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1815년 출생]][[분류:1882년 사망]][[분류:전주 이씨 연령군파]][[분류:조선의 왕자군]][[분류:영의정]][[분류:좌의정]][[분류:살해된 인물]] [include(틀:대한제국 황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751232, #94153e 20%, #94153e 80%, #751232)" {{{#ffd400 '''흥인군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include(틀:역대 조선 영의정(순조-고종))] ---- [include(틀:역대 조선 정승(순조-고종))]}}}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751232, #94153e 20%, #94153e 80%, #751232)" '''조선 추존 장종의 증손[* 남연군의 양아버지 [[은신군]]이 [[영조]]의 동생 연령군의 봉사손이었다. 그러나 계대 문제로 [[조선시대]] 당시에 은신군의 후손들은, '우리는 연령군의 제사를 챙길 뿐, 엄연히 [[사도세자|사도세자(장조)]]의 자손'이라고 인식했고, [[왕실]]에서도 그들에게 [[영조]] - 사도세자의 후손 자격으로 [[군호]]를 주었다.(20세기 중반부터는 연령군을 조상으로 인정하고 있다.) 자세한 것은 [[연령군]], [[낙천군]], [[은신군]] 문서 참조.][br]{{{+1 흥인군 | 興寅君}}}'''}}}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190d43, #29176e 20%, #29176e 80%, #190d43)" '''대한제국 추존 장조의 증손[br]{{{+1 흥인군 | 興寅君}}}'''}}} || || '''이름''' ||이최응(李最應)[* 형제들의 이름을 보면 재미있는 규칙을 찾을 수 있는데, 첫째는 흥녕군 이창응(李昌應), 둘째는 흥완군 이정응(李晸應), 셋째는 흥인군 이최응(李最應), 막내가 흥선군 이하응(李昰應)인데 이최응을 제외하고는 전부 가운데 이름자의 부수가 날 일(日)자다. 이최응의 最의 부수는 갈 왈(曰)인데, 아무래도 남연군이 이름을 지을 때 비슷한 글자를 골라서 붙인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이는 흥완군과 같은 항렬의 왕족들의 이름들도 마찬가지인데 먼저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익종, 문조)의 이름은 '영('''旲''', '''日''' + 大)'이며 철종은 왕이 된 이후 원범에서 '변('''昪''', '''日''' + 弁)'으로 개명했다. 은전군의 양손자 완평군 역시 초명은 '병('''昺''', '''日''' + 丙)'이었다가 '승응('''昇'''('''日''' + 升)應)'으로 바꿨으며 완평군 이전의 은전군 양손자였던 경평군의 이름 역시 '호('''晧''', '''日''' + 告)'였다. 은언군의 큰손자이며 상계군의 양자이자 풍계군의 친자 익평군의 이름 역시 '희('''曦''', '''日''' + 羲)'였고 철종의 큰 형인 회평군도 원래 이름은 원경이었는데 '명('''明''', '''日''' + 月)'으로 고친 것이다. 영평군 역시 원래 이름은 '욱('''昱''', '''日''' + 立)'이었다가 후일 '경응('''景'''('''日''' + 京)應)'으로 개명했다.]|| || '''출생''' ||[[1815년]] [[3월 27일]][br](음력 [[순조]] 15년 2월 17일)|| || '''사망''' ||[[1882년]] [[7월 24일]] (향년 67세)[br](음력 [[고종(대한제국)|고종]] 19년 6월 10일)|| || '''[[봉호|{{{#gold 봉호}}}]]''' ||흥인군(興寅君)[* 봉호는 [[여주시]]의 옛 지명인 흥양부(興陽府)에서 유래했다. 형제들의 봉호도 마찬가지. 왕자 군이 아닌 종친 군의 [[봉호]]는 보통 생모의 [[본관|관향(본관)]]으로 지었다. 흥인군 형제들의 생모는 [[여흥 민씨]]이다.]|| || '''[[시호|{{{#ffd400 시호}}}]]''' ||효헌(孝憲) / 충익(忠翼) / 문충(文忠)|| || '''[[자(이름)|{{{#ffd400 자}}}]]''' ||양백(良伯)|| || '''[[아호|{{{#ffd400 호}}}]]''' ||산향(山響)|| || '''양조부''' ||[[은신군]]|| || '''양조모''' ||남양군부인 [[남양 홍씨]]|| || '''친조부''' ||이병원[* [[인조]]의 3남 [[인평대군]]의 5대손.]|| || '''친부''' ||[[남연군]]|| || '''친모''' ||군부인 [[여흥 민씨]]|| || '''부인''' ||정경부인[*A 사후 추증. 생전에는 군부인이었다.] [[안동 권씨]][br]정경부인[*A 사후 추증. 생전에는 군부인이었다.] [[연일 정씨]][br]정경부인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 || '''자녀''' ||1남|| [목차] [clearfix] == 소개 == [[조선]] 후기의 [[왕족]]이자 문신(文臣). [[남연군]]의 네 아들 중 [[3남|셋째아들]]로, [[흥녕군]], [[흥완군]]의 동생이자 [[흥선대원군]]의 형이다. == 일생 == 1815년 2월 17일 한성부에서 [[인조]]의 셋째 아들 [[인평대군]]의 6대손이자 [[정원대원군|원종]]의 셋째 아들 [[능창대군]]의 양7대손인 [[남연군|이채중]](李采重)의 3남으로 태어났다.[* 둘째형 [[흥완군]]이 태어나고나서 음력 기준으로 정확히 1년 1일만에 태어났다.] 어머니는 [[인현왕후]]의 큰아버지 민정중의 4대손 민경혁의 딸 [[여흥 민씨]]다. 왕실의 후손이었지만 종친의 대우는 그의 고조부 [[안흥군]]의 대에서 끝났고 그의 가족은 단지 왕족 출신 양반일 뿐이었다. 그러나 생후 10개월만인 1815년 12월 9일 아버지 이채중이 [[정조(조선)]]의 이복 동생이자 [[숙종(조선)]]의 3남 [[연령군]]의 양손자인 [[은신군]]의 양자로 입적해 [[남연군]]으로 봉해지고 종친으로 편입되면서 이최응 역시 왕족이 되었다. 1829년 1월 1일에 흥인부정(興寅副正)으로 봉해졌으며 1830년 흥인도정(興寅都正)으로 승격했다. 동생인 [[흥선대원군]]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대원군의 친형이라서 상당한 권력이 있었다. 1865년(고종 2년)에 둘째 조카인 [[고종(대한제국)|고종]]이 왕좌에 올랐던 시절 동생인 [[흥선대원군]]이 주도했던 [[경복궁]] 중건 때 영건도감제조를 지냈다. [[흥선대원군]]이 문호 개방 및 통상 수호 조약에 반대하자 문호 개방 및 통상 수호 조약을 지지하면서 동생과 대립했다. 결국 유림들의 반대로 사직했는데, 이 때부터 [[흥선대원군]]과의 관계가 나빠졌다. 이후 조카 며느리인 [[명성황후]]와 친밀해졌고 흥선대원군이 실권을 잃는데 도움을 줬다. 1873년 동생이 실권을 잃자 [[명성황후]]의 도움으로 호위대장,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라[* 왕실 종친이 영의정에 오른 것은 [[성종(조선)|성종]] 때 [[구성군]] 이후 매우 오랜만이었다.] [[고종(대한제국)|고종]]의 국사(國事) 보좌를 맡았다. 1880년 통리기무아문의 신설로 총리 대신에 임명되었으나 다음 해에 유림들의 반대로 물러나 영돈녕부사가 되었다. 1882년 잠시 [[경기도]] [[광주시|광주부]] 유수로 임명받았다가 다시 영돈녕부사 직을 맡았다. 동년에 [[임오군란]]이 일어나 동생인 [[흥선대원군]]의 지원을 받아 반란을 일으켰던 구식 군대 군인들에게 [[명성황후]] 지지자 및 문호 개방 주동자라는 이유로 살해당했다. [[황현]]은 《[[매천야록]]》에 흥인군의 최후에 대해 상당히 처참하게 기록해놓았다. [[임오군란]] 때 병사들이 집을 둘러싸자 도망가려고 담장을 타 넘다가 떨어져 고환이 터져 비참하게 최후를 맞았다고 적었다. 슬하에 [[완영군|완영군 이재긍]]이라는 아들을 하나 두었는데, 그는 후사 없이 25살이란 나이에 요절했다. 그렇게 대가 끊길 뻔했지만 먼 방계[* 400년을 거슬러 올라가 [[세종대왕]]의 적5남 [[광평대군]]의 가계에서 골랐다.]의 손자 뻘인 아이를 이재긍의 아들로 입양시켜 가계는 이어졌다. 문제는 그 사람이 그 유명한 '''[[을사오적]]''' 멤버 [[이지용]]이다. == 평가 == 그 [[흥선대원군]]의 형제임에도 평가는 당시나 지금이나 영 좋지 못하다. 당장 생전부터 평이 안 좋음을 알 수 있는 게, [[임오군란]] 당시 구식 군인들이 그렇게 추종해 마지않던 흥선대원군의 형임에도 타겟이 되었다는 것 자체가, 흥선대원군의 형이라는 쉴드도 안먹힐 정도로 평이 나빴음을 보여준다. 그나마 흥선대원군도 천하의 개쌍놈이었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흥선대원군은 실책만큼이나 성과도 분명하다보니 흥인군만 비교된다. 《[[매천야록]]》에 따르면, [[영의정]]을 지낼 때 일본과 조약을 맺을 것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누군가가 "일본과 화해하는 게 좋겠습니다"라고 말하자 "옳다"라고 했는데 또 누군가가 "아닙니다. 왜놈들과 싸워야 합니다"라는 의견에도 "옳다"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자 다른 사람이 "싸웠다가 지면 어쩔 건데요?"라고 반문하자 또 "옳다"라고 했고, 또 다른 사람이 "싸워도 이기지 못하면 그 때 가서 화해하죠"라고 하자 또 "옳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결국 그 회의는 여부를 결정하지 못하고 끝났는데, 이 이야기가 도성에 퍼진 이후 '''[[예스맨|유유]]정승(唯唯政丞)'''[* '유유(唯唯)'는 "예, 예"라고 대답하는 소리를 나타내는 한자어다.]이라는 별명이 붙었다고 한다. 그리고 물고기 어(魚)와 노나라 노(魯)자를 구별하지 못할 정도로 무식해서[* 흥인군 본인이 실제 이 정도 수준이었다기보다는 무식함을 비유하는 표현이다. 실록을 보더라도 [[http://sillok.history.go.kr/id/kia_12311024_001|성종실록]]이나 [[http://sillok.history.go.kr/id/kva_10005028_001|정조실록]]을 비롯해 어와 로도 구분하지 못한다는 표현이 여러 번 나온다.] 과거 시험에서 시험관으로 임명되었음에도 뭐가 잘 되었고 뭐가 잘못된 건지 구별을 못해서 응시생들은 운이 좋으면 붙었고 운 없으면 떨어졌다고 한다. 게다가 흥인군이 시험관으로 임명되었다는 정보가 퍼지면 응시생 중 문장 솜씨가 부족한 사람들은 [[야! 신난다~]]를 외쳤다고 한다. 흥선대원군은 형이 욕심만 많고 이렇게 무식했기 때문에 집권 전부터 형을 대놓고 무시했다고 한다. 하여튼 《매천야록》에서 묘사한 흥인군은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 == 대중매체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한미백년 이최응1.png|width=100%]]}}} || || {{{#gold '''〈실록 한미백년〉의 흥인군'''}}} || 1982년 [[MBC]] 특집극 〈실록 한미 백년〉[*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에서는 [[김상순(배우)|김상순]]이 연기했다. [[조미수호통상조약|조선과 미국의 수교 조약]]을 원활하게 체결하기 위해 이를 극렬하게 반대하던 유생 홍재학([[김무생]] 분)을 죽여야한다고 [[고종(대한제국)|고종]]([[길용우]] 분)에게 건의한다. 홍재학을 잡아다 [[고문]]할 때 바라보는 썩소가 압권이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풍운 흥인군.png|width=100%]]}}} || || {{{#gold ''' 〈풍운〉의 흥인군'''}}} || 1982년 KBS 드라마 〈[[풍운(KBS)|풍운]]〉에서는 [[김성원(성우)|김성원]]이 연기했다. 점잖으나 약간 싱거운 사람으로 나왔다. [[임오군란]] 때 몸을 피하라는 [[김병국]]([[민지환]] 분)의 조언을 무시하고 집에 있다가 찾아온 구식 군인들에게 살해당했다. 죽기 전에 나름 근엄하게 뒷짐지고 "썩 물러가라!"고 한 게 압권이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조선왕조 흥인군.png|width=100%]]}}} || || {{{#gold '''〈조선왕조 500년 - 대원군〉의 흥인군'''}}} || 1990년 [[MBC]]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조선왕조 500년 - 대원군]]〉에서는 [[김기일]]이 연기했다. 아래 소개할 〈[[명성황후(드라마)|명성황후]]〉처럼 아주 우스꽝스럽지는 않으나 좀 실없는 사람으로 묘사되었다. [[철종(조선)|철종]]([[최수종]] 분) 시절 파락호로 지내는 흥선군([[임동진]] 분)을 걱정하며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 눈 밖에 나지말고[* 실은 안동 김씨 눈 밖에 나지 않으려고 파락호 행세를 하는 것이지만, 흥인군은 그런 행태가 오히려 찍히는 짓이라고 생각했다.] 제대로 살라고 꾸중한다. [[고종(대한제국)|고종]] 즉위 이후엔 [[흥선대원군]]이 바로 종친을 등용하지 않는 것을 답답해하며 기생 초월[* 흥선대원군이 파락호 시절 자주 찾던 기생.]([[김영란(배우)|김영란]] 분)을 만나 앞으로 흥선대원군이 어떻게 정치를 할 것인지 들은 게 있나 싶어서 떠보려하나 제대로 된 답을 듣지 못한다. 고종 친정 무렵부터 민씨 정권에 협력하였고 동생과는 척을 진다. 역사대로 [[임오군란]] 때 살해당하는데 한밤중에 집 안에서 부인 손을 잡고 도망치다가 찌질하게 혼자 살려고 부인을 [[마루]]에 패대기치고 출구를 찾아 두리번거리다 구식 군인이 던진 창에 맞아 죽는 것으로 나왔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찬란한 여명 흥인군.png|width=100%]]}}} || || {{{#gold '''〈찬란한 여명〉의 흥인군'''}}} || 1995년 [[KBS 1TV|KBS1]] 드라마 〈[[찬란한 여명]]〉에서는 [[이신재]]가 연기했다. 재물과 권세에 눈이 먼 탐욕스러운 모습으로 나왔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명성황후 흥인군1.png|width=100%]]}}} || || {{{#gold '''〈명성황후〉의 흥인군'''}}} || 2001년 [[KBS 2TV|KBS2]] 드라마 〈[[명성황후(드라마)|명성황후]]〉에서는 [[이영후]]가 연기했다. 개념을 안드로메다로 날려버린 발언들을 생각없이 하고 다니며, 목소리만 크고 어리숙한 인물로 등장했다. 이런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자연스럽게 이 드라마에서 [[개그 캐릭터]] 기믹을 맡았다. 특히 '''[[신정왕후 조씨]]([[김용림]] 분)와 [[철인왕후|철인왕후 김씨]]([[유혜영]] 분) 면전에서 [[풍양 조씨]]와 [[안동 김씨]]를 까는''' 장면과, 동생 흥선대원군([[유동근]] 분)의 대역사였던 [[경복궁]] 중건 중 화재 사건으로 전소되자 '''왕실이 번성하려는 듯 활활 타오른다.'''며 실없는 소리를 동생 면전에서 늘어놓는 장면은 보는 사람이 [[손발퇴갤]]할 정도다. 전자에선 보다 못한 동생이 직접 "형님!"이라며 버럭했으며, 그러자 오히려 "너무 분하고 억울해서 그랬다"고 눈물을 짰다. 후자에선 동생이 "천민들도 그따위 헛소리는 안 한다"며 형이고 뭐고 빡쳐서 "삭탈 관직하고 [[의금부]]에 가두라"고 일갈했다. 이외에도 눈치 없거나 생각 없는 언행으로 동생에게 욕 먹는 장면이나 대놓고 동생이 무시하는 장면이 자주 나왔다. [[임오군란]] 때 흥인군이 [[끔살]]당하자, 흥선대원군이 장례도 못 치르게 하면서 형수인 흥인군 부인([[엄유신]] 분)에게 '사람도 아닌 짐승을 묻을 수 있냐, 대역죄로 다스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지. 맘 같아선 [[능지형|사지를 절단내]] [[효수]]하고 싶다'라며 막말까지 한다.[* [[여흥부대부인]]이 이 말을 듣고 제정신이 아니라며 기겁했다.] [[임오군란]] 때 폭동을 일으킨 군인들이 대궐로 습격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대궐을 빠져나와 집으로 도망갔으나, 막상 군인들이 대궐로 가기 전에 흥인군의 집부터 습격하는 바람에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그 뒤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군인들의 흥인군 살해 장면이 코믹하면서 다소 잔혹하게 묘사되었다. 끌려나온 흥인군이 몸을 가누지 못하며 헛주먹질과 팔을 휘저으며 "썩 물러나지 못할까?" 라며 우스꽝스럽게 소리치다가 군의들의 웃음과 김장손의 발길질에 넘어지고 목숨을 구걸하다가, [[철퇴(무기)|철퇴]]로 내리치고 쓰러진 흥인군을 여러 군인들이 달려들어 난도질했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매천야록》 기록처럼 아주 멍청한 사람으로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종친]]의 좌장격 인물로 [[청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적도 있었다는 사실을 소개하고 있고,[* 당연하겠지만 위에처럼 멍청하기만 한 인물이면 절대 보내지 않는다!!! 저 정도로 멍청한 사람이 만일 사신으로 가면 청나라에서 "조선은 왜 이런 멍청한 왕족을 사신으로 보낸거냐? 우릴 무시하냐?" 라고 반응할 수 있었다.] 흥선대원군에게 불만을 가지고 조카 [[고종(대한제국)|고종]]과 협력하며 흥선대원군이 실각된 후 '유유정승'이라 불린 《매천야록》 기록과는 달리 고종이 친정하는 조정의 중심 인물로서 국정 현안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분명하게 피력하는 인물로 나온다. 임오군란 때 병사들에게 맞아죽는 최후는 같다.[* 다만 그냥 몽둥이에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모습으로 나온다.] 여기서의 묘사가 실록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실제 흥인군은 그렇게까지 사람 자체가 우둔했다기보다는, 아무래도 [[서화]]에도 능한 교양인이었던 동생에 비해[* 흥선군의 난은 석파란이라 하여서 훗날 [[독립운동가]]들이 자금을 모으기 위해 석파란을 위조할 정도였다. 흥선군이 [[김정희]]의 제자였으니 더 설명은 필요없다.] 교양이 부족했던 면이 《매천야록》 등의 야사에서 과장된 것으로 보인다. 흥인군 역시 [[철종(조선)|철종]]때에 동생과 함께 종친이 본받아야 할 모범적인 인물로 칭송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엎드려 원하건대, 환첩(宦妾)은 한결같이 우리 조종의 법으로 단속하여 제어하고, 종친(宗親)의 기거(起居)는 한결같이 남연군·흥인군·흥선군을 본받도록 하소서." - 철종실록, 철종 3년 7월 10일. 부교리 김영수의 상소에서. 남연군과 그 아들들인 흥인군 형제는 다른 종친들에 비해 신중하고 사려깊은 처신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기록이다.] [[이두호]]가 그린 만화 '이두호의 가라사대'에서 정말로 추하게 죽는다. 난군이 들이닥치는데도 곳간 열쇠를 찾느냐 열중하여 열쇠를 찾아 좋아라 기뻐하는데 난군들이 들이닥쳐 "이최응이 여기 있다!", "죽여라!" 라고 소리치자 열쇠를 든 채로 굳어버린다. 이후, 피투성이 시체로 한 컷 나오면 난군들에게 참살당하여 시체 형체조차 남지 못했다고 서술된다. 그 [[이두호]]가 그린 [[객주]]에선 등장은 없고, 임오군란 이후에 민겸호 대신 이최응이 나섰다는 말에 난군들이 무어라? 이최응? 그놈이나 민겸호나 차이가 없다면서 버럭거리는 대사에서 짧게 언급된다. 그만큼, 극중 난군들에게 민씨 일가와 더불어 죽일 놈으로 취급되는 셈. == 관련 항목 == * 《[[을병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