1975년 6월 25일 || || '''{{{#fff 제작시기}}}''' || [[통일신라]] [[경순왕]] || ||<-2> '''{{{#fff 위치}}}''' || [include(틀:지도, 장소=경순왕릉, 너비=360)]}}}}}}}}} || [[파일:external/www.gjfocus.co.kr/5204_6672_2438.jpg]] [[파일:external/tong.visitkorea.or.kr/1822885_image2_1.jpg]] [목차] == 개요 == 敬順王陵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예전 지명은 [[경기도]] [[장단군]] [[장단면]] 남쪽 고랑포 8리 계좌 언덕]에 위치한 [[신라]] 제56대 국왕 [[경순왕]] 김부의 능이다. [[대한민국의 사적|사적]] 제244호로 지정되었다. == 역사 == 경순왕은 신라 마지막 왕으로, [[고려]]의 [[왕건]]에게 항복한 후 경주를 떠나서 [[개경]] 근처에서 살아야 했고 죽어서도 [[신라왕릉]] 중 유일하게 [[경주시]] 바깥에 묻혔다. 즉, 다른 신라왕릉은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지만 경순왕릉만 유일하게 [[경기도]] [[연천군]]에 있다.[* 하지만 진성여왕릉이라 추정되는 릉이 양산시에 있기 때문에 그 릉이 진성여왕릉이 맞다면 유일한건 아니다.] 이후 세월이 지나면서 사람들의 기억에 잊혀 실전되었다가, [[1747년]]([[조선]] [[영조]] 23년)때 발견되어 석물 등을 정비하고 관리하게 했다. 경순왕릉이 [[식읍]]지인 경주가 아니라 연천에 있는 것은 고려 조정이 의도한 바라는 설이 대세다.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의 장례를 신라의 옛 수도인 경주에서 치르면, 경주 일대의 민심이 어떻게 변할지 장담할 수가 없다는 것. 망국의 군주의 장례는 민심을 격앙시켜서 복벽운동이 일어나기 딱 좋은 기회이기 때문이다. [[조선]]이 망한 뒤 [[일제강점기]] 때도 [[고종(대한제국)|고종]]과 [[순종(대한제국)|순종]]의 [[장례식]]에 맞춰서 각각 [[3.1 운동]]과 [[6.10 만세 운동]]이 일어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래서 아마도 경순왕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 소식을 경주에 바로 알리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왕릉은 수도 개경에서 100리 안에 있어야 한다.'라는 원칙을 명분으로 경주까지 못 가게 하고 당시 수운 교통이 편리한 [[임진강]] 고랑포 근처인 현 위치에 능을 세우게 했다는 것.[* 물론 경순왕은 더이상 신라의 왕이 아니었다. 다만 제후왕인 낙랑왕으로 봉해지기는 하였으니 왕은 왕이었다.] 사실 왕릉이 수도 인근 100리 이내에 있어야 한다는 것은 명문화된 의례가 아닌 관습적인 것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당시에는 이런 말이 없었는데 후대에 덧붙여진 것일 수도 있다. 위 내용이 명시된 가장 오래된 기록이 [[조선]] [[성종(조선)|성종]] 때 완성된 《[[경국대전]]》이다. 신라왕릉이라고 하면 [[황남대총]]처럼 거대한 봉분을 떠올리기 쉽지만 신라 후대에는 왕릉이 그렇게 크지 않았고 [[고려]]도 [[삼국시대]] 초기에 비하면 작은 신라 후대의 무덤크기를 따라간다. 그래도 봉분의 높이가 3m로 일반인의 무덤에 비할 바는 아니다. 고려 조정은 옛 신라 왕실을 나름대로 우대해 능 주위로 곡장(曲墻)을 둘러 왕릉의 격식을 갖춰놓았다. 현존하는 묘비는 [[1747년]]에 세운 것이다. 형태가 [[신라왕릉]]보다는 [[고려왕릉]]에 가깝다. 참고로 경순왕은 신라가 멸망한 뒤에도 장수해서 고려 제5대 [[경종(고려)|경종]] 때 붕어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사실이긴 하다. [[북한]] 치하의 여러 [[고려왕릉]]의 관리 상태가 처참한 수준임을 감안하면 여기는 다행히도 간신히 [[군사분계선|휴전선]] 남쪽에 들어와있어서 잘 관리되고 있다.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임진왜란]] 등 전란의 여파로 경순왕릉의 위치가 잊혔다가, [[18세기]] [[조선]] [[영조]] 시대에 묘비와 석물 등을 발견해서 왕릉을 정비하고 정기적으로 [[제례]]를 지내게 했다. 하필 영조 때 발견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신라 김씨의 본가 격인 [[경주 김씨]]가 왕실과 겹사돈을 맺어 [[노론]]의 주요 가문으로 부흥했기 때문. 김한구의 딸이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조선 영조)|정순왕후]], [[팔촌]] 형제 김한신은 [[화순옹주]]의 남편으로 영조의 [[부마]]이다. [[1949년]] [[김구]]가 참배를 하기도 했으나 [[6.25 전쟁]]을 거치며 다시 잠시 세간의 관심에서 잊혔다가 [[1970년대]] [[군사분계선]]을 시찰하던 [[대한민국 육군|육군]] 대위에 의해 다시 발견되었다. [[대한민국]]의 [[경주 김씨]] 절대다수는 경순왕의 후손이므로, 그냥 [[문화재]] 정도 대우만 받는 다른 대부분의 신라왕릉들에 비해[* 경순왕릉 외에 후손들이 중요시하는 신라왕릉으로는 모든 [[박(성씨)|박씨]]의 시조격인 [[박혁거세]]가 묻힌 곳으로 전해지는 [[오릉]] 정도가 있다.], 중[[시조]] 격인 경순왕릉도 매우 중요시한다. 일년에 두 번 [[3월 1일]]과 [[10월 1일]]에 제사를 지낸다. 이 기일은 영조 대에 정해진 날짜이다. 전술한 것처럼 우연이 아니다. == 교통 == [[372번 지방도]]를 통해 갈 수 있는데 이곳은 왕릉 바로 뒤에 있는 언덕을 '''[[남방한계선]]'''이 관통하고 있는 최전방 지역이다. [[태봉국 철원성]]처럼 사이에 껴버리지 않은 게 천만다행. [[군사분계선|휴전선]]이 코앞에 있는 지역이다 보니 가는 길이나 주변에서 '''[[지뢰]]주의'''라는 표시를 잔뜩 볼 수 있다. 혹시라도 경순왕릉을 찾는다면 거기로 넘어가는 일 없이 얌전히 문화재 관람만 하고 오자. 대중교통은 [[연천 버스 83]]이 다닌다. 종점인 고랑포구에서 승하차하면 된다. == 기타 == 경순왕릉은 존재 자체로 [[경순왕]]이 왕건에게 항복하여 나라를 바친 후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 알 수 있게 해준다. 고려는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이 죽은 후에도 왕으로 대접해주어 왕릉까지 만들어주고 끝까지 왕으로 대접해주었다. 그런데 경순왕과 마찬가지로 왕건에게 항복하여 나라를 바친 [[후백제]] 왕 [[견훤]], [[견신검]] 부자 및 왕건에게 왕위를 빼앗긴 [[궁예]]는 왕릉을 만들어주기는커녕 아예 무덤의 위치조차 기록에 남지 않아서[* 다만 견훤의 경우 충남 논산에 견훤의 능이라 전해오는 무덤이 남아 있긴 하다. 왜 하필 그의 무덤이 논산에 있는지는 견훤 문서 참조.] 그들의 시체가 어디있는지조차 알 수 없고 셋 다 경순왕과는 달리 시호도 받지 못했다. 같은 망국의 군주임에도 받은 대우가 너무나도 차이나는 게 눈에 띌 정도다. || [[파일:경순왕릉 묘비 후면.jpg|width=400]] || 경순왕릉 묘비가 있는데 내용은 "신라 제56대 [[경순왕]]은 [[후당]] 천성 2년 무자(戊子: 928년) [[경애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고 청태 을미(乙未: 935년)에는 고려에 나라를 넘겼다. [[송나라]]가 태평하고 나라가 번성하던 경종 3년(戊寅: 978년) [[4월 4일]]에 세상을 떠나니 경순왕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왕으로 예우해서 장단 남쪽 고○ 8리 계좌 언덕에 장사지냈다"는 문구가 적혀 있으며, 마지막에는 [[영조]] 23년(1747년)에 다시 세웠음을 밝히고 있다.[[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970495|#]] == 외부 링크 == * [[https://ko.wikipedia.org/wiki/연천_경순왕릉|한국어 위키백과: 연천 경순왕릉]]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60059&cid=46619&categoryId=46619|한국민족문화대백과: 연천 경순왕릉]]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053450&cid=42840&categoryId=42843|답사여행의 길잡이 9 - 경기북부와 북한강: 경순왕릉]]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029583&cid=42856&categoryId=42856|대한민국 구석구석: 연천 경순왕릉]]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060120&cid=40942&categoryId=33539|두산백과: 연천 경순왕릉]] == 사적 제244호 == *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VdkVgwKey=13,02440000,31&pageNo=1_1_1_0|문화재청 홈페이지: 연천 경순왕릉 (漣川 敬順王陵)]] >신라 56대 마지막왕인 경순왕(재위 927∼935)의 무덤이다. > >927년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놀다 견훤의 습격을 받아 시해된 후 견훤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 전쟁으로 인해 백성이 많은 피해를 입자 군신의 반대를 무릅쓰고, 935년 평화적으로 신라를 고려에 넘겨주고 왕위를 물러난 신라 마지막 왕이다. > >무덤의 높이는 약 3m, 지름 7m의 둥글게 흙을 쌓아올린 원형 봉토무덤으로 판석을 이용해 둘레돌을 돌렸다. 고려시대 왕릉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담장인 곡장이 둘려져 있어 고려 왕실에서 왕의 예로서 무덤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 왕릉 중 유일하게 경주 지역을 벗어나 경기도에 있다. > >※(신라경순왕릉 → 연천 경순왕릉)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경순왕, version=624, paragraph=7)] [[분류:경순왕]][[분류:신라왕릉]][[분류:통일신라]][[분류:고려/건축]][[분류:대한민국의 사적]][[분류:경기도의 무덤]][[분류:연천군의 문화재]]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