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복사(興福寺)''' [목차] == 개요 == [[삼국시대]], [[고려]]시대 및 [[조선]]시대에 있었던 동명의 각기 다른 사찰들이다. 한국에서 현존하는 '흥복사'라고 불리는 사찰들은 모두 재건한 건물들이며, [[일본]]의 [[나라시]]에도 한자까지 완전히 똑같은 사찰이 존재한다. == 전라도 == 고구려의 승려 [[보덕(승려)|보덕]]이 [[전라북도]] [[김제시]] 승가산(僧伽山)에 '승가사(僧伽寺)'라는 이름의 절을 창건하였는데, 이는 당시 고구려가 도교를 숭상하려 하자 보덕이 불교 부흥을 [[보장왕]]에게 건의했을 때에 거부당해서 결국 백제로 내려와 지었던 것이다. 이후 여러 중건과 중수를 거듭했다가 [[정유재란]]으로 인해 불타버렸다. 인조 대에 한 흥복처사가 김제의 극락전을 중건하여 그곳을 흥복사라고 불렀는데, 이때의 극락전도 결국 퇴락하였기에 현존하는 극락전이나 정혜원(定慧院)은 1920년대에 건립한 것이다.[* 이 극락전에는 [[숙종(조선)|숙종]] 대에 지어진 '흥복사 대웅전 목조삼존불좌상'을 볼 수 있다.] 미륵전, 삼성각(三聖閣), 사천왕문(四天王門), 요사 등은 1970년대에 중건하였다. == 평안도 == 고려시대 [[문종(고려)|문종]] 대부터 기록이 존재하는 [[평양시]]의 사찰[* 다만 이미 1053년(문종 7년) 음력 10월부터 흥복사로 행차한다는 [[고려사]] 및 [[고려사절요]]의 서술로 보아 창건 자체는 더 이전으로 보인다.]로 당시 왕실의 행차가 빈번했던 중요한 사찰이었다. [[보한집]]에 의하면 [[오학린]]도 이곳을 자주 놀러간 듯하다. 1168년([[의종(고려)|의종]] 22년) 이후 고려 관련 사서에서는 더 이상 언급되지 않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평양부 남쪽 백보 거리에 흥복사가 존재한다는 기록이 있기에 아마도 15~16세기까지는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경기도 == 조선시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신동|신원동]]에 있었던 [[월산대군]]의 원찰(願刹)[* 죽은 사람의 화상이나 위패를 모시고 그 원주(願主)의 명복을 빌던 법당을 뜻한다.]이다. 1488년([[자을산군|성종]]19) [[세조(조선)|세조]]의 장손이자 [[성종(조선)|성종]]의 친형이었던 [[월산대군]]이 35세의 나이로 요절하자 평소 독실한 [[불자#s-1|불자]]였던 정실 [[승평부대부인|승평부대부인 박씨]][* 1455년(세조1)에 태어났으며, 본관은 [[순천 박씨|순천]](順天)이다. 평양군 박중선의 [[장녀]]이자 중종반정 1등 공신 [[박원종]]의 큰누님이자 성종의 형수이자 [[연산군]]과 [[중종(조선)|조선]]의 큰어머니이기도 하고, 중종의 계비인 [[장경왕후]]의 [[이모]]다. 월산대군이 요절하자 묘 근처에 원찰인 흥복사를 창건하고 불사를 자주 일으켜 남편의 명복을 빌면서 지내다가 1506년(연산군12)에 5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가 1490년(성종21) 남편의 묘 근처에 흥복사라는 원찰을 창건했다. 당시 [[성종(조선)|성종]]과 [[소혜왕후|인수대비]]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규모가 매우 큰 [[절(불교)|절]]이었으며 박씨 부인은 월산대군의 명복을 빌기 위해 흥복사에서 자주 불사(佛事)를 일으켰다. 여기에서 법회를 개최할 때면 사대부가의 부녀자와 [[승려]]들이 대규모로 참여하여 성황을 이루기도 하였다. 하지만 현재 흥복사는 사라져서 터만 남은 상태이며 대신 그 자리에 월산대군 사당이 자리 잡고 있다. 흥복사가 왜 없어지게 되었는지는 기록에 자세히 남아 있지 않다. [[분류:한국의 절터]][[분류:조선 시대의 없어진 건축물]][[분류:월산대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