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FIFA 월드컵)] ----- ||<-3> {{{+4 '''{{{#ffffff 1930 FIFA 월드컵 우루과이}}}'''}}} || ||<-3> {{{#080202,#e5e5e5 '''{{{#df6911 1er}}} Campeonato Mundial de Fútbol'''[br]'''1930 FIFA World Cup Uruguay™'''}}} || ||<-3> [[파일:1930 FIFA World Cup Uruguay Poster.png|width=100%]] || || {{{#ffffff '''대회 기간'''}}} ||<-2> [[1930년]] [[7월 13일]] ~ [[1930년]] [[7월 30일]] || || {{{#ffffff '''개최국'''}}} ||<-2> [include(틀:국기, 국명=우루과이)] || || {{{#ffffff '''공인구'''}}} ||<-2> T-모델 (T-Model) || || {{{#ffffff '''본선 진출팀'''}}} ||<-2> 13개팀 || ||<-3> {{{#ffffff ''' {{{+1 대회 결과 }}} ''' }}} || || {{{#ffffff '''우승'''}}} ||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우루과이]][br]{{{-1 (1번째 우승)}}} ||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파일:Uruguay AUF 1930.png|height=35]]]] || || {{{#ffffff '''준우승'''}}} ||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아르헨티나]] ||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파일:Argentina AFA 1930 1934.png|height=35]]]] || ||<|2> {{{#ffffff '''4강'''}}}[* 이 대회는 3위·4위전이 없었고 4강전에서 탈락하면 대회를 마쳤다.] || [[미국 축구 국가대표팀|미국]] || [[미국 축구 국가대표팀|[[파일:USA USSF 1930 1934.png|height=35]]]] || || [[세르비아 축구 국가대표팀|유고슬라비아]] || [[세르비아 축구 국가대표팀|[[파일:Yugoslavia FSJ 1930.png|height=35]]]] || ||<-3> {{{#ffffff ''' {{{+1 수상 }}} ''' }}} || || {{{#ffffff ''' 득점왕 ''' }}} ||<-2>[include(틀:국기, 국명=아르헨티나, 출력=, 크기=30)] [[기예르모 스타빌레]] || ||<-3> {{{#ffffff ''' {{{+1 이전·이후 대회 }}} ''' }}} || || 대회 창설 이전 || {{{#fff ''' 1930년[br]우루과이 ''' }}} || [[1934 FIFA 월드컵 이탈리아|1934년[br]이탈리아]] || [목차] [clearfix] == 개요 == [[1930년]] [[우루과이]]에서 개최된 역사상 '''첫 번째 [[FIFA 월드컵]].''' 개최국 대표팀인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우루과이 대표팀]]이 초대 우승팀으로 등극했다. [[파일:external/ncc.phinf.naver.net/uruguay.jpg|width=600]] 이 월드컵의 홈팀이자 우승팀인 당시의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우루과이 대표팀]]은 [[최종 보스|아주 초강력한 팀]]이였다. 이 당시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우루과이]]의 [[라이벌]]은 남미에서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아르헨티나]]밖에 없을 정도였다.[* 당시는 남미와 유럽, 그 다음 북중미는 다른 세계나 마찬가지였고, 올림픽이나 투어 경기 정도를 제외하면 타 대륙과의 시합은 거의 없었다. 전세계로 범위를 넓히면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우루과이]] 또는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아르헨티나]]와 최고의 흥행 카드를 만들 수 있는 팀은 [[헝가리 축구 국가대표팀|헝가리]]와 축구 종주국 [[스코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스코틀랜드]](1920년대까지만 해도 잉글랜드보다 강했다.),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잉글랜드]]였다. 하지만 잉글랜드와 우루과이는 1930년대의 쟁쟁한 선수들이 모두 그라운드를 떠난 후인 1953년에야 첫 시합을 가졌다.] 월드컵이 생기기 전 축구 최고의 무대는 [[올림픽]]이었는데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우루과이]]는 [[1924 파리 올림픽|1924년]]과 [[1928 암스테르담 올림픽|1928년]] 두 대회를 [[연속우승|연패]]했었고,[* 그래서 우루과이 대표팀 엠블럼에는 우승별이 4개가 표시되어 있다. FIFA도 인정한 부분이다.] 그 주축 멤버들이 대부분 [[FIFA 월드컵|월드컵]]에 나갔다. 그 주축 멤버들을 간략히 설명하자면 80년 가까이 우루과이 A매치 최다 득점기록을 가지고 있던 [[엑토르 스카로네]], 중원의 살림꾼이자 흑진주 [[호세 안드라데]], 그리고 우루과이의 수비의 핵. 우루과이, 그를 넘어 역대 최고급의 [[주장]]이자 첫 월드컵 우승 주장인 [[호세 나사치]] 등이 모두 올림픽 2연패의 멤버들이다. 1930년에 개최된 첫 번째 [[FIFA 월드컵]]으로, 지금의 월드컵과 비교해 보면 전반적으로 미흡한 부분이 많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 월드컵'''이라는 상징성으로 인하여 어느 월드컵 보다도 부가가치가 높은 월드컵이 되었다. == 지역예선 == [include(틀:역대 FIFA 월드컵/지역예선)] || [[파일:external/ncc.phinf.naver.net/2.jpg|width=100%]] || [[파일:우루과이 월드컵 기사.jpg|width=100%]] || || FIFA 월드컵의 창시자 [[쥘 리메]] || 당시 신문에 실린 기사 이미지[* 사진을 보면 [[불가리아]] 국기가 있는 포스터가 보이는데, 불가리아가 초청장을 받고 참가하려다 모종의 이유로 참가를 포기해 무산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 ---- 이 대회는 첫 월드컵이라서 홍보 차원에서 지원하는 모든 팀들에게 지역예선 없이 전부 본선에 진출하도록 했다. 그러나 남미에서 개최된다고 했기 때문에 [[잉글랜드]]를 필두로 한 유럽의 보수세력들은 자신들은 이미 세계 최강이라는 착각과 오만함으로[* 그러다가 1950월드컵에서 잉글랜드는 미국에게 0:1로 참패당한다.] 월드컵을 아예 저질대회로 취급하면서 불참을 유도했고[* 게다가 줄 리메는 프랑스인이고 결국 [[프랑스]]의 주도로 인해 월드컵이 개최된 것이었기 때문에 프랑스를 증오하던 [[잉글랜드]]는 더더욱 월드컵에 참가하고 싶지가 않았을 것이다. 우습게도 피파 창립에 기여한 것도 프랑스인이었고, 유러피언 컵 대회 역시 프랑스에서 주축이 되었다. 알다시피 잉글랜드에선 유러피언컵 대회도 나갈 값어치도 없다고 초기에 불참했다. 참고로 근대 [[올림픽]]도 프랑스인 쿠베르탱이 만들었다.] 이에 [[독일]], [[이탈리아]] 등의 국가들이 말려들어 유럽의 대다수 국가가 불참했으나, 당시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 패전 및 세계대공황으로 인해 심각한 경제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먹고 살기도 바쁜 와중에 축구, 스포츠에 신경 쓸 겨를도 없었고 또 1930년 당시엔 비행기가 아직 발달이 되지 않아서 유럽에서 남미까지 갈 만한 수준이 못 되었으므로 오직 여객선만이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다. 개최국인 우루과이에서 유럽 국가들을 위해 호화 여객선을 구입하고 체제 경비까지 모두 부담하겠다고 했지만 결국 독일은 이 대회에 불참했다. 그나마 쥘 리메의 조국인 [[프랑스]]와, 프랑스의 간청으로 참가해준 [[벨기에]],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 등이 참가했다. 말 그대로 쥘 리메는 유럽 각국을 돌며 제발 [[FIFA 월드컵|월드컵]]에 참가해달라고 부탁했다. 즉, 시간과 경제적으로 1930년 당시 열악했던 교통비용도 감당하기 어려운 국가들과 식민지 지배국가, 세계에서 알려지지 않은 국가들은 진출하기 어려웠던 시절로 현재도 월드컵에 한 번 진출하는 것과 우승하는 것이 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격세지감. 실제로 참가신청 마감 데드라인인 1930년 2월 28일까지, 본래 대회가 목표로 정한 16개국 본선 진출 정원이 채워지지 않아 대회는 13개국이 본선에 진출로 치뤄지게 되었다.[* 당시 FIFA는 남은 자리를 채우기 위해 아시아의 [[일본]]과 시암(현 [[태국]]), 아프리카의 [[이집트]]에도 초정장을 보냈으나, 일본과 시암이 거절, 이집트는 배편을 놓쳐! 불참했다.] 심지어 1930년 1월까지도 유럽 참가국은 1개도 없었으니 FIFA 회장 [[쥘 리메]]가 저렇게 간곡하게 나설만도 했다. 특히 루마니아 팀을 섭외할 때는 선수들이 대회에 참가한 사이 선수들의 생업이 유지되지 못할 것을 우려하며 루마니아 선수들이 참가를 하지 않으려 하자, 당시 루마니아 국왕인 [[카롤 2세]]가 직접 나서 선수들의 생업을 지켜줄 것을 약속해서야 겨우 참가 신청을 받을 수 있었다. 프랑스는 FIFA 회장의 조국이니 참가는 했는데, 당시 프랑스 축구 최고의 스타 선수인 [[마누엘 아나톨]]이 참가를 거부하는 등 정상적인 전력이 아니었고, 벨기에 또한 FIFA 부회장이 벨기에 사람이어서 참가는 했지만 역시 최소 규모의 선수단만 꾸리며 구색만 맞췄다. 유일하게 유고슬라비아만이 진지하게 대회에 참가해 좋은 성적을 거두게 된다. == 본선 진출팀 == || {{{#df6911 '''대륙'''}}} ||<-2> {{{#df6911 '''국가'''}}} ||<-2> {{{#df6911 '''[[1928 암스테르담 올림픽/축구|1928 올림픽]] 성적'''}}}[* 월드컵이 생기기 전 올림픽 축구는 사실상의 세계 챔피언을 가리는 유일한 대회였기에 비교 자료로써 여기에 기재한다.] || || {{{#df6911 '''개최국''' }}} || [[파일:우루과이 국기.svg|width=25]] || 우루과이 || {{{#ffd700 '''금메달'''}}} || 5전 4승 1무 | 12득점 5실점 || ||<|6> {{{#df6911 남아메리카 }}} || [[파일:아르헨티나 국기.svg|width=25]] || 아르헨티나 || {{{#c0c0c0 '''은메달'''}}} || 5전 3승 1무 1패 | 25득점 7실점 || || [[파일:브라질 국기(1889-1960).svg|width=25]] || 브라질 || 불참 || - || || [[파일:칠레 국기.svg|width=25]] || 칠레 || 예비라운드 || 1전 1패 | 2득점 4실점 || || [[파일:페루 국기(1884–1950).png|width=25]] || 페루 || 불참 || - || || [[파일:볼리비아 국기.svg|width=25]] || 볼리비아 || 불참 || - || || [[파일:파라과이 국기.svg|width=25]] || 파라과이 || 불참 || - || ||<|2> {{{#df6911 북아메리카 }}} ||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width=25]] || 미국 || 1라운드 || 1전 1패 | 2득점 11실점 || || [[파일:멕시코 국기(1916-1934).svg.png|width=25]] || 멕시코 || 1라운드 || 1전 1패 | 1득점 7실점 || ||<|4> {{{#df6911 유럽 }}} ||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width=25]] || 프랑스 || 1라운드 || 1전 1패 | 3득점 4실점 || || [[파일:벨기에 국기.svg|width=25]] || 벨기에 || 8강 || 2전 1승 1패 | 8득점 9실점 || || [[파일:루마니아 국기.svg|width=25]] || 루마니아 || 불참 || - || || [[파일:유고슬라비아 왕국 국기.svg|width=25]] || 유고슬라비아 || 1라운드 || 1전 1패 | 1득점 2실점 || * [[쥘 리메]]가 갖은 노력 끝에 유럽 팀들을 섭외했지만 2년 전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딴 이탈리아나 8강에 올라간 독일, 스페인 등 기존의 유럽 강호들은 1차 세계 대전 패전 및 경제 대공황으로 우루과이까지 갈 만한 돈 경비문제도 포함되어 끝내 참가하지 않았으나, 그럼에도 진출국들 모두 유럽, 남미, 북중미로 축구 강팀 대륙들만 모였다. * 우루과이가 속한 남미 대륙에서는 당시 FIFA 회원국이 아니었던 콜롬비아, 베네수엘라와 불참한 에콰도르를 제외하고 7개국이 참가했다. 2년 전 올림픽 금메달과 은메달 팀인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는 강력한 우승후보로 점쳐졌다. == 대회 포스터·마스코트·공인구 == || [[파일:1930 FIFA World Cup Uruguay Poster.png|width=100%]] || || 첫 월드컵의 포스터.[* 이 당시 월드컵의 공식 명칭은 '[[FIFA 월드컵]]'이 아니라 '쥘리메 배 세계 축구 선수권대회'였다. 포스터의 디자인은 우루과이의 화가이자 조각가인 기예르모 라보르데가 제작했다.] || 당시 마스코트나 [[FIFA 월드컵/공인구|공인구]]는 정해진 것이 없었으나 사실상 [[http://football-balls.com/ball-details/t-model-official-match-ball-of-world-cup-1930-in-uruguay|T-model]]라는 축구공이 공인구로 인정받고있다. === 우여곡절 === 당시 [[우루과이]] 정부에서 선수들의 체류비용과 교통비 등 부대비용을 모두 지급하겠다고 해서 일단 [[우루과이]]가 개최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긴 했으나... 민간 항공이 개척되지 않아 세계적으로 열악했던 당시에 유럽에서 남아메리카까지는 배편으로 몇 주일에서 달포가 걸리는 대장정이었다. 그 먼 거리를 항해해야만 한다는 것과 선수들이 클럽에서 장기간 차출돼야 한다는 부담 때문에 많은 유럽의 나라들이 불참했다는 점이다.[* 실제로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프랑스 대표팀]]도 [[대서양]]을 건너는데 열세 밤이 지나서야 간신히 우루과이에 도착했고, 불참한 유럽팀들도 표면적인 사유는 대개 '장거리 항해 불가'였다. 당시는 8강전이 없었지만, [[세르비아 축구 국가대표팀|유고슬라비아]]를 제외한 모든 유럽팀들이 4강 진출에 실패한 것으로 미루어보면 결과론적으로는 옳은 선택이었다고도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상술했듯 이 당시는 지금 21세기 인프라와 다르게 항공편 등의 교통수단이 매우 미비했던 때라서 홈 어드밴티지는 그야말로 절대적이었다. 이후의 모든 월드컵에서도 남미 지역에서 열린 대회는 모두 남미 대륙에서 우승 팀이 나왔고,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 대회에 가서야 독일이 4강전에서 [[미네이랑의 비극|브라질을 대파]]하고 결승에 올라 접전 끝에 아르헨티나를 꺾고 우승컵을 들어올림으로써 징크스가 깨진다.] 결국 쥘 리메와 우루과이 정부가 앞장서서 유럽 국가들을 설득시킨 끝에 유럽팀 전원불참은 간신히 모면했다. 심지어 [[루마니아]]에서는 왕이 직접 선수들의 직장과 접촉해서 그들이 귀국한 후에도 계속 종사할 수 있게 보장해 줄 것을 부탁하기도 했다. 유럽도 이 정도인데, 남아메리카와의 거리가 훨씬 먼 아시아 국가들은 독립국이라고 해도 참가하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 또한 [[FIFA 월드컵/공인구|공인구]]가 정해지지 않아 각국 대표팀들끼리 서로 자국의 공을 사용하겠다고 난리를 쳤다. 특히 결승전이 가장 극심했는데 그래서 전반전에는 아르헨티나제 축구공을, 후반전에는 우루과이제 축구공을 사용하기로 합의를 보게 된다. 그래서 그런지 전반에는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아르헨티나]]가 2대1로 이긴 채로 끝났지만, 후반전은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우루과이]]가 3골을 넣어 2대4로 우루과이의 역전승으로 끝난다. == 조 편성[*13개팀] == ||<:> {{{#df6911 '''순번'''}}} ||<:> {{{#df6911 '''1조'''}}} ||<:> {{{#df6911 '''2조'''}}} ||<:> {{{#df6911 '''3조'''}}} ||<:> {{{#df6911 '''4조'''}}} || ||<:> {{{#df6911 '''시드국'''}}} ||<:> '''아르헨티나''' || 브라질 || '''우루과이 (개최국)''' || '''미국''' || ||<:> {{{#df6911 '''2'''}}} || 프랑스 || '''유고슬라비아''' || 루마니아 || 벨기에 || ||<:> {{{#df6911 '''3'''}}} || 칠레 || 볼리비아 || 페루 || 파라과이 || ||<:> {{{#df6911 '''4'''}}} || 멕시코 || - || - || - || 진하게 표시된 국가는 4강 진출국. 순서는 조별 리그 순위. 13개국이 본선에 진출한 관계로 1조만 4팀으로 구성되며 나머지 2, 3, 4조는 3팀이 배정되었다. 우루과이, 아르헨티나, 브라질, 미국이 시드배정을 받았다. == [[1930 FIFA 월드컵 우루과이/선수단|선수단]]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1930 FIFA 월드컵 우루과이/선수단)] == 대회 진행 == 현재는 개최국이 개막전을 하는 것이 원칙이긴 하지만[* [[2006 FIFA 월드컵 독일|2006년 독일 월드컵]] 이전에는 전 대회 우승국이 개막전을 치렀다.] 우루과이 월드컵 조직위원회는 [[쥘 리메]]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개막전을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우루과이]]의 첫 경기인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우루과이]] 대 [[페루 축구 국가대표팀|페루]] 대신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프랑스]] 대 [[멕시코 축구 국가대표팀|멕시코]]로 정했다.[* 참고로 [[쥘 리메]] 회장의 국적은 프랑스였다.] 그런데 원래 16개 팀 이상 초청해서 대회를 개최하려 했으나 남미의 팀까지 다 합쳐도 13개팀이 본선에 진출하였고 8강전 없이 조별리그 직후 준결승을 치루는 형국이 되었다. 이 대회에서 역대 월드컵 최소 관중 경기가 나왔으니... 바로 조별리그 [[페루 축구 국가대표팀|페루]] 대 [[루마니아 축구 국가대표팀|루마니아]]의 경기 이다. 이 경기에서 관중의 수는 불과 300명에 지나지 않아 역대 월드컵 역사상 최소 관중 경기가 되었다.[* 피파의 공식 보고서에는 2549명이 왔다고 되어있기는 하다만 대부분의 다른 자료들에는 이 경기에 300명이 왔다고 기록되어 있고, 10년전의 피파 보고서에도 역시 300명이 왔다고 써 있었다. 이 경기가 열렸던 [[에스타디오 포시토스]]가 수용인원 천 명 정도의 미니구장이었던 것도 한 몫했다.] === 조별 리그 === ==== 1조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1930 FIFA 월드컵 우루과이/조별리그 1조)] || '''{{{#df6911 순위}}}''' ||<-2> '''{{{#df6911 팀명}}}''' || '''{{{#df6911 승}}}''' || '''{{{#df6911 무}}}''' || '''{{{#df6911 패}}}''' || '''{{{#df6911 득점}}}''' || '''{{{#df6911 실점}}}''' || '''{{{#df6911 득실차}}}''' || '''{{{#df6911 승점}}}''' || || '''1''' || [[파일:아르헨티나 국기.svg|width=30]] || 아르헨티나 || 3 || 0 || 0 || 10 || 4 || +6 || 6 || || '''2''' || [[파일:칠레 국기.svg|width=30]] || 칠레 || 2 || 0 || 1 || 5 || 3 || +2 || 4 || || '''3''' ||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width=30]] || 프랑스 || 1 || 0 || 2 || 4 || 3 || +1 || 2 || || '''4''' || [[파일:멕시코 국기(1916-1934).svg.png|width=30]] || 멕시코 || 0 || 0 || 3 || 4 || 13 || -9 || 0 || ||<-11><:>{{{#8E8 '''■'''}}} 준결승전 진출 | {{{#FBB '''■'''}}} 탈락|| ==== 2조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1930 FIFA 월드컵 우루과이/조별리그 2조)] || '''{{{#df6911 순위}}}''' ||<-2> '''{{{#df6911 팀명}}}''' || '''{{{#df6911 승}}}''' || '''{{{#df6911 무}}}''' || '''{{{#df6911 패}}}''' || '''{{{#df6911 득점}}}''' || '''{{{#df6911 실점}}}''' || '''{{{#df6911 득실차}}}''' || '''{{{#df6911 승점}}}''' || || '''1''' || [[파일:유고슬라비아 왕국 국기.svg|width=30]] || 유고슬라비아 || 2 || 0 || 0 || 6 || 1 || +5 || 4 || || '''2''' || [[파일:브라질 국기(1889-1960).svg|width=30]] || 브라질 || 1 || 0 || 1 || 5 || 2 || +3 || 2 || || '''3''' || [[파일:볼리비아 국기.svg|width=30]] || 볼리비아 || 0 || 0 || 2 || 0 || 8 || -8 || 0 || ||<-11><:>{{{#8E8 '''■'''}}} 준결승전 진출 | {{{#FBB '''■'''}}} 탈락|| ==== 3조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1930 FIFA 월드컵 우루과이/조별리그 3조)] || '''{{{#df6911 순위}}}''' ||<-2> '''{{{#df6911 팀명}}}''' || '''{{{#df6911 승}}}''' || '''{{{#df6911 무}}}''' || '''{{{#df6911 패}}}''' || '''{{{#df6911 득점}}}''' || '''{{{#df6911 실점}}}''' || '''{{{#df6911 득실차}}}''' || '''{{{#df6911 승점}}}''' || || '''1''' || [[파일:우루과이 국기.svg|width=30]] || 우루과이 || 2 || 0 || 0 || 5 || 0 || +5 || 4 || || '''2''' || [[파일:루마니아 국기.svg|width=30]] || 루마니아 || 1 || 0 || 1 || 3 || 5 || -2 || 2 || || '''3''' || [[파일:페루 국기.svg|width=30]] || 페루 || 0 || 0 || 2 || 1 || 4 || -3 || 0 || ||<-11><:>{{{#8E8 '''■'''}}} 준결승전 진출 | {{{#FBB '''■'''}}} 탈락|| ==== 4조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1930 FIFA 월드컵 우루과이/조별리그 4조)] || '''{{{#df6911 순위}}}''' ||<-2> '''{{{#df6911 팀명}}}''' || '''{{{#df6911 승}}}''' || '''{{{#df6911 무}}}''' || '''{{{#df6911 패}}}''' || '''{{{#df6911 득점}}}''' || '''{{{#df6911 실점}}}''' || '''{{{#df6911 득실차}}}''' || '''{{{#df6911 승점}}}''' || || '''1''' ||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width=30]] || 미국 || 2 || 0 || 0 || 6 || 0 || +6 || 4 || || '''2''' || [[파일:파라과이 국기.svg|width=30]] || 파라과이 || 1 || 0 || 1 || 1 || 3 || -2 || 2 || || '''3''' || [[파일:벨기에 국기.svg|width=30]] || 벨기에 || 0 || 0 || 2 || 0 || 4 || -4 || 0 || ||<-11><:>{{{#8E8 '''■'''}}} 준결승전 진출 | {{{#FBB '''■'''}}} 탈락|| === 결선 토너먼트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1930 FIFA 월드컵 우루과이/결선 토너먼트)] ||
경기 || 대진표 || 경기 || 대진표 || || A || [[1930 FIFA 월드컵 우루과이/4강, 결승#s-1.1|4강 1경기]][br]'''[[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아르헨티나]]''' 6:1 [[미국 축구 국가대표팀|미국]] ||<|3> C ||<|3> [[1930 FIFA 월드컵 우루과이/4강, 결승#s-2.1|결승]][br][[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아르헨티나]] 2:4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우루과이]]''' || || B || [[1930 FIFA 월드컵 우루과이/4강, 결승#s-1.2|4강 2경기]][br][[세르비아 축구 국가대표팀|유고슬라비아]] 1:6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우루과이]]''' || === 우승 === ||
'''{{{+2 {{{#000 1930 FIFA 월드컵 우승}}}}}}'''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Uruguay AUF 1930.png|width=200]]}}} || ||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000,#e5e5e5 '''우루과이'''}}}]]''' || || 첫 번째 우승[br]★ || == 최종 순위 == || 순위 || 국가 || 경기 || 승 || 무 || 패 || 득 || 실 || 득실 || 승점 || 비고 || || [[파일:트위터 금메달 이모지.svg|width=25]] ||[[파일:우루과이 국기.svg|width=25]]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우루과이]] || 4 || 4 || 0 || 0 || 15 || 3 || +12 || '''8''' || '''우승''' || || [[파일:트위터 은메달 이모지.svg|width=25]] ||[[파일:아르헨티나 국기.svg|width=25]]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아르헨티나]] || 5 || 4 || 0 || 1 || 18 || 9 || +9 || '''8''' || 준우승 || || 3 ||[[파일:미국 국기.svg|width=25]] [[미국 축구 국가대표팀|미국]] || 3 || 2 || 0 || 1 || 7 || 6 || +1 || '''4''' || 4강 || || 4 ||[[파일:유고슬라비아 왕국 국기.svg|width=25]] [[유고슬라비아 축구 국가대표팀|유고슬라비아]] || 3 || 2 || 0 || 1 || 7 || 7 || 0 || '''4''' || 4강 || || 5 ||[[파일:칠레 국기.svg|width=25]] [[칠레 축구 국가대표팀|칠레]] || 3 || 2 || 0 || 1 || 5 || 3 || +2 || '''4''' || 조별 리그 || || 6 ||[[파일:브라질 국기(1889-1960).svg|width=25]]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브라질]] || 2 || 1 || 0 || 1 || 5 || 2 || +3 || '''2''' || 조별 리그 || || 7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width=25]]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프랑스]] || 3 || 1 || 0 || 2 || 4 || 3 || +1 || '''2''' || 조별 리그 || || 8 ||[[파일:루마니아 국기.svg|width=25]] [[루마니아 축구 국가대표팀|루마니아]] || 2 || 1 || 0 || 1 || 3 || 5 || -2 || '''2''' || 조별 리그 || || 9 ||[[파일:파라과이 국기.svg|width=25]] [[파라과이 축구 국가대표팀|파라과이]] || 2 || 1 || 0 || 1 || 1 || 3 || -2 || '''2''' || 조별 리그 || || 10 ||[[파일:페루 국기.svg|width=25]] [[페루 축구 국가대표팀|페루]] || 2 || 0 || 0 || 2 || 1 || 4 || -3 || '''0''' || 조별 리그 || || 11 ||[[파일:벨기에 국기.svg|width=25]] [[벨기에 축구 국가대표팀|벨기에]] || 2 || 0 || 0 || 2 || 0 || 4 || -4 || '''0''' || 조별 리그 || || 12 ||[[파일:볼리비아 국기.svg|width=25]] [[볼리비아 축구 국가대표팀|볼리비아]] || 2 || 0 || 0 || 2 || 0 || 8 || -8 || '''0''' || 조별 리그 || || 13 ||[[파일:멕시코 국기.svg|width=25]] [[멕시코 축구 국가대표팀|멕시코]] || 3 || 0 || 0 || 3 || 4 || 13 || -9 || '''0''' || 조별 리그 || * '''1위 -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우루과이]]''' * 2위 -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아르헨티나]] * 4강 - [[미국 축구 국가대표팀|미국]][* 일단 미국은 3위로 인정된다. 하지만 그에 대한 논란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1930 FIFA 월드컵 우루과이/4강, 결승]] 문서의 [[1930 FIFA 월드컵 우루과이/4강, 결승#s-2.3|2.3 문단]]을 참고.], [[유고슬라비아 축구 국가대표팀|유고슬라비아]] == 수상 == * 득점왕 * 1위(8골) - '''[[기예르모 스타빌레]]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아르헨티나]])'''[* 그런데 스타빌레는 이 1930년 월드컵을 제외하면 단 한차례도 국가대표 대항전에 출전하지 않았다. 그래서 4경기 출전 8골로 이 위대한 선수의 A매치 기록은 끝났다.] * 2위(5골) - [[페드로 세아]]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우루과이]]) * 3위(4골) - [[버트 파테노드]] ([[미국 축구 국가대표팀|미국]]) == 기록실 == 첫 월드컵이니 만큼 당연히(...) 첫 기록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 * 월드컵 첫 경기: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프랑스]] vs [[멕시코 축구 국가대표팀|멕시코]][* 같은 시각 4조에서도 [[미국 축구 국가대표팀|미국]]과 [[벨기에 축구 국가대표팀|벨기에]]의 경기가 진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1조와 첫 골의 프리미엄으로 흔히 이 경기를 첫 경기로 이야기한다.]([[1930 FIFA 월드컵 우루과이/조별리그 1조&2조#s-1.1|개막전]]) * 월드컵 첫 승리: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프랑스]], vs [[멕시코 축구 국가대표팀|멕시코]]([[1930 FIFA 월드컵 우루과이/조별리그 1조&2조#s-1.1|개막전]]) * 월드컵 첫 패배: [[멕시코 축구 국가대표팀|멕시코]], vs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프랑스]]([[1930 FIFA 월드컵 우루과이/조별리그 1조&2조#s-1.1|개막전]]) * 월드컵 첫 득점: [[뤼시앵 로랑]]([[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프랑스]]), vs [[멕시코 축구 국가대표팀|멕시코]], 19분([[1930 FIFA 월드컵 우루과이/조별리그 1조&2조#s-1.1|개막전]]) * 월드컵 첫 [[페널티 킥]] 골: 마누엘 로사스([[멕시코 축구 국가대표팀|멕시코]]), vs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아르헨티나]], 42분([[1930 FIFA 월드컵 우루과이/조별리그 1조&2조#s-1.5|조별 리그]]) * 월드컵 첫 멀티골: 앙드레 마쉬노([[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프랑스]]), vs [[멕시코 축구 국가대표팀|멕시코]], 43분&87분([[1930 FIFA 월드컵 우루과이/조별리그 1조&2조#s-1.1|개막전]]) * 월드컵 첫 [[해트트릭]]: [[버트 파테노드]]([[미국 축구 국가대표팀|미국]]), vs [[파라과이 축구 국가대표팀|파라과이]]([[1930 FIFA 월드컵 우루과이/조별리그 3조&4조#s-2.2|조별 리그]])[* 본래 [[기예르모 스타빌레]]의 기록으로 알려져 있으나 2006년 11월에 공식 수정.] * 해트트릭 * [[버트 파테노드]]([[미국 축구 국가대표팀|미국]]), vs [[파라과이 축구 국가대표팀|파라과이]]([[1930 FIFA 월드컵 우루과이/조별리그 3조&4조#s-2.2|조별 리그]]) - '''최초'''[* 원래는 최초로 기록되지 않았지만 2006년에 수정되었다. 자세한 것은 후술] * [[기예르모 스타빌레]]([[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아르헨티나]]), vs [[멕시코 축구 국가대표팀|멕시코]]([[1930 FIFA 월드컵 우루과이/조별리그 1조&2조#s-1.5|조별 리그]]) * [[페드로 세아]]([[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우루과이]]), vs [[세르비아 축구 국가대표팀|유고슬라비아]]([[1930 FIFA 월드컵 우루과이/4강, 결승#s-1.2|준결승]]) * 월드컵 첫 [[클린시트]]: [[지미 더글러스]]([[미국 축구 국가대표팀|미국]]), vs [[벨기에 축구 국가대표팀|벨기에]]([[1930 FIFA 월드컵 우루과이/조별리그 3조&4조#s-2.1|조별 리그]]) * 월드컵 첫 [[자책골]]: 마누엘 로사스([[멕시코 축구 국가대표팀|멕시코]]), vs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아르헨티나]], 51분([[1930 FIFA 월드컵 우루과이/조별리그 1조&2조#s-1.3|조별 리그]]) * 월드컵 첫 퇴장: 플라시도 갈린도([[페루 축구 국가대표팀|페루]]), vs [[루마니아 축구 국가대표팀|루마니아]]([[1930 FIFA 월드컵 우루과이/조별리그 3조&4조#s-1.1|조별 리그]]) * 최다 득점 경기: 9점,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아르헨티나]] 6 vs 3 [[멕시코 축구 국가대표팀|멕시코]]([[1930 FIFA 월드컵 우루과이/조별리그 1조&2조#s-1.5|조별 리그]]) * 최다 득점차 경기: 5점 *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아르헨티나]] 6 vs 1 [[미국 축구 국가대표팀|미국]]([[1930 FIFA 월드컵 우루과이/4강, 결승#s-1.1|준결승]]) * [[세르비아 축구 국가대표팀|유고슬라비아]] 1 vs 6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우루과이]]([[1930 FIFA 월드컵 우루과이/4강, 결승#s-1.2|준결승]]) * 월드컵 최초 역전승: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우루과이]] 0 vs 1 [[세르비아 축구 국가대표팀|유고슬라비아]] →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우루과이]] 6 vs 1 [[세르비아 축구 국가대표팀|유고슬라비아]]([[1930 FIFA 월드컵 우루과이/4강, 결승#s-1.2|준결승]]) * 월드컵 첫 결승전 득점: 파블로 도라도([[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우루과이]]), 1930년 7월 30일, vs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아르헨티나]], 12분 * 무득점팀: [[벨기에 축구 국가대표팀|벨기에]], [[볼리비아 축구 국가대표팀|볼리비아]] 18경기에 70골이 터지면서 경기당 평균 3.89골을 기록했다. 그리고 이 대회는 유일하게 '''무승부가 없었다.''' 거기에 '''역대 월드컵 개최 기간 중 가장 추웠던 월드컵'''이다. 자세한 내용은 아르헨티나와 프랑스전 참고. == 뒷이야기 == * [[우루과이]]는 월드컵이 개최된 해가 자국의 건국 100주년[* [[우루과이]]는 초대 월드컵이 열리기 100년 전인 1830년에 [[브라질]]에서 독립하였다.]이 되는 해이기 때문에 어떻게든 첫 월드컵을 유치하고 싶었고 결국 월드컵 유치도 성공하고 우승도 했다. *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우루과이]]는 이 대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합숙 훈련을 했는데 [[1924 파리 올림픽/축구|1924년]]과 [[1928 암스테르담 올림픽/축구|1928년 올림픽]] 우승 멤버이자 팀의 주전 [[골키퍼]]였던 안드레스 마살리[* Andrés Mazali. 마살리는 [[허들]]에서 남미 챔피언을 차지한 적도 있는 뛰어난 육상선수이기도 했다.]가 [[통금]] 시간을 어기고 [[아내|부인]]과 [[데이트]]를 즐기다 걸렸다. 마살리는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국가대표팀]]에서 퇴출되었고 그 이후 다시는 대표팀에 소집되지 못했다. 그렇게 마살리를 대신하여 나간 골키퍼가 엔리케 바예스테로스였고 그는 초대 월드컵 우승팀의 주전 골키퍼가 되는 영광과 함께 [[FIFA 월드컵 골든 글러브|대회 최우수 골키퍼]]가 되었다. *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우루과이]]는 이 대회 4번의 시합에서 15골을 넣어 경기당 평균 3.75골을 기록하였는데 이는 아직도 월드컵 우승팀 중 최고의 기록이다. 역대 국가대표 팀 중 자타공인 최강으로 일컬어지는 [[1970 FIFA 월드컵 멕시코|1970년 월드컵]]의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브라질 대표팀]]도 이 기록에는 미치지 못한다. * [[루마니아 축구 국가대표팀|루마니아]] 선수의 선발에는 당시 [[루마니아]] [[국왕]]이었던 [[카롤 2세]]의 엄청난 간섭이 있었다. *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프랑스]]는 이 월드컵에 참가했지만 당시 진짜 감독이었던 [[가스통 바로]]와 스타 수비수 [[마누엘 아나톨]][* [[바스크]] 출신의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프랑스]] 대표 수비수. 1929년까지 [[프리메라 리가|스페인]]에서 뛰었지만 대표팀 생활은 프랑스에서 다했다. 1930년 3월 [[스위스 축구 국가대표팀|스위스]]와의 경기에서 40m짜리 중거리슛을 꽂아넣어 유일한 A매치 득점을 해냈다고 전해진다. 통산 A매치 16경기 출전 1골]이 불참했다. 그 때문에 코치였던 코드롱이 대신 감독을 맡았다. * 당시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브라질]]의 주장이었던 [[프레기뉴]]는 [[축구]] 뿐만 아니라 [[배구]], [[농구]], [[수구]], [[하키]], 트랙&필드 [[육상]] 경기 선수도 겸업했다. * 당시는 축구 선수들이 해외의 클럽에서 뛰는 것이 활성화되어있지 않은 시기라 거의 모든 선수들이 자국 리그에서 뛰었었다. 하지만 [[세르비아 축구 국가대표팀|유고슬라비아 대표팀]]에서는 [[이반 베크]] 등 3명의 선수가 [[리그앙|프랑스 리그]]에서, [[페루 축구 국가대표팀|페루]]에서는 훌리오 로레스가 [[리가 MX|멕시코 리그]]의 클루브 네칵사에서 활동하였다. * [[아르헨티나]]에서는 첫 월드컵을 관전하기 위해 엄청난 사람들이 배에 마구잡이로 탑승하여 정원초과가 되었으며 이 때문에 심지어는 물에 빠져 익사하는 사람이 발생하기까지 했다. * 월드컵 개막 당일, 프랑스는 멕시코와 상대를 가졌다. 24분에 프랑스 골키퍼 [[알렉스 테포]]가 멕시코의 공격수 메히아의 공을 막으려다가 메히아와 충돌로 턱에 부상을 입기도 했다. 결국 하프백 [[오귀스탱 샹트렐]]에게 골키퍼 자리를 넘겨줬지만 프랑스는 4대1로 승리를 거두었다. * 아르헨티나는 첫 상대로 프랑스와 경기를 가졌는데, 갑자기 심판이 6분의 시간이 남았음에도 경기를 끝냈다. 프랑스가 아르헨티나 수비수들을 제압해서 맞이한 골키퍼와의 1:1 상황임에도 갑자기 심판이 시간을 제대로 못 보고 경기를 빠르게 종료시킨 것이다. 그 사고로 인해, 프랑스 감독이 심판에게 다가가 "경기 종료 6분이나 남았는데, 왜 호각을 부냐?"라고 항의한다. 주심 지우베르토 지아우메이다 헤구(Gilberto de Almeida Rêgo)가 부심들에게 진짜 6분 남았냐고 물어보았고 경기가 끝난 줄 알고 있던 선수들은 다시 경기장으로 복귀, 남은 6분을 다시 뛰게 되었다. 결국은 프랑스는 이 [[오심]]때문에 아르헨티나에 1-0으로 패배한다. * 이 월드컵은 오직 [[몬테비데오]] 단 한 곳에서만 진행되었으며 월드컵 경기를 진행한 경기장도 '''[[에스타디오 포시토스]]''', '''[[에스타디오 그란 파르케 센트랄]]''', 그리고 결승전을 치룬 '''[[에스타디오 센테나리오]]'''. 이렇게 3곳 뿐이었다. 주경기장이었던 에스타디오 센테나리오가 월드컵이 열리는 도중인 7월 18일에 완공이 되었고 이후의 경기는 오직 에스타디오 센테나리오 한 곳에서만 치뤘다. 그러다보니 1조에서는 [[칠레 축구 국가대표팀|칠레]]와 [[프랑스]]가 경기를 끝낸지 30분만에 같은 구장(에스타디오 센테나리오)에서 다음 경기인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아르헨티나]]와 [[멕시코 축구 국가대표팀|멕시코]]의 경기가 열리기도 했다. *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아르헨티나]]는 후안 호세 트라무톨라와 [[프란시스코 올라사르]]의 2명 공동감독 체제였는데 이 중 트라무톨라는 [[1902년]] 생으로 만 27살[* 10월 21일이 생일인지라 아직 생일이 자니지 않아서 만 나이로는 27살이 맞다.]이었으며 이로서 '''[[FIFA 월드컵]] 역사상 최연소 축구감독'''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트라무톨라는 유명 하프백이자 국가대표까지 지냈던 올라사르와는 다르게 축구 선수 출신이 아니었으며 원래는 기술 감독의 자리에서 올라사르를 보좌했었다. 그 이후에 트라무톨라는 감독 자리에 재미를 붙여 아르헨티나 프로팀의 감독 자리를 맡기도 했다.] 심지어는 팀의 미드필더인 후안 에바리스토, 아돌포 수멜수, 공격수인 카를로스 스파달로와 동갑내기였고 같은 팀의 미드필더인 [[루이스 몬티]]보다 1살, 공격수인 나탈리오 페리네티보다 2살, 수비수인 [[라몬 무티스]]보다 3살이 어렸다. 그리고 옆동네 [[칠레 축구 국가대표팀|칠레]]에서도 같은 경우가 있었다. 당시 칠레의 감독 [[오르트 죄르지]]는 1901년생이었지만 수비수 중 [[울리세스 포이리에르]]는 1897년 생으로 당시 참가한 선수들 중 두 번째로 나이가 많았다. 나이 차이로만 따지면 칠레쪽이 더 심했다.[* 이런 경우가 현대의 클럽팀에서도 가끔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마티아스 자머]]와 [[위르겐 콜러]]. 둘 다 독일 축구를 대표하는 스타 플레이어였지만 잠머는 무릎 부상으로 인해 일찍 은퇴했다. 잠머가 2000년에 수석 코치를 거쳐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감독으로 취임했을 때 위르겐 콜러는 아직 현역이었다. 콜러가 잠머보다 2살 위.][*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에도 비슷한 일이 발생했다. 1981년 생의 [[차두리]]가 코치로 부임했는데 1979년 생의 [[이동국]]이 선수로 발탁되었다.] *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아르헨티나]] 대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프랑스]] 전에서의 부심 2명은 멀쩡한 참가국인 [[볼리비아 축구 국가대표팀|볼리비아]]의 감독 울리세스 사우체도와 [[루마니아 축구 국가대표팀|루마니아]]의 감독 [[코스텔 러둘레스쿠]]였다. 한술 더 떠 나중에 사우체도는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아르헨티나]]와 [[멕시코 축구 국가대표팀|멕시코]]의 경기에 주심을 보기도 했다. 이 경기에서 그는 [[페널티 킥]]을 3개나 불었다. 또 결승전에서도 선심을 보았다. 하지만 모두 [[볼리비아 축구 국가대표팀|볼리비아]]와 [[루마니아 축구 국가대표팀|루마니아]]와는 다른 조에 소속된 팀들의 경기였으므로 큰 문제는 없었다. || '''참가팀''' || '''감독''' || '''주심''' || '''부심''' || || 우루과이 || SUPPICI Alberto || || || || 아르헨티나 || TRAMUTOLA Juan[br]OLAZAR Francisco || || || || 미국 || MILLAR Bob || || || || 유고슬라비아 || SIMONOVIC Bosko || || || || 칠레 || ORTH Gyorgy || || || || 브라질 || DE CARVALHO Pindaro || || || || 프랑스 || CAUDRON Raoul || || || || 루마니아 || RADULESCU Constantin[br]LUCHIDE Octav || || 13강 조별리그 ARG vs FRA, 13강 조별리그 ARG vs MEX[br] - || || 파라과이 || DURAND LAGUNA Jose || || || || 페루 || BRU Francisco[br]RIVERO Guillermo || || || || 벨기에 || GOETINCK Hector || || || || 볼리비아 || SAUCEDO Ulises || 13강 조별리그 ARG vs MEX || 13강 조별리그 ARG vs FRA [br] 13강 조별리그 URU vs ROM [br] 13강 조별리그 ARG vs CHI [br] 4강전 URU vs YUG [br]결승전 URU vs ARG || || 멕시코 || LUQUE Juan || || || * 그래서인지 심판 유니폼은 '''[[https://www.gettyimages.com.au/detail/news-photo/belgian-referee-jean-langenus-holding-the-match-ball-before-news-photo/88616359|운동복인데 넥타이가 있는 정장]]'''이었다. * 원래 월드컵 최초의 해트 트릭 기록자는 [[기예르모 스타빌레]]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2006년에 있었던 [[FIFA]]의 대대적인 기록 재조사 과정에서 [[미국 축구 국가대표팀|미국]]의 전반 15분 득점이 [[톰 플로리]]의 골이 아닌 파테노드의 골[* RSSSF의 기록으로는 파라과이 공격수 [[아우렐리오 곤살레스]]의 [[자책골]]이라는 이야기도 있었다.]이라는 주장이 미국 축구협회에서 나왔다. FIFA는 재조사 끝에 미국의 요청을 받아들여 결국 그 골이 파테노드의 골임을 인정했고, 월드컵 최초의 해트트릭 기록자는 스타빌레가 아닌 파테노드로 공식 수정되었다. * 원래 이 대회 득점왕인 [[기예르모 스타빌레]]는 주전 선수가 아니였다. 그러나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팀]]의 주전 공격수이자 주장이었던 [[마누엘 페레이라]]가 당시 [[대학생]]이었는데 [[시험|중간고사]]를 봐야 한다면서 잠시 귀국해버리는 바람에 그 땜빵으로 들어간게 스타빌레였다. * [[멕시코 축구 국가대표팀|멕시코]]의 수비수 로사스는 1912년 생으로 [[FIFA 월드컵|월드컵]]에 출전했을 당시 18살에 불과하였다.[* 다만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브라질]]에 로사스보다 2달 늦게 태어난 [[카르발류 레이치]]가 있어서 초대 월드컵 최연소 선수 타이틀의 주인공이 되는 것은 실패했다.] 하지만 월드컵 최초이자 초대 월드컵의 유일한 [[자책골]]을 기록하는 비운[* 옛날 기록으로는 [[미국 축구 국가대표팀|미국]]과 [[파라과이 축구 국가대표팀|파라과이]]의 경기에서 [[파라과이 축구 국가대표팀|파라과이]]의 [[아우렐리오 곤살레스|곤살레스]]가 [[자책골]]을 기록해서 기록을 양분했지만 이것이 [[버트 파테노드|파테노드]]의 골로 수정되면서 로사스가 독박을 쓰게 되었다.]과 월드컵 역대 최연소 득점자라는 영광[* 로사스는 [date] 현재까지도 월드컵 역대 차연소 득점자이다. 최연소 득점 기록은 [[펠레]]가 가지고 있다.]을 한 대회에서 모두 맛보았다. * [[알렉상드르 빌라플란]]은 월드컵의 역사적인 첫 승리를 거둔 팀의 주장이라는 영광스런 커리어를 거머쥐었지만, 훗날 [[인간 쓰레기]]가 되어 총살당하면서 개인으로서는 월드컵 최초의 [[흑역사]]가 된다. *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브라질]]은 월드컵 2조 첫경기인 [[세르비아 축구 국가대표팀|유고슬라비아]]와의 경기 이전에 5년 가까이 A매치를 단 한 차례도 치르지 않았었다. 이것이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브라질]]이 무기력하게 탈락하게 된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되기도 한다. * [[미국 축구 국가대표팀|미국 대표팀]]은 13개의 팀 중 유일하게 후보 [[골키퍼]]가 없는 팀이었다. 결국 유일한 [[골키퍼]]였던 [[지미 더글러스]]가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아르헨티나]]와의 준결승전에서 후반에 무릎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패했다. * [[볼리비아 축구 국가대표팀|볼리비아]]는 선수들이 개최국인 [[우루과이]]를 응원하는 문구를 유니폼에 새겨오는 훈훈함을 연출했다. 그리고 저 옷을 입고 실제 시합까지 뛰었다. || [[파일:external/cdn.bleacherreport.net/soccer_g_bolivia1930_576_display_image.jpg|width=100%]] || || Viva Uruguay!! || * 첫 우승팀인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우루과이 대표팀]]의 결승전 출전 멤버 중 최후의 생존자는 [[에르네스토 마스체로니]]로 1984년에 7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후보까지 영역을 넓히면 에밀리오 레코바로 1992년에 사망했다.] 그리고 2010년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아르헨티나]]의 대표 선수였던 [[프란시스코 바라요]]가 100살(!)의 나이로 사망하면서 현재 더 이상 이 대회에서 참가했던 선수 중 살아있는 사람은 없게 되었다. || [[파일:external/4.bp.blogspot.com/francisco-varallo-e-homenageado-na-argentina-1266464550372_300x300.jpg|width=100%]] || || 프란시스코 바라요의 100번째 생일 || == 대회 이후 == 첫 월드컵 우승의 영광을 놓친 [[아르헨티나]]는 머리끝까지 빡쳐서 결국 자국에 있는 [[우루과이]] [[대사관]]을 때려부수는 등의 [[폭동]]을 일으켰으며 [[우루과이]]와는 1년 정도 단교를 선언했다. 그런데 [[우루과이]]는 [[아르헨티나]]의 지원을 받아 [[브라질]]에서 [[독립]]한 나라이다.[*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의 국기가 닮은 이유가 이것. [[아르헨티나]]의 도움을 잊지 않고자 [[아르헨티나]] 국기를 모방하여 탄생한 것이 오늘날까지 쓰는 [[우루과이]]의 국기이다.] [[1934 FIFA 월드컵 이탈리아|그 다음 월드컵]]이 [[이탈리아]]에서 개최되자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우루과이]]는 자국에서 개최한 월드컵에 유럽 국가들이 대거 불참한 앙갚음으로 불참한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 및 국내문제로 무려 20년 동안이나 월드컵에 불참하고 말았다. 비록 [[1950 FIFA 월드컵 브라질|20년 후]]에는 다소 삐걱거리는 면을 보여주었지만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우루과이]]는 [[브라질]]에서 [[마라카낭의 비극|다시 한 번 월드컵 우승의 영예를 차지하였다. 이 때문에 우승을 놓친 브라질은 난리가 났다고 한다.]] 그리고 우루과이는 그 대회 이후로 현재까지 우승이 없다. [각주] [[분류:1930 FIFA 월드컵 우루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