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흥선대원군]] [include(틀:역대 조선 대원군)]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4a122d, #6d1b43 20%, #6d1b43 80%, #4a122d)" {{{#ffd400 '''흥선대원군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대한제국 친왕)] ---- [include(틀:조선의 역대 집권세력)] ---- [include(틀:역대 운현궁 주인)] }}} ||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342140, #4A2d5b 20%, #4A2d5b 80%, #342140); color: #FFD400" '''운현궁 초대 궁주'''}}}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4a122d, #6d1b43 20%, #6d1b43 80%, #4a122d); color: #FFD400" '''조선 장조의 증손 | 조선 고종의 생부[br]{{{+1 흥선대원군 | 興宣大院君}}}'''}}}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1a0c4f, #29176e 20%, #29176e 80%, #1a0c4f); color: #FFD400" '''대한제국 장조의 증손 | 대한제국 고종의 생부[br]{{{+1 흥선헌의대원왕 | 興宣獻懿大院王}}}'''}}}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흥선대원군 초상화.컬러 사진.png|width=100%]]}}} || ||<|2> '''출생''' ||[[1821년]] [[1월 24일]] || ||[[조선]] [[한성부|한성부 북부]] [[안국동|안국방]] [[남연군|안동궁]][br](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안국동]]·[[운니동]] 일대) || ||<|2> '''사망''' ||[[1898년]] [[2월 22일]] (향년 77세) || ||[[대한제국]] [[한성부]] [[마포구|서서 용산방]] [[공덕동|공덕리계]] [[염리동|염동]] 아소당[* 흥선대원군이 별장으로 사용한 곳으로, 지금의 [[서울디자인고등학교]]와 [[동도중학교(서울)|동도중학교]] 운동장 부지에 걸쳐 있었던 99칸의 대저택이었다.][br](現 [[서울특별시]] [[마포구]] [[염리동]] 139-55 일대) || || '''능묘''' ||'''[[흥원]](興園)''' || ||<|2> '''재위기간''' ||'''{{{#ffd400 조선 대원군 | 조선 국왕 섭정}}}''' || ||[[1864년]] [[1월 21일]] ~ [[1873년]] [[11월]]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본관''' ||[[전주 이씨]] || || '''휘''' ||'''하응(昰應)'''[* [[조선/왕실|조선 왕실]]에서 [[태조(조선)|태조 이성계]], [[태종(조선)|태종 이방원]], [[세종(조선)|세종 이도]] 다음으로 이름이 크게 잘 알려진 인물이다.] || || '''부모''' ||부친 [[남연군]][br]모친 여흥군부인 [[여흥 민씨|민씨]] || || '''형제자매''' ||4남 1녀 중 4남[* 남자 4형제로는 [[흥녕군]] 이창응, [[흥완군]] 이정응, [[흥인군]] 이최응, [[흥선대원군]] 이하응 등이 있다.] || || '''배우자''' ||[[여흥부대부인|여흥순목대원비]] || || '''자녀''' ||3남 3녀[* 3남은 [[흥친왕]] 이재면, [[고종(대한제국)|고종]] 이명복, 서자 [[완은군]] 이재선 등이다.] || || '''종교''' ||[[불교]] || || '''신장''' ||[[http://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coolbox7&logNo=220288587699&proxyReferer=https:%2F%2Fwww.google.com%2F|150cm]] || || '''자''' ||시백(時伯) || || '''호''' ||석파(石坡), 노석(老石), 해동거사(海東居士) || || '''별칭''' ||대로(大老) || || '''작호''' ||'''[[조선]]''': 흥선부정(興宣副正)[br]→ 흥선정(興宣正)[br]→ 흥선도정(興宣都正)[br]→ 흥선군(興宣君)[br]→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 '''[[대한제국]]''': '''흥선대원왕(興宣大院王)'''[* [[대한제국]] 선포와 함께 [[고종(대한제국)|황제]]의 친부로서 손자 [[순종(대한제국)|순종]]이 직접 추증.] || || '''시호''' ||'''헌의대원왕(獻懿大院王)''' ||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흥선대원군(이하응) 초상.jpg|width=100%]]}}} || || {{{#ffd400 '''흥선대원군 초상'''}}}[* 대원군의 초상화는 정본 6점과 초본 2점이 전해지고 있는데 정본은 흑단령포본[[https://museum.seoul.go.kr/www/relic/RelicView.do?mcsjgbnc=PS01003026001&mcseqno1=021867&mcseqno2=00000&cdLanguage=KOR|#]], 금관조복본(이것), 와룡관학창의본의 44세 초상 3점, 흑건청포본, 복건심의본의 61세 초상 2점이 있으며 나머지 한 점은 또 하나의 똑같이 생긴 금관조복본이다. 3점은 모사본이라서 그려진 시점 자체는 50세 때인 [[1869년]](고종 6년)이고 2점은 실제로 61세 때인 [[1880년]](고종 17년)에 그려졌다. 대부분 같은 얼굴과 구도의 전신상이면서 복장, 의관, 기물이 제각각이라서 패션쇼와도 같은 느낌을 준다. 3점은 이한철이 얼굴을, 유숙이 몸을 그렸으며 2점은 이한철이 얼굴을, 이창옥이 몸을 그렸는데 유숙이 세상을 떴기 때문.] || [목차] [clearfix] == 개요 == > ⋯<전략>⋯ 조정에서는 어떤 변이라도 있을까 하여 대원군에게 간언하기를, "선현의 제사를 받드는 것은 선비의 기풍을 기르는 것이므로 이 명령만은 거두기를 청합니다"라고 하니 대원군이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진실로 백성에게 해 되는 것이 있으면 비록 공자가 다시 살아난다 하더라도 나는 용서하지 않겠다.''' 하물며 서원은 우리나라 선현을 제사하는 곳인데 지금에는 도둑의 소굴로 됨에 있어서랴." 했다. ⋯<후략>⋯ >---- >《근세조선정감(近世朝鮮政鑑)》 상(上)[* 김태웅, 《뿌리 깊은 한국사 샘이 깊은 이야기 6근대》, 가람기획, 2019, 30쪽.] [[사도세자]]의 양증손이자, [[정조(조선)|정조]]의 이복동생 [[은신군]]의 양손자이며, [[고종(대한제국)|고종]]의 친아버지.[* 고종은 [[조선/왕사|다음]] [[대한제국/황사|임금]]으로 즉위하면서 [[조선/왕사|대통]]을 잇기 위해 [[효명세자]](익종)와 [[신정왕후 조씨|조대비]]의 양자로 입적했다. 그래서 [[고종(대한제국)|고종]]의 법적 아버지는 익종인 [[효명세자]]이다.] [[조선시대]]에 4명[* [[국왕]]으로 추존받은 [[정원군]]을 제외하면 최종적으로는 3명.] 있었던 [[대원군]] 중 마지막 대원군이며, 유일하게 생전에 대원군이었다. [[섭정]]으로 오랜기간 실권을 가졌고, 조선의 마지막 [[조선/왕사|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대한제국/황사|황제]]인 고종의 친아버지로서 조선 말기의 핵심 인물이다. 그런만큼 강렬한 존재감을 가져 대원군이라고 하면 흔히 '''흥선대원군'''만을 [[고유명사]]처럼 지칭해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대한제국]] 선포 이후 [[1907년]](융희 원년)에 손자 [[순종(대한제국)|순종]]이 그를 '대원왕(大院王)'으로 [[추존|추숭]]하고 [[시호]] '헌의(獻懿)'를 내렸다. 그래서 이를 합친 최종 정식 작호는 '흥선헌의대원왕(興宣獻懿大院王)'이다.[* 이를 두고 [[대원군]]도 [[조선/왕사|임금]]으로 격상되었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 말하는 [[왕]]은 국가 원수(King)의 개념이 아니라 [[황제]]국에서 [[황족]]들에게 수여하는 작위(친왕, Prince)의 개념이다. 즉 왕국의 대원군과 제국의 대원왕은 실질적으로 똑같은 위치이기에 [[황제]] [[추존]]을 안 받은 이상 격상된 게 사실상 없으나 왕국의 왕에 준하는 예우와 존경을 받는다.] 더불어 흥선대원군의 부인이며 고종의 생모인 [[여흥부대부인]]도 '여흥순목대원왕비(驪興純穆大院王妃)'로 [[추존|추숭]]받았다. 19세기 조선 정치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당대는 물론 현대까지도 평가가 크게 엇갈리는 인물이며, '''[[박정희]]와 함께 평가가 엇갈리는 한국 역사 속 인물들의 대표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박정희와 흥선대원군은 각각 20세기와 19세기 보수주의의 대명사로 꼽히며, 급작스럽게 최고권력자의 자리에 올랐으나 불미스럽게 권력을 놓게 되었다는 점이 유사하다. 흥선대원군은 조선시대 사람이라 보수/진보를 논할 수는 없으나, 그가 고립주의적이고 전통주의적인 정치적 스탠스를 보였다는 것 자체는 부정할 수 없다.] 실제로도 한 쪽으로 단언하여 평가하기 매우 어렵다. 그의 인생 역정은 대단히 파란만장했으며, [[세도정치]] 시기부터 [[대한제국]]의 성립까지 조선 말기의 역사적 주요 사건에 많이 엮였으니 조선 말엽의 거시적인 역사 그 자체로 봐도 무방하다. 한국 근현대사의 시작이 되는 인물로서 [[한국 근·현대사]] 교육에 있어서도 흥선대원군이 가장 먼저 언급된다. == 호칭 == 그를 부르는 [[호칭]]은 다양하다. "대원위 대감(大院位大監)", "대원위 합하(閤下)" 등. 말년에는 "국태공 저하(國太公邸下)"라고 불리기도 했고 [[갑오개혁]]으로 [[조선/왕실|조선 왕실]]의 호칭이 격상돼서인지[* 주상 전하는 대군주 폐하, 왕비 전하는 왕후 폐하라고 불렸다.] [[독립신문]]의 기록을 보면 그를 가리켜 '대원군 전하', '국태공 전하'라고 한 기록들이 존재한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326265&cid=51385&categoryId=51385|네이버 지식 백과 독립신문 1897년 7월 31일.]]] 아마 '살아있는 [[대원군]]'은 그가 처음이어서 호칭을 정립하기 어려웠기에 이렇게 많았을 수도 있다. 또한 [[조선시대]] 백성들은 유명한 [[재상]]급 인사들을 부를 때 그가 사는 곳을 붙여서 부르기도 했는데[* 이를 택호(宅號)라고 한다. 보통 남성을 일컫는 경우 지명이나 관직에 어른(ex 승지어른, 개성어른)을 붙여 불렀으며, 여성을 일컫는 경우엔 댁이나 안어른(ex 춘천댁 아주머니, 군수댁 안어른 등) 등의 호칭을 붙여 불렀다.] 흥선대원군은 생전 [[운현궁]]에 주로 살았기 때문에 [[백성]]들은 그를 '운현 대감(雲峴大監)'이라고도 불렀다. == 가족 관계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IMG_0262.jpg|width=100%]]}}} || [[파일:IMG_0261.png|width=100%]] || || {{{#ffd400 '''2018년 9월 9일에 방영된 KBS 〈역사저널 그날〉에 등장한 철종-고종 가계도''' }}} || {{{#ffd400 '''흥선대원군 일가 가계도''' }}} || 본래 그는 [[인조]]의 3남인 [[인평대군]]의 [[후손|직계후손]]이기 때문에 [[조선/왕사|직계 왕통]]과 [[촌수]][* [[철종(조선)|철종]]과 같은 항렬이긴 하나 '''무려 16촌'''이나 되었기 때문에 [[헌종(조선)|헌종]]이 즉위할 시기에는 [[조선/왕사|국왕이 될 왕위계승권]]이 멀어도 정말 한참이나 멀었다. 그냥 남남인 무일푼 평민.]가 멀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 [[남연군]]이 [[정조(조선)|정조]]의 이복동생 [[은신군]]의 [[양자(가족)|양자]]가 되면서 [[조선/왕실|직계 왕실]]과 가까운 [[종친]]이 되었다.[* [[인평대군]]의 장남 [[복녕군]], 복녕군의 차남 [[의원군]], 의원군의 아들 [[안흥군]], 안흥군의 아들 이진익, 이진익의 차남 이병원, 이병원의 차남 [[남연군|이구]]가 [[은신군]]의 [[양자(가족)|양자]]로 입적되어 [[남연군]]이 되었다.] 그래서 [[남연군]]과 그의 아들 [[흥인군]], [[흥선군]] 모두 명예직이나마 고위 [[벼슬]]을 지내며 조정의 예우를 받았다. 참고로 남연군의 양부 [[은신군]]은 [[숙종(조선)|숙종]]의 서자 [[연령군]]에게 입적되었기 때문에, 흥선대원군 일가를 선원속보에서 찾으려면 연령군파 파보(派譜)를 봐야 한다. 그런데 [[효종(조선)|효종]]의 남자 후손들은 [[헌종(조선)|헌종]]이 즉위할 당시에 이미 많지 않아 절손 위기였기 때문에[* [[현종(조선)|현종]]과 [[숙종(조선)|숙종]] 두 왕이 적자는 물론 서자인 장성한 남자 형제마저도 없는 사실상 [[외아들|외동아들]]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한다. [[경종(조선)|경종]]의 후사 없음, [[영조]]의 장남 [[효장세자]]의 [[요절]], [[사도세자]]의 [[임오화변]]으로 [[죽음]], [[사도세자]]의 장남 [[의소세손]]의 [[요절]], [[정조(조선)|정조]]의 장남 [[문효세자]]의 홍역으로 인한 [[요절]]은 덤.], 여차하면 그나마 혈통으로 가장 가까운 다른 [[인조]] 아들들 중의 후손들 중에서 [[조선/왕사|왕위 계승]] 후보가 나올 수 있었다. 더군다나 [[효종(조선)|효종]]의 [[조선/왕사|왕위 정통성]] 문제와 [[정치|정치적]] 문제로 [[소현세자]]의 후손들은 사실상 제외되었기 때문에 만약 [[조선/왕사|직계 왕통]]이 단절된다면 실제 혈통으로는 [[인조]] 아들[* [[효종(조선)|효종]]의 사실상 유일한 동복 남동생 [[인평대군]]. 더 밑에 남동생은 [[용성대군]]이 또 있기는 한데 5살 때 [[요절]]했다. 당연히 후손도 없다.]의 후손이면서 법적으로는 [[은신군]]의 후손인 [[남연군]]의 자손 중에서 [[조선/왕사|왕]]이 나올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간혹 이 집안을 경계하는 이들이 있었다고 한다.[* [[철종(조선)|철종]] 시대 말기의 [[조선/왕실|왕족]]들은 [[은언군]], [[은신군]], [[은전군]]의 후손들이었다. [[은언군]]의 후손은 종손(宗孫) [[익평군]]과 [[전계대원군]]의 가계를 이을 [[영평군(1828)|영평군]] 뿐이었다. 이들은 모두 자식이 없어 [[입양]]을 했는데(사실 익평군은 [[경은군]]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그러나 [[서자]]인데다 [[익평군]]이 죽을 때 너무 어려서 가문을 잇지 못했다.) [[익평군]]은 [[덕안군|덕흥대원군의 후손]], [[영평군(1828)|영평군]]은 [[청안군(1851)|선조의 9남 경창군의 후손]]을 들였다. [[은전군]]의 가계 역시 [[입양]]으로 이어졌는데 역시 [[완평군|선조의 9남 경창군의 후손]]이었다. 실제 혈통상으로는 [[인평대군]]의 직계후손인 [[은신군]]-[[남연군]]의 가계가 [[조선/왕사|왕통]]과 가장 가까웠다.] 흥선대원군은 슬하에 3남 3녀를 두었다. 태어난 순서대로 적으면 서장남 [[완은군|완은군 이재선]], 적장남 [[흥친왕|흥친왕 이재면]], 적차남 [[고종(대한제국)|고종]]이다. 딸들의 [[나이]]는 기록에도 잘 알려져 있지 않고, 다만 장녀가 임천 조씨 조경호의 처, 차녀가 풍양 조씨 조정구의 처, 서녀가 우봉 이씨 이윤용의 처라는 것만 선원속보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적차남인 [[고종(대한제국)|고종]]이 즉위한 후 흥선대원군의 아들과 손자들은 대부분이 [[프리패스]], [[빽]]으로 그냥 출세했다. 흥선대원군이 대놓고 [[조선/왕실|왕실]]만 뽑아주는 특별 과거를 열어서 공부수준을 안보고 그냥 다 합격시켜 버렸고, 이 사람들은 당연히 흥선대원군의 주요 최측근으로 활동했다.[* 특히 장남 [[흥친왕|이재면]]의 아들로 흥선대원군의 장손인 [[영선군|이준용]]은 실제로도 유능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영선군|이준용]]은 흥선대원군이 수차례 일으킨 [[쿠데타]] 음모 중 마지막이자 가장 끈질기게 [[조선/왕사|다음]] [[대한제국/황사|보위]]를 노릴 차기 대상자로 꼽혀서, [[명성황후]] 등에게 여러 차례 목숨을 위협받았다. 그래서 [[일본제국|일본]]으로 상당 기간 도피해서 살았고, [[스트레스]] 및 흥선대원군의 장손이자 [[고종(대한제국)|왕]]의 큰조카라는 입장이 정치적으로 이용당해왔던 것과 [[조선/왕실|왕실]]에 대한 환멸감이 심한 나머지 오래 못 살고 죽었다.] [[고종(대한제국)|고종]]과 그의 일족들의 관계는 [[고종(대한제국)|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했던 짓들 때문에 정말 끝장나게 안 좋았다. 나중에 [[흥친왕|이재면]]은 소극적 친일, [[영선군|이준용]][* 이재면의 아들]은 적극적 [[친일파]]라는 이유로 [[친일인명사전]]에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정식 등재되었다. 흥선대원군은 셋째형 [[흥인군|흥인군 이최응]]과 그렇게도 사이가 나빴다고 한다. [[흥인군]]이 욕심 많고 무능해서 싫어한 듯. 거기다 흥인군은 흥선대원군이 실각한 뒤 [[명성황후|민씨]] [[여흥 민씨|일파]]의 편에 섰는데, 오죽하면 [[임오군란]] 당시 난을 일으킨 구식 [[군대]]와 [[민중]]이 [[흥인군]]을 죽이면서도 흥선대원군에게 적극 기댈 정도였다. 형제들의 [[이름]]을 보면 재미있는 [[규칙]]을 찾을 수 있다. 첫째는 [[흥녕군 이창응]](李'''昌'''應), 둘째는 [[흥완군 이정응]](李'''晸'''應), 셋째는 [[흥인군 이최응]](李'''最'''應), 막내가 흥선군 이하응(李'''昰'''應)인데 이최응을 제외하고는 전부 가운데 이름자의 [[부수]]가 날 일(日)자다. 이최응의 最의 부수는 갈 왈(曰)인데 아무래도 아버지 [[남연군]]이 이름을 지을 때 비슷한 [[글자]]를 골라서 [[항렬]]자에 맞게 붙인 것으로 보인다.[* 이는 흥선대원군과 같은 [[항렬]] 왕족들의 이름들도 마찬가지이다.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익종, 문조)의 이름은 '영('''旲''', '''日''' + 大)'이며, [[철종(조선)|철종]]은 [[조선/왕사|왕]]이 된 이후 원범에서 '변('''昪''', '''日''' + 弁)'으로 개명했다. [[은전군]]의 양손자 [[완평군]] 역시 첫 이름은 '병('''昺''', '''日''' + 丙)' 이었다가 '승응('''昇'''('''日''' + 升)應)'으로 바꿨으며, [[완평군]] 이전의 [[은전군]] 양손자였던 [[경평군(1832)|경평군]]의 이름 역시 '호('''晧''', '''日''' + 告)' 였다. [[은언군]]의 장손인 [[익평군]]의 이름 역시 '희('''曦''', '''日''' + 羲)'였고 철종의 큰형인 [[회평군]]도 원래 이름은 원경이었는데 '명('''明''', '''日''' + 月)'로 고친 것이다. [[영평군(1828)|영평군]] 역시 원래 이름은 '욱('''昱''', '''日''' + 立)' 이었다가 후일 '경응('''景'''('''日''' + 京)應)'으로 [[개명]]했다.] '''[[외가]], [[처가]], [[사돈]]이 모두 [[여흥 민씨]]라는 기이(?)한 기록을 갖고 있다.''' 흥선대원군의 [[부인]] [[여흥부대부인|여흥부대부인 민씨]]는 공조판서 [[민치구]]의 딸로 흥선대원군의 [[어머니]]인 군부인 [[여흥 민씨]][* [[인현왕후]]의 큰아버지인 좌의정 [[민정중]]의 5대손이다.(실제 혈통 상으로는 민정중과 민유중의 형 민시중의 5대손)]의 조카뻘(13촌)이다. 또한 [[며느리]]인 [[명성황후]]는 [[여흥부대부인|여흥부대부인 민씨]]의 동생뻘(12촌)이며[* [[여흥부대부인]] 민씨의 동생(처남) [[민승호]]가 [[명성황후]]의 아버지 [[민치록]]의 [[양자(가족)|양자]]로 들어갔다.] 손자며느리인 [[순명효황후 민씨]]는 [[명성황후]]의 조카뻘(13촌)이다.[* 따라서 [[명성황후]]-[[여흥부대부인]]과 [[흥선대원군]]은 [[여흥 민씨|민씨 집안]] 기준으로는 서로 14촌 조카 남매이다.] [[대한민국]]의 [[군인]]이자 [[정치인]]이었던 [[이종찬(1936)|이종찬]] 前 [[국가정보원장]]이 그의 외외증손자이다. [[이종찬(1936)|이종찬]]의 외할머니가 흥선대원군의 둘째 딸이다. 전 노동당 대표 홍세화도 역시 그의 후손이다. 홍세화의 외증조부가 이종찬의 어머니와 남매관계이다. == [[흥선대원군/생애|생애]]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흥선대원군/생애)] == [[흥선대원군/평가|평가]]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흥선대원군/평가)] == [[흥선대원군/여담|여담]]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흥선대원군/여담)] == [[흥선대원군/기타 창작물|대중매체]]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흥선대원군/기타 창작물)] == 관련 문서 == * [[갑신정변]] * [[갑오개혁]] * [[갑오경장]] * [[경복궁]] 중건 * [[경원군(1842)|경원군 이하전]] * [[고종(대한제국)|고종]] * [[고종실록]] * [[공자]] * [[김병학]] * [[김옥균]] * [[김좌근]] * [[김정희]] * [[김홍집]] * [[남연군]] * [[남연군묘]] * [[당백전]] * [[대원군]] * [[대원군천진왕환일기]] * [[대한제국]] * [[대한제국/황사]] * [[대한제국/황실]] * [[동학]] * [[동학농민운동]] * [[명성황후]] * [[민승호]] * [[민승호 암살 사건|민승호 폭살 사건]] * [[박영효]] * [[박은식]] * [[병인박해]] * [[병인양요]] * [[사도세자]] * [[서광범]] * [[서원 철폐]] * [[세도 정치|세도정치]] * [[순종(대한제국)|순종]] * [[순종실록]] * [[순헌황귀비|순헌황귀비 엄씨]] * [[승정원일기]] * [[신미양요]] * [[신정왕후 조씨|신정왕후]] * [[아관파천]] * [[여흥부대부인|여흥부대부인 민씨]] * [[영선군|영선군 이준용]] * [[영친왕|의민황태자 영왕]](영친왕 이은) * [[오페르트 도굴 사건]] * [[완은군|완은군 이재선]] * [[운현궁]] * [[‘운현’이 쓰여진 영지 넝쿨무늬 병]] * [[‘운현’이 쓰여진 영지 넝쿨무늬 항아리]] * [[원납전]] * [[유길준]] * [[의친왕]] * [[은신군]] * [[을미개혁]] * [[을미사변]] * [[을병일기]] * [[이경하]] * [[이완용]] * [[이우]] * [[이재극]] * [[이항로]] * [[일성록]] * [[임오군란]] * [[전봉준]] * [[제너럴 셔먼호 사건]] * [[조두순(조선)|조두순]] * [[조선/왕사]] * [[조선/왕실]] * [[조선왕조실록]] * [[척화비]] * [[철종(조선)|철종]] * [[철종실록]] * [[최익현]] * [[최제우]] * [[통상 수교 거부 정책]](쇄교정책) * [[화계사]][* 흥선대원군이 개인적으로 후원한 왕실 원찰이다.] * [[헐버트|헐버트 박사]] * [[호포제]] * [[흥녕군]] * [[흥선대원군 이하응필 묵란도]] * [[흥완군]] * [[흥원]](흥선대원군묘) * [[흥인군]] * [[흥친왕]] == 둘러보기 == [include(틀:흥선대원군)] ---- [include(틀:대한제국 황실)] [각주][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흥인군, version=1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