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상위 문서, top1=1988 서울 올림픽)] [목차] == 개요 == [[1988 서울 올림픽]]의 유치 과정이다. ||<-11> 1988년 하계 올림픽 유치 투표 과정 || || 국가 || 도시 || 1차투표 || 결과 || || '''[[대한민국]]''' || '''[[서울특별시|서울]]''' || '''52''' || '''유치 선정''' || || [[일본]] || [[나고야시|나고야]] || 27 || 탈락 || == 국내 변천사 == 1979년 4월, [[서울특별시]] [[잠실실내체육관]]에서 당시 세계 여자농구선수권대회 결승전을 관람하러 왔었던 [[박정희]] 대통령은 당일 [[박종규]] [[대한체육회|대한체육회장]] 겸 사격연맹회장, [[김택수(1926)|김택수]] 당시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 겸 [[민주공화당]] [[대한민국 국회의원|국회의원]], [[정상천]] [[서울특별시장]]과의 저녁 식사 자리에서 올림픽 개최를 직접 논의한다. [[박정희 저격 미수 사건|육영수 여사 피격사건]]으로 [[대통령경호실장]]에서 물러나면서 권력 중심부에서 밀려났던 박종규는 이후 사격연맹 회장으로 1978년 제42회 세계사격선수권 대회를 유치해서 한국에서 성공적으로 개최하는 성과를 거둔다. 특히 이 대회는 당시 1인당 국민소득 1000달러대의 후진국으로 변변한 경기장조차 없었던 대한민국에서 개최한 최초의 세계적 규모의 스포츠대회이자 이벤트로 상당히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이때 대회 개최를 위해서 국제규격의 사격장을 서울 [[태릉(문정왕후)|태릉]]에 서둘러 짓는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문화재보호 구역에 대회경기장을 만드는 말도 안 되는 짓이지만, 당시 분위기엔 그냥 서울에서 한적하고 땅값 싼 동네였을 뿐. 결국 태릉국제사격장은 2000년대 들어서 [[문화재청]]의 요구로 철거된다.] 박종규는 이 공로로 박정희의 신임을 되찾으면서 바로 이듬해인 1979년 2월에는 대한체육회장으로 취임해서 국내스포츠계의 수장이 된다. 그리고 곧바로 올림픽 유치를 기획한다. 박종규는 국가 스포츠 기반 활동의 저변 경쟁력 강화와 더불어 성장이라는 목표의 일환으로 박정희를 설득, 대한민국 최초의 올림픽 유치관련 구상안을 직접 전담하면서 준비의 초석을 다지기 시작, 1979년 6월 직접 [[푸에르토리코]] ANOC 총회에 참석해 직접적으로 서울 올림픽 유치 가능성을 타진, 같은 해 9월 1일, 정상천 당시 [[서울특별시장]]은 기자회견을 통해 올림픽 유치를 천명했다. 게다가 스포츠계와 별도로 이미 유신정권 핵심부에선 장기적인 올림픽 유치 구상이 있었다. 당시 수도권 인구과밀로 고민하던 정부는 <행정 수도 건설을 위한 특별조치법>을 통과시켜서 실제 수도이전 작업을 준비하고 있었고, [[오원철]] 제2경제 수석 비서관이 수백명의 전문가 그룹을 동원해서 충남 장기지구에 임시행정수도를 건설한다는 일명 '''[[백지계획]]'''을 만들어서 박정희 대통령의 재가까지 받은 상태였다. 그리고 이 백지계획에 이미 '''1996년 올림픽 주경기장 및 선수촌 부지'''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10.26 사건]]으로 [[박정희]]가 사망하면서 정치적 혼란속에서 올림픽 유치계획은 표류하게 된다. 국민들의 관심은 전부 개헌과 민주화 일정에 쏠렸고, 갑작스레 정권을 인계받은 [[최규하]] 대통령은 1980년 1월 19일에 공식적으로 "올림픽 유치 포기"를 선언한다. 게다가 5월달에는 올림픽 유치를 추진하던 [[박종규]] 대한체육회장이 실권을 장악한 전두환과 신군부 세력에게 권력형 부정축재자로 지목되면서 모든 공직에서 추방되기까지 한다. 이렇게 올림픽 유치 계획은 백지화된다. 하지만 얼마 안가서 올림픽 계획은 다시 부활한다.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을 무자비한 유혈학살로 짓밟고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과 [[하나회|신군부]] 세력은 민심수습책에 골몰하는데, 당시 막후에서 한국과 일본의 우익세력을 연결하는 밀사 역할을 하던 [[세지마 류조]] 이토추 상사 부회장이 극비리에 내한해서 전두환을 만난 자리에서 [[1964 도쿄 올림픽]]과 [[1970 오사카 엑스포]]를 예로 들면서 한국도 [[3S 정책|'이런 거대이벤트를 유치해서 사람들의 관심을 다른데로 돌려보라']]고 조언한 것이다. 신군부 세력은 이 조언을 받아들여서 최규하 정부의 유치포기 결정을 뒤집고 올림픽 유치에 정권의 사활을 걸었다. 곧바로 정권 차원의 준비가 진행되어 1980년 11월 30일에 전두환의 지시에 따라 IOC에 올림픽 유치신청서를 내고 12월 2일에 접수를 완료시켰으며, 1981년 1월 6일 KOC가 올림픽 유치계획을 위한 실무반을 편성했다. 하지만 개최 도시가 될 [[서울특별시]]가 당시 가치로 2조 원에 육박하는 예산 부담을 이유로 하여 올림픽에 소극적인 행보를 보이는데, 이는 결국 1980년 1차 올림픽 실사단 조사에서 중앙정부 및 올림픽 위원회와 서로간 최악의 불협화음을 내버린다. 또한 [[남덕우]] 국무총리가 '[[올림픽의 저주|올림픽 망국론]]'을 제기하면서 반발하자 '우린 총리부터가 유치에 반대하고 있으니 상대가 되겠는가?"라는 여론이 대두되었다.[* [[정주영]]이 [[제14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면서 출간했던, 자전적 홍보 책자에서 회고한 말이다.] 또한 대부분의 경제관료와 전문가, 기업인들도 하나 같이 막대한 비용부담을 이유로 올림픽 개최에 회의적인 입장을 보였다. 또한 남북대립 상황을 고려했을 때 공산권이 서울 유치에 격렬하게 반발할 것이라는 현실은 명백했으며,[* 예비군, 주민등록증의 탄생의 기점이 된 김신조 사건이라 불린 1968년 [[1.21 사태]], 1976년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등등.] 게다가 새롭게 등장한 [[전두환 정부]]는 반민주적이고 정통성 없는 독재정권([[5.17 내란]], [[5.18 민주화운동]] 유혈 진압 등)이라는 페널티가 존재했기 때문에[* [[중국]]은 2000년 올림픽 유치를 신청했다가 실패한 전적이 있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천안문 6.4 항쟁|천안문 사태]]였다. 물론 이후에 [[2008 베이징 올림픽]] 개최에는 성공하지만 말이다.] 유치하기 힘들 것이라는 전망이 많았다. 하지만 이러한 불만들과 우려의 전망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대안이 없었던 신군부[* 10.26 사태 이후 갑작스레 정권을 장악하게 된 전두환과 신군부 세력은 국정운영에 대한 아무런 청사진이 없었다. 때문에 정권 초기에는 일단 자신들과 인맥이 닿는 전문가들을 국내외에서 최대한 끌어모아서 그들의 조언을 거의 그대로 수용했다.]는 "일단 하고 보자!!"는 식으로 올림픽 유치에 총력을 기울인다.[* 서울 올림픽 30주년 다큐 [[88/18]]에서 당시 5공 정권의 실세였던 [[허화평]]은 '''언제 대한민국이 준비해놓고 뭐 제대로 한 일이 있나요? 우리는 해놓고 봤다고. 우리는 그것 밖에 길이 없는 나라야'''(...)라고 회고했다.] 무조건 올림픽을 유치하기로 결심한 전두환 정부는 정권의 2인자였던 [[노태우]] 정무장관을 [[꼭두각시|전면]]에 내세우고, 그 뒤에는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인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이 뛰어들면서 정부와 현대그룹의 인력을 총동원하여 본격적인 유치전에 뛰어든다. 노태우는 올림픽 유치 결심을 국내에 보여주기 위한 단순 얼굴마담이었기에, 실질적인 유치는 정주영과 전 대한체육회장 박종규의 공이 크다. 그 외에 [[유학성]] 안기부장도 음지에서 로비를 벌이며 적극적으로 활약했다고 한다. 그런데 1987년 대선에서 [[노태우]]는 올림픽 유치를 전적으로 혼자만의 공로로 내세우고 그동안 고생해온 정주영을 무시한다. 그리고 이것이 훗날 정주영이 정계에 진출하는 하나의 계기로 작용한다. 그리고 노태우보다 공헌한 바가 큰 인물이면서 정주영 회장 못지않게 올림픽 개최의 필요성과 초석의 역할을 해오던 [[박종규]]는 신군부 정치세력에 의해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정치생명이 끝났고, 1985년에 올림픽을 3년 앞두고 숨졌다.[* 노태우는 그동안 올림픽을 개최 성공과 의의에 자신이 철저하게 관여했다고 생각했다.] == 개최지 경쟁 및 관련 이슈 == 앞선 국내 변천사 문단에서 언급되었지만 한국은 당시 아시안 게임과 올림픽 그리고 월드컵과 같은 국제적인 대규모적 스포츠 대회 개최라는 경험이 아예 전무한 상태였기 때문에, 이에 "먼저 [[1986 서울 아시안 게임|1986년 아시안 게임]]을 유치한 후, [[1996년]] 혹은 [[2000년]] 올림픽을 노리는 것이 어떻겠냐"는 의견을 제시받는다. 또한 당시 [[아시안 게임]] 개최를 위한 유치전의 상대국이 하필이면, [[북한]]의 [[평양시]]라 한국 입장에서는 올림픽만큼이나 아시안 게임에서도 유치지를 추진하는데에도 더욱 신경써야 하는 대목이기도 했었다. 또한 [[이라크]]의 [[바그다드]]도 경쟁지로 참여한다.[* 그러나 북한의 경우는 그저 노이즈 마케팅에 불과했고, 이라크는 당시 [[이란-이라크 전쟁|중동 관련 이슈]]로 인한 페널티로 인해 타국의 압박을 받았기에 결국 이후 두 국가는 아시안 게임 유치를 중도에 포기한다.][* 이 당시의 이라크의 바그다드는 [[걸프 전쟁]], [[이라크 전쟁]]을 치르기 이전으로 아직 지금과 같은 폭탄 터지는 소리만 요란한 세기말의 폐허가 아닌 정상적인 도시였다.] 그리고 한국은 1988년 올림픽 관련 개최신청 초기에 이미 [[일본]]을 이기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아시안 게임과 올림픽의 빅딜을 제안해야 할 정도로 올림픽 관련하여 전망이 좋지 않았던 상황이었다. 특히나 한국의 해당 제안은 1986년 아시안 게임 서울 개최를 일본이 지지하고 대신 한국은 1988년 올림픽에서 일본을 지지하겠다라는 권유였다.[* 대한민국은 1970년 아시안게임을 유치했다가 경제적인 이유로 포기, [[태국]]에게 개최권을 넘겨준 전례가 있다. 그 때문에 아시안게임 유치전에 참여했다가 또 상황이 어렵다고 중간에 빠지기는 힘들었기에 일본에 올림픽 ↔ 아시안게임 맞교환 제안을 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거부한다. 여기에 일본의 보수우익 정치권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박정희 대통령 시절부터 줄곧 물밑에서 한일관계를 조율하던 기업인 [[세지마 류조]]가 당시 맹렬하게 올림픽 유치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일본 나고야 대신 오히려 서울 올림픽 개최를 지지하면서 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쳤다고 전해진다. 이것은 올림픽 유치운동을 이끌고 있던 모토야마 마사오 [[나고야시]] 시장이 [[일본사회당(1945년)|일본사회당]]과 [[일본 공산당]]의 지지를 받던 혁신계 인사라서 [[진영논리|자민당이자 골수 우익인]] 세지마가 [[서울특별시]]를 밀었다는 해석도 있다.[* 당시 일본 정치권에선 나고야가 올림픽을 유치하면 사회당이 그 여세를 몰아 일본 자민당의 [[55년 체제]]를 무너뜨릴 것이라는 시나리오가 떠돌았다고 한다. 그러나 자민당은 이후 정권을 지켜내는데 성공하였고 올림픽 유치 실패 이후에도 모토야마 마사오는 시정은 괜찮게 처리하던 인물이었기 때문에 1981년 시장선거에서 혁신계뿐만 아니라 자민당의 지지도 얻으며 압도적으로 재선에 성공했고, 이후에는 자신의 후임자도 12년간 시장직에 계속해서 재임했다. 반면 당시 [[아이치현]] 지사였던 나시야 요시아키도 나고야 올림픽 계획구상을 이끌던 인물이었는데, 나고야 올림픽 개최실패 이후로 모든 책임을 지고 1983년 지사 선거에서 불출마했고, 서울 올림픽이 끝난 뒤에 돌연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이게 사실이라면 국가적 역량을 총동원해서 올림픽을 준비한 한국과 달리 일본은 그저 [[나고야시]]라는 시 차원에서 올림픽을 유치하려 했다는 설을 방증할 수 있다. 물론 이 사실을 전혀 모르던 당시 정주영은 "일본도 내각이 일치단결하여 나고야에 유치하고자 한다"라고 간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당시의 일본 관계자들중에는 자국이 당연히 올림픽 유치에 성공할 것이라고 자만하며 건성스러운 태도를 보인 사람들이 한국보다 훨씬 많았다. 이 때문에 뒷날 일본의 일부 세력은 "당시 올림픽에 관련된 사람들이 너무나 무능하고 무관심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참고로 당시 일본의 상황은 나고야의 시민들과 일부 시민단체를 통해 올림픽 유치와 경기장 건설 등으로 인한 재정부담과 환경 문제 등의 논란으로 지속적으로 올림픽 반대의 여론이 팽배하면서 대대적인 반대 활동을 벌였다고 전해진다. 또한 일본 내부에서도 정치적으로 나고야 올림픽 개최에 대한 심리적 피로와 외국 뉴스를 통한 각종 견제에 따른 심한 압박을 논하면서 올림픽 유치에 소극적이거나 아예 반대하는 행보를 보였다.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1091700329202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1-09-17&officeId=00032&pageNo=2&printNo=11067&publishType=00020|참고1]],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110020032920201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1-10-02&officeId=00032&pageNo=2&printNo=11080&publishType=00020|참고2]] 결국 올림픽 유치에 실패한 나고야는 이후 20년 이상을 부단히 노력한 끝에 [[엑스포|등록박람회]]인 [[2005 아이치 엑스포]] 유치와, 이후 대륙별 권위 국제대회라 할 수 있는 [[2026 아이치·나고야 아시안 게임]]까지도 개최를 성공시키면서 과거의 한을 어느 정도 푸는데 성공한다. == 국내외적 여러 시련 및 정국 혼란 == 분단 상황에 대한 우려를 오히려 한반도 평화를 위해 올림픽이 필요하다는 논리로 극복했지만, 북한의 방해는 여전히 심했다. 이미 올림픽 개최 과정에서 [[대한민국|남한]]의 수도 [[서울특별시|서울]]에서 개최될 경우 분단이 고착화된다는 논리로 자신들의 입지가 좁아질 것을 우려해[*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1112100209202002&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1-11-21&officeId=00020&pageNo=2&printNo=18503&publishType=00020|북한의 서울올림픽 개최 비방]]] '''일본을 지지했던 북한'''은 [[1987년]]까지 뜬금없는 '''공동 개최론'''을 주장하며 대회 명칭을 '''[[평양시|평양]]-[[서울특별시|서울]] 올림픽'''으로 해야 한다는 무리한 주장을 서슴지 않았고[* 2019년에 공개된 외교문서에 따르면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이 88올림픽의 남북 분산개최를 북한이 수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견하면서도 사회주의 국가의 대회 참가 명분을 제공할 목적으로 이를 북한에 제안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특히나 당시 IOC의 사마란치 위원장은 1984년 9월에 방한하여 한국의 고위인사와 자리를 통해 만나는데 이때 남한이 일부 종목의 남북 분산 개최안에 대해 지속적으로 부정적인 견해를 보이자 "북한은 결코 이 제안을 수락하지 못할 것"이라며 대답하면서 "한국은 '안 된다'고만 이야기하지말고 'IOC가 공식적으로 제안해올 때 이를 적극적으로 검토해 볼 용의가 있다.' 정도로만 답하면 된다"고 조언했다고 한다. 또한 그는 "사회주의 국가들이 LA 올림픽 보이콧 이후 서울 대회에 참여하기를 원하고, 올 준비를 하고 있는데 단 한 가지 장애물이 북한"이라며 "그래서 한 가지 핑계를 찾고 있는데 만약 북한이 2∼3개 종목 개최를 수락하지 않으면 서울에 갈 구실이 되는 것이다." 라고 덧붙여서 설명했다.[[https://news.naver.com/main/ranking/read.nhn?mid=etc&sid1=111&rankingType=popular_day&oid=001&aid=0010730237&date=20190331&type=1&rankingSeq=4&rankingSectionId=100|참고#]]], 남측에는 [[에이즈]](AIDS·[[후천성면역결핍증]]) 환자가 60만 명에 달한다고 방해 선전을 하는 등 근거 없는 소문을 퍼뜨렸다.[[https://youtu.be/69BC8pD2KPg|#]] 이 당시만 하더라도 북한은 남한에 대해 "헐벗고 굶주리며 거리에서 사람들이 미제가 먹다 버린 것까지 주워 먹으려고 쓰레기통을 뒤지는 곳"이라는 거짓 비방을 서슴지 않았다. 게다가 북한도 올림픽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는 상황인지라 "헐벗고 굶주려 쓰레기통을 뒤진다는 나라에서 올림픽?" 이라 의문을 들 수 있어서 이런 발악을 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국에서 서울 올림픽을 유치하는데 성공하자 북한은 대신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을 개최하여 올림픽보다 더 규모가 컸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하였으나, 해당 대회를 무리하게 개최하여 [[북한의 80년대 3대 실정|바로 직후 떠안은 상황과 후폭풍]]은 상당히 크게 작용한다. 그리고 서울이 올림픽 유치에 성공한 이후 북한은 아주 과격한 행보를 보이게 된다. 특히 1986년에 열리는 [[서울 아시안 게임]]을 방해하고자 아랍계 테러리스트에게 [[김포국제공항 폭탄 테러]]를 사주하였고, 공항 청사 앞에서 폭탄이 터지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이 테러로 5명이 사망하고 32명이 부상당했으며,[* 이 사건을 계기로 서울 올림픽 때 공항 경찰이 비상사태에 들어가기에 이른다.] 또한 북한은 급기야 올림픽 [[보이콧]] 운동까지 시도하기에 이르는데. 앞에 나온 사례 정도는 사실 그냥 단순 애교 수준이었고, 그간 북한의 공작 활동들 중에서도 'KAL기 폭파 사건'으로도 널리 알려진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과 사실 그 이전이었던 1983년에 직접적으로 전두환 대통령을 암살하고자 시도했던 현재 미얀마인 과거 버마에서 발생했던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사건]]와 같은 가장 유명했던 사건들이 이에 포함된다.''' 이러한 북한과의 관계와 테러 위협을 이유로 소련과 인도에서 불거진 올림픽의 [[아테네]] 영구 개최설 등으로 잠시 올림픽 개최가 흔들리기도 했다. 특히 [[6.10 민주 항쟁]]의 와중에 한국의 정치적 혼란을 이유 삼아 [[로스앤젤레스|LA]]와 [[베를린]] 등에서 유치권을 가져오려는 시도가 있었다. 또한, 사마란치 IOC 위원장이 만약 한국에서 소요사태가 일어날 시에 올림픽 장소변경을 고려했을 정도로 이는 상당히 심각한 문제로 대두될 뻔했다. 이처럼 당시 한국의 심각했던 국내외적 상황은 IOC에서도 1988년은 어렵고 1996년으로 연기하자는 말도 나왔는데 당시 노태우가 IOC로 가서 문제없다는 연설을 하고[* 노태우는 이후 1988년 대통령 선거 당시 이걸 자랑하듯이 홍보 만화에서 큼직하게 다뤘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외교적으로 충분히 논란이 될 만한 발언을 남기기도 했다. 이를테면 노태우가 비장하게 가서 연설하길 "1988 올림픽이 서울에서 못 열리면 잠실종합경기장을 IOC 위원들 무덤으로 쓰겠다"고 연설했다.] 이후 [[6.29 선언]]으로 정치적 혼란이 수습되면서 예정대로 1988년 9월 서울에서 개최될 수 있었다. 또한 올림픽이 열리기 1년 전인 1987년에 발생한 [[6.10 민주 항쟁]]에서는 당시 [[명동성당]]에 민주화 시위대가 정부의 공권력을 피해 주둔해 있었는데 또한 당시 [[김수환]] [[추기경]]이 이러한 정부의 공권력 투입에 그 유명한 '''"내 뒤에는 신부, 수녀, 학생들이 있다. 군대가 들어오고 싶다면 가장 먼저 나를 밟고, 그 다음으로 신부들을 밟고, 그 다음으로는 수녀들을 밟은 후에야 학생들을 만나라."'''라는 강경한 저항을 하며 직접 맞선다. 이처럼 만약 정부가 이들을 무력으로 진압했다고 가정한다면 결국 서울 올림픽은 3번 연속으로 반쪽 올림픽이 될 뻔 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더군다나 이 올림픽은 전두환의 최대 역작이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았을 정도의 세계적으로 권위가 있는 대회 행사인데 만약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함으로써 자기가 불러온 복을 자기가 걷어차 버리는 상황이 될 뻔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리고 당시 특전사령관이었던 [[민병돈]] 중장은 정부의 군대 출동 명령에 대한 적극적인 거부 의사를 [[육군사관학교]] 동기였던 보안사령관 [[고명승]] 중장에게 밝히는데, 이처럼 군인 세력마저도 폭력 사태가 일어나 자국에서 처음 치뤄질 올림픽을 무위로 그르치는 행동은 피해야 한다는 움직임까지 일어났다. 이는 결국 특전사의 무력진압사태를 사전에 봉쇄하고 큰 사건과 사고 없이 이후 [[6.29 선언]]의 가장 결정적인 역할로서 작용했다. == 당대 이데올로기적 문제와 반등 == [[1976 몬트리올 올림픽]]은 [[남아프리카 공화국|남아공]]의 흑인 인종차별 문제로 아프리카 국가 26개국이 보이콧하였다.[* 당시 남아공은 [[아파르트헤이트]] 정책떄문에 국제스포츠계에선 이미 퇴출된 상태였다. 그런데 몬트리올 올림픽을 얼마 앞두고 뉴질랜드 럭비팀이 뜬금없이 남아공에 가서 친선경기를 하면서 문제가 터졌다. 격분한 아프리카 국가들은 뉴질랜드에 대한 제제를 요구했지만, IOC는 냉담하게 무시했고 결국 아프리카 26개국이 올림픽을 전면보이콧하게 된다.] 그 다음 [[1980 모스크바 올림픽]]에서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문제 삼아서 자본주의 진영의 서방권이 대거 불참하였다. 그리고 [[1984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은 모스크바 올림픽 불참에 대한 보복으로 이번에는 공산주의 진영의 동구권 대부분이 참여를 거부하였다. 이렇듯 국가간의 갈등으로 올림픽이 연달아 파행되는 와중에 다음번 개최지가 [[분단국가]]인 대한민국 서울로 정해지자, 이번에도 공산권의 불참으로 또다시 반쪽 대회가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었다. 일단 [[중국]]이 1984년 7월에 가장 먼저 참가를 선언했지만, 애당초 이 당시의 중국은 [[중소결렬|소련과 대립하면서]] 독자 노선을 걷고 있었기 때문에 공산권 전체에 별다른 영향은 없었다. 게다가 중국은 이미 [[1990 베이징 아시안 게임|1990년 아시안게임의 베이징 유치]] 및 이를 토대로 2000년 올림픽 유치를 노리고 있었기에 괜히 서울 올림픽에 불참해서 일을 그르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리고 [[1986 서울 아시안 게임]]의 경우 [[중국]]은 참가했으나 그 외의 소련과 관계가 돈독한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몽골]] 등의 아시아 공산주의 국가들이 죄다 불참했던 전례가 있었고, 비록 아시아 스포츠계에서 중국 한 나라의 위상이 워낙 크다 보니 딱히 다른 큰 문제가 없어 보일 수도 있겠지만 '''올림픽의 경우는 아시아만 국한된 대회가 아닌 그 이상의 국가와 의미를 포괄하는 대회이기 때문에''' 중국의 참가만으로는 공산권 전체의 참가에 대한 확신을 가지기는 힘든 상황이었다. 그러다가 1985년 3월 [[동유럽]]의 대표적인 공산주의 소련의 대표적인 위성국가였던 [[동독]]이 참가를 확언하면서 실마리가 풀릴 것으로 기대했으나 이는 사실 동독 내에서 과거 [[1984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을 보이콧했던 것을 두고 논란이 거셌던 것을 그저 무마하려는 목적으로[* [[동독]]뿐만 아니라 여러 공산권 국가의 경우 스포츠 대회에서의 좋은 성적을 토대로 국력도 과시하고 국민들을 단합시키는 효과를 노렸는데, 한편으로는 세계 스포츠 대회에 출전하면 사실상 해외를 자유롭게 다닐 수 있다는 점에서 관계자 및 선수들 또한 그 무대가 선망의 대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1984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 나가지 못한데 대한 스포츠계의 실망은 엄청났고, 동독 또한 예외는 아니었던 것.] [[소련]]과의 협의도 없이 발표된 상태였다는 것. 이에 결국 공산권의 참가 여부에 대한 최종 칼자루를 쥐고 있었던 것은 당연하게도 그들의 대표격이었던 소련이었다. 그러나 만약 이번에도 소련이 보이콧하게 될 경우 [[베트남]]이나 [[폴란드]] 등의 소련과 연관이 깊은 다른 공산 국가들 모두가 보이콧할 우려가 컸기 때문에 1987년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에 취임했던 [[김운용]]이 그것도 [[러시아어]]까지 배워가며[* 이때 김운용 위원의 나이는 50대였다. 물론 기존에 5개 국어를 유창하게 했을 정도로 언어적 감각이 탁월한 인물이었지만, 새로운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라는 사실. 또한 러시아어는 세계에서 어려운 언어 중 하나로 꼽힌다는 것도 감안해야 한다.] 당시 소련의 IOC 위원을 만나 집중적으로 그에게 올림픽에 참여해줄 것을 간곡하게 설득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에 부응하듯 비록 본래 이념이 첨예하게 반대되는 적성 국가였지만 소련 자국의 언어까지 배워가며 설득에 나선 김운용의 모습은 도리어 소련 위원들에게는 좋은 인상으로 다가왔고, 때마침 당시 소련은 개혁파인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집권한 상황이었던지라 마침내 1988년 초에는 '''소련의 참가가 확정되었고''' 이에 여러 공산 국가들도 올림픽 참여 의사에 동참할 것을 밝히면서 서울 올림픽은 총 160개 국가가 참가하는 역대 최대 규모임과 동시에 8년 만에 자본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이 함께 참가한 대회로 기록된다. 허나 소련을 포함한 여러 유럽의 동구권 공산권 국가의 참가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계속 올림픽 보이콧 의사를 굽히지 않자, 급기야 [[대한민국 정부|우리 정부]]는 [[인공기]] 게양과 [[애국가(북한)|북한 국가]] 연주 허용이라는 엄청난 제시를 내세우며 북한의 올림픽 참가를 종용했다.[* 지금이야 어느 정도 용인이 된다 쳐도,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와 정권의 반공 성향을 감안하면 대한민국에서 적성 집단(대한민국 헌법상 북한을 '국가'로 보지 않으므로 '적'''국''''이라고 보지도 않았으며 이는 지금도 유효하다.)으로 인식되는 북한의 [[인공기]]를 게양하고 또한 [[애국가(북한)|북한 국가]]를 연주하는 것은 그야말로 경천동지할 일. 물론 북한은 엄연한 IOC 회원국이었기 때문에 만약 참가했다면 인공기와 북한 국가 연주는 무조건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스포츠는 정치색을 배제해야 한다는 것은 신성한 의무와 다름이 없기 때문이며, 실제로 [[1966 FIFA 월드컵 잉글랜드]] 대회 당시 '''[[북한 축구 국가대표팀]]'''이 본선에 진출했을 때도 북한을 적성 국가로 간주해 수교 자체를 하지 않은 [[영국]]의 경기장에서 [[애국가(북한)|북한 국가]]가 연주되고 [[인공기|국기]]가 게양되었다. 물론 [[영국 정부]]가 당시 [[한국 정부]]에 양해를 구하긴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결국 참가하지 않았다.[* 그리고 대한민국 실효지배 영역인 [[남한]] 지역에서 인공기가 게양되고 북한 애국가가 연주된 것은 14년 뒤에 열린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때에야 이루어졌다. 그리고 12년 뒤 시드니 올림픽에서는, [[한반도기]]를 이용하여 동시에 입장하였고 30년 뒤인 [[2018년]] [[2018 평창 동계올림픽|평창동계올림픽]]에도 [[북한]]이 참가했으며 동시 입장 또한 성사되었다.] 또한 2018년에 공개된 외교문서에 따르면 당시 북한은 [[김영남]]이 이를 주도하여 동구권 공산주의 국가들에게 서울 올림픽에 대한 보이콧을 촉구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이와 반대로 북한은 같은 공산&사회주의 국가들에게 그저 냉담한 반응만을 전달받았다고 전해진다.[[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469&aid=0000289474|#]][* 당시 공산권의 중심인 [[소련]]은 1985년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집권하면서 개혁, 개방 노선을 걷고 있는 상황이었다. 비록 아프가니스탄 전쟁 등 미국과 소련 사이의 물밑 대결은 치열했지만, 공개적으로 1987년 중거리 미사일 감축에 대한 협정을 체결하는 둥 유례없이 분위기가 훈훈했다. 이런 데탕트 분위기에서 이념논쟁을 이유로 서울 올림픽을 보이콧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북한을 공산권 국가들이 곱게 봤을 리가 없다. 소련이 1988년에 들어서야 참가 선언을 선언했던 것도 나름 동맹국인 북한을 배려해서 시간을 끈 것이었다. 게다가 스포츠를 통한 국력 과시에 집착하던 소련과 동구권 입장에선 LA에 이어서 2회 연속으로 불참한다는 것은 국내외적으로 부담스러웠던 것도 사실이다. 즉 LA와 서울의 개최 순서가 뒤바뀌었다면 반쪽 대회는 LA가 아닌 서울 대회였을 수도 있었다. 물론 LA는 제1세계로 대변되는 명백한 서방 진영과 자본주의 국가의 수장이자 소련의 최대 적국인 미국이고 서울 올림픽이 개최된 한국은 당시 기준으로 1세계에 속한 아시아 개도국 중 하나에 불과한 위상이기에 소련의 참가 여부가 국제 사회에서 큰 파급력을 가져올 수밖에 없음은 감안해야 한다.][* 이후 북한은 올림픽에 참가한 소련과 중국을 향해 배신자라 욕하면서 '우리 식대로 살자'란 운동을 펼치기에 이른다.] == 유치지 선정 및 과정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