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1 '''{{{#fff 1934년 프랑스 폭동}}}'''}}}[br]'''[[프랑스어|{{{#fff Crise du 6 février 1934}}}]][br][[영어|{{{#fff 6 February 1934 Crisis | Veterans' Riot}}}]]'''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934프랑스폭동.jpg|width=100%]] {{{-2 }}}}}} || ||<-2> 1934년 폭동 당시의 [[콩코르드역|콩코르드 광장]] || ||<-2> '''{{{#fff 일시}}}''' || ||<-2> [[1934년]] [[2월 6일]] || ||<-2> '''{{{#fff 장소}}}''' || ||<-2> [[프랑스 제3공화국|{{{#!wiki style="display: inline-flex; width: @크기=27@px; padding: 1px; background: rgba(25, 25, 25, .2); vertical-align: middle"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width=100%]]}}}]] [[프랑스 제3공화국]] [[파리(프랑스)|파리]] || ||<-2> '''{{{#fff 원인}}}''' || ||<-2> 스타비스키 사건[br]경찰총장 [[https://en.wikipedia.org/wiki/Jean_Chiappe|장 키아프]] 해임 || ||<-2> '''{{{#fff 교전국 및 교전 세력}}}''' || || '''[[프랑스 파시즘|프랑스 극우 단체들]]''' ||<^|1>[[프랑스 제3공화국|{{{#!wiki style="display: inline-flex; width: @크기=27@px; padding: 1px; background: rgba(25, 25, 25, .2); vertical-align: middle"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width=100%]]}}}]] '''[[프랑스 제3공화국]]''' || ||<-2> '''{{{#fff 지휘관}}}''' || ||<^|1>[[파일:프랑스 제2제국 황제기.svg|width=23]] [[https://en.wikipedia.org/wiki/Louis,_Prince_Napol%C3%A9on|나폴레옹 6세]][br][[파일:Croix_de_Feu.svg|width=23]] [[프랑수아 드 라 로크]][br][[샤를 모라스]][br][[https://en.wikipedia.org/wiki/Pierre_Taittinger|피에르 태탱제]][br][[마르셀 뷔카르]]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width=23]] [[알베르 르브룅]][br][[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width=23]] [[에두아르 달라디에]] || ||<-2> '''{{{#fff 피해}}}''' || ||<-2> 15명 사망, 2,000여명 부상 || ||<-2> '''{{{#fff 결과}}}''' || ||<-2> [[에두아르 달라디에]] 사임[br]프랑스 제3공화국의 정치 대립 격화 || [목차] [clearfix] == 개요 == [[1934년]] [[2월 6일]], [[프랑스 제3공화국]] [[파리(프랑스)|파리]]의 콩코르드 광장을 중심으로 일어난 [[반민주주의|반(反)민주주의]] [[폭동]]. [[전간기]] 프랑스 제3공화국의 혼란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 중 하나이다. 폭동에 참가한 극우 단체들에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용사들이 몸담고 참여했다는 점에 "참전용사들의 폭동"이라는 이름이 쓰이기도 한다. 악시옹 프랑세즈, [[불의 십자단]]을 비롯한 프랑스의 [[극우]] 단체들을 주축으로 된 시위가 폭력사태로 번지며 일어났으나 사건의 본질에 대해서는 이견이 갈리는 편이다. 일부, 특히 좌익 성향의 인물들은 해당 사건을 프랑스에서 시도된 [[파시스트]] [[쿠데타]] 시도였다고 평하는 반면 조엘 콜튼[* 미국의 저술가]이나 르네 레몽과[* 파시즘을 연구한 역사학자] 같은 사학자들은 시위대는 정권을 탈취할 목적이 있었다고 보기에는 어려울 정도로 조직성, 단결이나 지도부가 부재했다고 평가한다. == 상세 == === 배경 === 프랑스에 [[대공황]]으로부터의 영향은 [[1931년]] 경부터 두드러지는데, [[바이마르 공화국]]이나 [[폴란드 제2공화국]]만큼은 아니어도 대공황으로 인한 공화정 지지 중산층이 대거 몰락하면서 정치혼란이 심화되고 프랑스 내 반민주주의 세력들([[프랑스 공산당]], 프랑스 극우파)은 이를 이용해 세력을 대거 확장한다. 동시기에 일어난 다수의 정치/금융 사건사고들은 프랑스의 정치 혼란을 더욱 심화시키고 반민주주의 세력들의 성장을 불러왔다. 1928년에는 본인 소유 언론사를 이용해 친우들의 [[페이퍼 컴퍼니]]들로의 투자를 종용한 유대계 프랑스인 사기범 마르테 아나우(Marthe Hanau)가 체포되고 1932년 재판받았으며 1930년에는 그룹 산하 회사들로 그룹의 다른 회사들의 주식을 구매하는 [[주가조작]]을 한 기업가 알베르 우스트릭이 체포되고 회사는 도산한다. 이러던 와중 1933년, 스타비스키 사건이 발발한다. 1933년 12월, 러시아 출생의 폴란드계 유대인 [[https://en.wikipedia.org/wiki/Alexandre_Stavisky|세르지 스타비스키]](Serge Alexandre Stavisky)가 프랑스 서남부의 소도시 바욘에서 거짓말과 속임수로 많은 정재계 인사들 사이에서 거액의 뇌물을 수수하고, 그것으로 불량 채권을 발행하도록 하여 거액의 돈을 갈취한 사건. 당시 [[급진당]] 내각의 알베르 다리미에 사법장관을 비롯한 많은 정계 인사들의 연루가 공개되어 정계 부패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제기된다. 급진당 내각이 대처로 한 첫 활동은 당시 파리 경시총감 장 키아프(Jean Baptiste Pascal Eugène Chiappe)의 해임이었는데, 사유는 스타비스키의 도피를 도와준 것이었지만 장 키아프는 오랫동안 파리에서의 시위들에서 의도적으로 우파 시위대를 감싸고 좌파 시위대들을 편향적으로 처벌했다는 비판을 받던 인물이라 우파 계열에서는 급진당 내각이 당 사건을 명분으로 키아프를 제거한다 의심, 행동에 나선다. === 전개 === 극우 단체들과 우파동맹의 시위는 기존에도 산발적으로 이뤄져 왔고 스타비스키 사건에 관련한 시위도 1934년 1월부터 계속해온 상황이었다. 1934년 2월 6일, 파리 전역에서 시위하던 극우 단체들과 우파동맹은 [[프랑스 국민의회]] 건물인 부르봉 건물 앞인 콩코르드 광장에 집결하기 시작하며 파리 경찰은 콩코르드 광장 앞 콩코르드 다리에서 콩코르드 광장으로의 시위대 집결을 저지하기 시작한다. 시위대는 저지하는 경찰들에게 돌 등을 던지며 공격해고, 시위대 일부의 무장 상태가 확인되자 시위대에 발포한다. 충돌은 수 시간동안 지속되어 새벽 2시가 넘어서야 완전히 잠잠해진다. 강 이서에서 넘어와 콩코르드 광장에서 충돌한 시위대는 극우파가 주축이었으나 강 이동에서 콩코르드 광장으로 집결하던 이들은 우파이며 급진당 정부를 불신하되 공화정은 지지하였고 강 이동에서의 시위대는 별다른 충돌 없이 해산한다. 또한 이 충돌 자체에도 당시 시위에 참여한 단체들 중 악시옹 프랑세즈는 콩코르드 다리에서 적극적으로 경찰과 충돌한 반면 [[불의 십자단]]은 질서를 주문한 [[프랑수아 드 라 로크]]의 명으로 경찰과 시위대의 충돌에서 물러서며[* 라 로크와 불의 십자단 단원들 중 라 로크를 따르는 이들에 한정되었다고 역사학자 세르게이 베른슈타인은 반박한다.] 이는 악시옹 프랑세즈 단원들이 이 폭동의 시위대 사망/부상자 다수를 점한다는 것이 뒷받힘한다. === 영향 === 폭동의 밤, [[에두아르 달라디에]] 총리는 공공질서 수복에 관한 명령을 내리며 비상사태 선언도 고려하나 실제로 선언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다음날 자당 의원들과 법무부, 경찰이 달라디에의 사건 후속대책 집행을 거부하면서 달라디에는 사임을 결정, [[2월 9일]]날 이뤄진다. 이는 프랑스 제3공화국 사상 최초로 총리가 직접적으로 시위에 의해 사임한 사태였다. 그 결과 후임 총리로는 과거 대통령이었던 [[가스통 두메르그]]가 정해지며 우파와 중도파를 아우르는 '국민통합정부'를 표방,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성향의 정당들을 제외한 모든 원내정당의 참여가 들어간 내각을 형성한다. 폭동 후 프랑스 좌익은 2월 6일의 사태를 파시스트에 의한 쿠데타 시도로 확신하였으며 의사표명에 나선다. 달라디에가 사임하던 2월 9일, 프랑스 좌익 또한 시위에 나서고 여기서 경찰과의 충돌로 9명이 사망한다. 그 후 2월 12일, CGT는 1일 총파업을 결의한다. 본 사건으로 파시스트 쿠데타에 대한 위협을 느낀 프랑스 좌익들은 다수의 반파시스트 단체들을 만든다. 한편 우익 세력에서도 본 사태로 우경화와 극우화가 일어난다. 본 사태의 대처에서 상당수의 우익 인사들은 민주주의에 환멸을 느껴 극우로 전향하며 전간기 프랑스의 정치 분쟁의 격화에 이바지하게 된다. == 관련 문서 == * [[보너스 군대]] * [[불의 십자단]] * [[프랑스 파시즘]] * [[프랑스 제3공화국]] [[분류:폭동]][[분류:프랑스의 사건사고]][[분류:1934년/사건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