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신라 국왕)]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3A2646 0%, #4A2D5B 20%, #4A2D5B 80%, #3A2646); color: #fbe673" '''신라 제16대 국왕[br]{{{+1 흘해 이사금 | 訖解 尼師今}}}'''}}} || ||<|2> '''출생[br]{{{-3 (음력)}}}''' ||[[249년]] {{{-2 또는}}} [[253년]]?[* 아버지인 [[석우로]]가 죽은 해인 [[249년]] 혹은 [[253년]]에 걷지 못한 갓난아기였다는 기록이 있어 대략 이 즈음에 출생했을 것으로 보이나 흘해 이사금이 즉위 당시 나이가 어렸다는 기록이 있어 확실하지 않다.] || ||[[사로국]] [[서라벌]] || ||<|2> '''사망[br]{{{-3 (음력)}}}''' ||[[356년]] [[4월]] (향년 103~107세?) || ||[[사로국]] [[서라벌]] || || '''능묘''' ||미상 || ||<|2> '''재위기간[br]{{{-3 (음력)}}}''' ||'''{{{#fbe673 신라 제16대 국왕}}}'''|| ||[[310년]] [[6월]] ~ [[356년]] [[4월]] {{{-2 (45년 10개월)}}}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본관''' ||[[경주 석씨]] || || '''휘''' ||흘해(訖解) / 걸해(乞解) || || '''부모''' ||부친 [[석우로]][br]모친 [[명원부인]] || || '''왕후''' ||공한, 왕녀의 모후 || || '''자녀''' ||왕자 [[공한|석공한]](?)[* 정사인 《[[삼국사기]]》에는 등장하지 않고 《[[삼국유사]]》에서만 등장한다.][br]왕녀 공주 || || '''왕호''' ||'''흘해 이사금(訖解 尼師今)''' || || '''별호''' ||걸해 이사금(乞解 尼師今) ||}}}}}}}}} || >'''우리 가문을 부흥시킬 자는, 반드시 이 아이일 것이다.''' >興吾家者, 必此兒也. >---- >용모, 재능 모든 것이 출중한 자식을 본 아버지 석우로의 말이다. [목차] [clearfix] == 개요 == [[신라]]의 제16대 군주. 《[[삼국유사]]》에 따르면 [[이사금]] 칭호를 쓴 마지막 군주이다. '''신라 역사상 [[석씨]] 왕실의 마지막 군주'''로 아버지는 명장 [[석우로]]이고, 어머니는 [[조분 이사금]](제11대)의 장녀 [[명원부인]] 석씨이다.[* 《[[삼국사기]]》 <석우로 열전>과 《[[일본서기]]》 기록에 따르면 아들과 함께 신라에 파견나와 있던 왜의 대사를 죽이고, 남편 석우로의 원수를 갚았다고 하는데, 아들이 흘해 이사금과 동일인인지는 불명이다. 한편 이 사실을 들은 왜의 대왕(오오키미)이 대노하자 신라에서 그를 달래기 위해 석우로의 아내를 처형했다고 하는데 《일본서기》 기록이 꾸준히 자신들과 삼국의 위치를 바꿔놓는다는 것을 감안해보면 석우로의 아내를 처형시켰다는 부분은 허황된 기록이거나 신라에서 [[외교]] 마찰을 피하려고 거짓으로 그녀를 처리했다고 둘러댔을 가능성이 있다.] 아버지인 [[석우로]]의 말에 따르면 흘해 이사금은 외모가 매우 훌륭하고, 담력이 있으며 총명하고 민첩하여 일 처리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다고 한다.[[https://db.history.go.kr/item/level.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20&page=1&pre_page=1&setId=-1&totalCount=0&prevPage=0&prevLimit=&itemId=sg&types=r&synonym=off&chinessChar=on&brokerPagingInfo=&levelId=sg_002r_0100_0010&position=-1|#]] 《[[삼국사기]]》 기년으로만 보면 의문이 생긴다. 《삼국사기》 <석우로 열전>에서는 석우로가 처참하게 살해당할 때, 흘해 이사금은 어려서 걷지도 못했다고 하는데 석우로는 249년 혹은 253년경에 죽은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석우로가 죽은 그 해에 [[유복자]]로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흘해 이사금이 죽을 때의 나이는 102세가 된다. 석우로가 죽은 해에 태어났다고 쳐도 흘해 이사금이 즉위하는 해로 기록된 310년에는 60세에 가까운 나이였을텐데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는 >'흘해는 어리지만 나이많은 사람의 덕이 있다며 왕위에 올렸다.' 는 말이 나오니 더욱 말이 안 된다. 사실 최근 정설은 기년이 잘못되었다는 것이고, 석흘해는 석우로의 아들이 맞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흘해 이사금 이전 임금들의 재위기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사실 박, 석, 김씨 족단 우두머리로 재위한 기간과 신라 전체의 대표로 재위한 기간이 다른데, 건국 시조인 박혁거세의 연대를 고구려보다 앞서도록 끌어올리기 위해 일률적으로 재배치했거나 아니더라도 상당 부분은 실제로 겹쳤던 재위기를 늘였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이런 연대 내리기는 무리있는 해석이 아니며, 하지 않으면 고구려사, 백제사를 비롯한 고고학적 조사 결과는 물론이고, 중국측 문헌과도 아예 연대 자체가 맞지 않게 된다. 다만 이렇게 했어도 아예 남래 시점이 기원전 190년 수준인 [[마한]] [[건마국]]보다 건국 연대를 올리는 건 불가능했으며, 그래서 이후 신라측 기록에선 백제를 마한과 동일시하지 않게 된 것이다.] == 석씨 왕실의 몰락 == 석씨 [[왕실]]의 마지막 군주로 이후 석씨 왕실은 석씨 어머니를 둔 [[실성 마립간]](제18대)을 제외하고는 신라 왕계에서 모습을 감추게 되며, 주로 고위 [[귀족]] 위주로 남은 [[역사]] 기록에서도 석씨 인물과 관련 기록이 급감한다.[* 신라 중기 이후로 석씨 세력이 신라에서 완전히 몰락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일본]]측 사서인 《[[속일본기]]》에 기록된 723년 8월 8일 일본에 갔다온 사신단 중 부사가 한나마(대나마) 석양절(昔楊節)이다. 석씨가 [[통일신라]] 시기에도 최소 [[5두품]] 이상의 귀족이었던 것이다.] 먼저 [[아달라 이사금]](제8대) 이후 [[왕위]] 계승에서 빠져버린 박씨 왕실은 이후에도 [[왕비]]를 배출하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는 잠깐이나마 다시 [[신덕왕|박경휘]]가 제53대 왕위에도 오르는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라 볼 수 있다. 석씨 왕실의 몰락에 관해서는 각종 설이 난무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신라/왕사]] 참조. == 재위 == 재위 기간 내내 [[왜]]와의 [[전쟁]]에 시달렸다. 왜의 침입을 줄여보고자 즉위 3년(312년) 왜왕[* 왜왕이 누군지는 모른다. 하필 《일본서기》의 [[이주갑인상]]으로 뭉개진 시점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다만 《신찬성씨록》에서 초대 [[진무 덴노]]의 형인 [[이나히노미코토]](稲飯命)가 신라 왕가와 조상이 같다고 서술되어 있으므로 왜왕은 [[우가야후키아에즈]]일 가능성이 높다.]의 아들과 [[아찬]] 급리의 딸을 [[결혼]]시켰다. 왜는 30여 년 뒤인 344년 왜왕이 다시 [[공주]]와의 혼례를 요청[* 왜국 측은 [[왕자]]인데 신라 측은 [[신하]]의 딸이라 급이 안 맞아서 [[재혼]]을 요구한 듯 하다.]해오나 공주가 이미 결혼했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사실 아버지 석우로가 왜인들에 의해 끔찍하게 [[화형]]당해 죽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흘해 이사금은 왜국이 정말 싫었을 것이다. 혼인 거부로 인해 왜는 345년 외교를 단절했고, 346년에 군사를 보내 [[경주시|경주]]를 포위했으나 [[식량]]이 떨어질 때까지 [[방어]]한 후 퇴각하려 하자 [[기병]]으로 공격해 격파했다. 즉위 21년(330년)에 [[벽골제]]를 건설했다고 하는데 벽골지가 있는 지금의 [[전라북도]] [[김제시]]는 당시 어떻게 봐도 [[백제]]의 영토다. 남의 나라, 그것도 적국에 방둑이 1,800보나 되는 [[저수지]]를 쌓았다는 기사는 신빙성이 떨어진다. 당시 신라 내에 벽골지라는 [[지명]]이 따로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단 흘해 이사금이 벽골제를 건설했다는 언급은 《[[삼국유사]]》에도 공통적으로 나오기 때문에 백제의 서술이 잘못 기록되었을 가능성은 낮다. 그리고 당시 백제가 직접 지배하던 영역은 현재의 [[경기도]]를 중심으로 [[충청도]]까지 뻗어있기는 했으나 엄연히 당시 전라북도 김제시는 [[마한]] 연합의 일원으로서 백제의 간접적 영향권에는 들어있는 나라였다. 그런데 신라가 괜히 간접적으로라도 대립 관계에 있는 백제한테 좋은 일을 해주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벽골제가 있는 전라북도 김제 지역은 어떻게 봐도 신라 땅일 수 없으므로 최근의 [[고고학]]적 조사는 벽골제가 4세기 초 마지막으로 번성했던 마한의 흔적일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즉위 41년인 350년엔 큰 [[홍수]]가 나서 관청과 가옥들이 다 떠내려가고 산이 13개(30군데라고도 함)나 무너졌다고 한다. 356년 [[승하]]했고, [[아들]]이 없었기에[* 《삼국유사》에 따르면 석[[공한]](功漢)이라는 이름의 아들이 있었다. 석공한의 아들이 석[[길승]](吉升)이고, 석길승의 아들이 바로 유명한 [[이차돈]]이라고 한다. 훗날 [[소지 마립간]](제21대)에게 분명히 아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증왕]](제22대)이 왕위에 오른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김씨인 [[내물 마립간]](제17대)이 다음 왕위를 이었다. 이때까지는 석씨가 완전히 몰락했던 것은 아니지만 다음 세대에 일어날 여러 사건들로 결국 석흘해가 석씨 마지막 왕으로 남게 됐다. == 《[[삼국사기]]》 기록 == [include(틀:삼국사기)]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642678&cid=49615&categoryId=49798|《삼국사기》 <흘해 이사금]] 본기>''' 一年夏六月 흘해 이사금이 즉위하다 二年春一月 급리를 [[아찬]]으로 삼다 二年春二月 시조묘에 [[제사]]지내다 三年春三月 [[왜국]] 왕이 [[혼인]]을 청해 와서 아찬 급리의 딸을 보내다 四年秋七月 백성들이 굶주려 사신을 보내 구휼하다 五年春一月 아찬 급리를 이찬으로 삼다 五年春二月 궁궐을 중수하다가 비가 오지 않아서 그만두다 八年 봄과 여름에 가물어서 왕이 죄수를 사면하다 九年春二月 농사에 방해되는 일을 금지시키다 二十一年 [[벽골제|벽골지]]를 만들다 二十八年春二月 백제에 사신을 보내 예방하다 二十八年春三月 우박이 내리다 二十八年夏四月 서리가 내리다 三十五年春二月 왜국에서 사신을 보내 혼인을 청하였으나 거절하다 三十五年夏四月 [[폭풍]]이 불다 三十六年春一月 강세를 [[이벌찬]]으로 삼다 三十六年春二月 [[왜]]왕이 문서를 보내 [[국교]]를 끊다 三十七年 왜병이 [[금성]]을 포위하자 [[이벌찬]] 강세가 물리치다 三十九年 궁의 우물물이 갑자기 넘치다 四十一年春三月 [[황새]]가 [[경주 월성|월성]] 귀퉁이에 집을 짓다 四十一年夏四月 수해로 관청과 민가가 물에 잠기고 산이 무너지다 四十七年夏四月 왕이 죽다 47년이라는 긴 재위 기간에 비하면 [[기록]]이 매우 빈약하다. 특히 벽골제 운운하는 21년조 기사를 빼고 보면 즉위 9년~28년 사이의 기록이 전무한 것이 인상적이다. 흘해 이사금을 끝으로 제8대 [[아달라 이사금]]부터 시작한 《삼국사기》 2권이 마무리된다. == 둘러보기 == [include(틀:신라 왕실)] [각주] [[분류:이사금]][[분류:경주 석씨]][[분류:356년 사망]][[분류:망국의 군주]][[분류:경주시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