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송 황제)]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277449 0%, #2e8b57 20%, #2e8b57 80%, #277449); color: #ece5b6" '''남송 제11대 황제[br]{{{+1 효종 성황제 | 孝宗 成皇帝}}}'''}}}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Xiaozong.jpg|width=100%]]}}} || ||<|2> '''출생''' ||[[1127년]] [[11월 27일]] || ||[[남송]] [[자싱시|수주]] 수왕 사저[br](現 [[저장성]] [[자싱시]]) || ||<|2> '''즉위''' ||[[1162년]] [[7월 24일]] || ||[[남송]] [[항저우시|임안부]] 황궁[br](現 [[저장성]] [[항저우시]] 린안구) || ||<|2> '''사망''' ||[[1194년]] [[6월 28일]] (향년 66세) || ||[[남송]] [[항저우시|임안부]] 황궁 중화전[br](現 [[저장성]] [[항저우시]] 린안구) || || '''능묘''' ||영부릉(永阜陵) || ||<|6> '''재위기간''' ||'''{{{#ece5b6 남송 황태자}}}''' || ||[[1162년]] [[7월 12일]] ~ [[1162년]] [[7월 24일]] || ||'''{{{#ece5b6 제11대 황제}}}''' || ||[[1162년]] [[7월 24일]] ~ [[1189년]] [[2월 18일]] || ||'''{{{#ece5b6 남송 태상황}}}''' || ||[[1189년]] [[2월 18일]] ~ [[1194년]] [[6월 28일]]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성씨''' ||[[조(성씨)|조(趙)]] || || '''휘''' ||백종(伯琮) → 신(昚) / 원(瑗) / 위(瑋) || ||<|2> '''부모''' ||친부 [[조자칭|수안희왕]][br]모후 수안희왕부인 || ||양부 [[고종(송)|고종]][br]양후 [[헌성자열황후]] || || '''배우자''' ||[[성목황후]], [[성공황후 하씨|성공황후]], [[성숙황후]] || || '''자녀''' ||4남 2녀 || || '''자''' ||원괴(元瑰) → 원영(元永) || || '''작호''' ||건국공(建國公) → 보안군왕(普安郡王) → 건왕(建王) || || '''묘호''' ||'''[[효종]](孝宗)''' || || '''존호''' ||지존수성태상황제[br](至尊壽聖太上皇帝) || || '''시호''' ||소통동도관덕소공철문신무명성성효황제[br](紹統同道冠德昭功哲文神武明聖成孝皇帝) || || '''연호''' ||융흥(隆興, [[1163년]] ~ [[1164년]])[br]건도(乾道, [[1165년]] ~ [[1173년]])[br]순희(淳熙, [[1174년]] ~ [[1189년]])[* 연호에서 유래한 순희제(淳熙帝)[[http://thesaurus.itkc.or.kr/dir/list;jsessionid=8E53ADC04FE94F92A03756DD3448987D?dataId=11954|#]]라는 별칭이 있다.] || || '''절일''' ||회경절(會慶節) || }}}}}}}}} || [목차] [clearfix] == 개요 == [[남송|송나라]]의 제11대 [[황제]].[* 북송 때부터의 전체 대수를 말하는 것으로, 남송 만으로 하면 2대 황제.] [[묘호]]는 효종(孝宗), 시호는 소통동도관덕소공철문신무명성성효황제(紹統同道冠德昭功哲文神武明聖成孝皇帝). 휘는 조신(趙昚). [[연호]]는 융흥(隆興), 건도(乾道), 순희(淳熙)를 사용했다. 아들인 [[광종(송)|광종]]에게 선위 후 [[지존]]수성태상황제(至尊壽聖太上皇帝)의 [[존호]]를 받아 송 수황(壽皇)이라고도 한다. == 생애 == 북송의 초대 황제인 [[태조(송)|송 태조 조광윤]]의 둘째 아들 [[조덕방]]의 6대손[* 북송의 황제는 조광윤을 제외하면 모두 조광윤의 동생인 [[태종(송)|송 태종 조광의]]의 후손들이다. 송 고종 또한 조광의의 후손이다. 반대로 남송은 고종만이 조광의의 후손이고 모두 조광윤의 후손이다.]으로 [[조자칭]]의 아들이었으며, [[고종(송)|송 고종]]의 양자이다. === [[후계자]]로의 부상 === 효종이 고종의 친자식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황제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는 첫 번째로 고종의 아들인 원의태자(元懿太子) [[조부(남송)|조부]]가 묘유병변(苗劉兵變) 이후 요절한데다, 두 번째로 유력 황족들인 [[태종(송)|송태종]]의 후손들이 거의[* 송태종의 장남 [[조원좌]]의 후손인 [[조여우]] 등 남송에 남아있는 후손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정강의 변]] 때 [[금나라]](金)로 잡혀갔기 때문이다. 게다가 송 고종 자신이 이후 후사를 보지 못했기에, 남아있는 송 태조([[조광윤]])의 자손들[* 1,000명이 넘었다고 한다.] 중에서 후계자를 선정하고자 했던 것. 이렇게 하여 조광윤의 후손들 중에서 조신(趙眘)[* 본명은 조백종(趙伯琮)이었지만, 황태자로 책봉된 이후 조신(趙眘)으로 고쳤다.]과 조거(趙璩) 2명이 선정되어 황궁에서 양육되었으며, 장성한 후에는 공작(公) 작위를 받고 이어서 군왕(郡王)으로 봉해지며 유력한 대권주자로 급부상한다. 하지만 송 고종은 여전히 후사에 미련을 두고 "노력"을 기울였으며, 조신의 주전론(主戰論) 성향을 못마땅하게 여긴 재상 [[진회]]의 견제[* 조신의 생부 [[조자칭]]이 세상을 떠나자, 고향으로 내려가 3년상을 치를 것을 상소해, 고종의 기억에서 조신을 지워버리고자 하였다. 다행히 3년상을 치른 후에도 조신을 기억하고 있었던 고종 덕분에 다시 황궁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로 인해 후계자 선정은 자꾸 늦춰졌다. 게다가 태후인 [[현인황후|위씨]](韋氏)가 조신의 경쟁자 조거(趙璩)에게 뜻을 두었기 때문에, 송 고종은 위태후의 생전에는 후계자를 공표하지 못했다. 후계자 선정을 결정지은 건 성욕(性慾)이었다. 조신과 조거 모두 황궁에서 공들여 지도자로 육성한 인재였던만큼, 고종은 좀처럼 결정을 내리지 못했고, 마지막 방법으로 30대 한창의 나이였던 두 왕에게 각각 10명의 미녀(美女)를 보내, 이후의 일을 살핀 후 조신을 황태자로 최종 낙점한다. 조거에게 보낸 미녀들은 하나같이 조거가 [[검열삭제|손을 잡았]]지만, 조신은 스승인 사호(史浩)의 충고를 받아들여 자신을 절제했던 것. === 건순지치(乾淳之治)[* 건도, 순희 연간에 선정(善政)이 펼쳐졌다는 뜻이다.] === 황태자가 된 지 2년 후 [[채석기 전투|금나라가 침입]]했지만 이를 격퇴했다.[* 아직 젊은 혈기가 남아있는 조신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가 막겠다"고 상소를 올린 걸 알게 된 스승 사호가 충고해 → "황태자 본인의 성급함을 인정하고 사죄하며, 황제와 함께 출정할 것을 청하는 내용"으로 다시 상소를 올리는 해프닝이 있었다고 한다.] [[금나라]] 군대가 물러간 후 몇개월 안가 고종은 양위를 선언하고, 36살의 나이로 황제가 되었다. 효종은 고종과 달리 북쪽 영토 수복에 비교적 적극적인 입장이었고, 그가 황제가 되었을때 이미 [[진회]]는 사망한 후였지만 그의 일가가 권력을 휘두르는걸 못마땅하게 여겨 권력 승계를 막았다. 이런 흐름 속에서 즉위 후 억울하게 죽은 명장(名將) [[악비]]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한 편, 주화파 대신 주전파의 핵심인 장준을 재상으로 삼아, 상무(尙武)의 기풍을 되살렸다. 융흥 원년에는 북벌을 시행하여 금(金)나라에 빼앗긴 영벽과 숙주를 되찾았지만, 북벌의 핵심이었던 노장(老將) [[이현충]]과 [[추굉연]] 두 사람이 반목했으며, 다시 금나라의 맹렬한 반격을 받아 숙주를 다시 빼앗기고 부리집에서 참패한다. 이 패배로 국방력을 재건하며 키워나가려던 남송은 타격을 받았고, 결국 효종은 주화파 대신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참고로 일단 큰 전쟁은 피해 내부 안정을 꾀하고자 했던 선대(先代) 송 고종이, 금나라와의 '''"군신(君臣) 관계"''' 수립의 굴욕까지 감수한 덕분에, 남송의 사회 분위기는 안정적이었다고 한다. 때문에 화평 정책에 찬성하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으며, 더욱이 상황(上皇) 신분인 고종도 (아직은) 화평이 '국익에 더 도움된다고 생각했기에, 틈만 나면 주전론(主戰論)에 대한 반대 의사를 표시하며 효종을 압박했다.] 체면을 감수하고 금나라와 화의를 맺는다. 이후에도 북벌의 희망을 버리지는 않았지만, 일반 백성들의 살림살이를 먼저 챙기며 내실을 다지고 민심을 안정시키고자 부단히 노력하였다. 구휼제도 개선에 착수해 성과를 보였으며, 국가가 염상(鹽商)들에게 진 빚을 모두 갚아 소금 전매제를 실시 → [[민영화|민영 자본이 올려놓은 소금 가격]]을 안정시켰다. 이 외에도 각종 부가세를 줄이니 → 조정의 세수는 확대되면서도 일반 백성들의 실제 부담은 줄어들었다. 여기에 매관 매직을 금하고 가문이 좋으면 관리가 되던 관행까지 고쳐, 능력 있는 인재를 선발하는 체제를 구축하였다. 이런 노력 덕분에, 남송(南宋)은 국력을 신장(伸張)하며 내외 안정을 다질 수 있었다. 남송이 이후 금나라와의 전쟁이나 몽골의 침략을 받는 악조건에도, 120년을 버틴 기반이 효종 시기에 마련된 것. 이 효종의 재위 시기를 이른바 '건순지치(乾淳之治)'라고 부르기도 한다. 효종은 지난 30여년 동안 [[금나라]]의 침략 위험과 직전 [[진회]][* 물론 현대 들어 진회에 대한 재평가가 약간 이루어지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중국에서는 '''간신의 대명사'''로 진회를 꼽는 사람이 부지기수다.]의 공포 정치로 인해 경직되었던 [[남송]]이, 120년을 더 지탱할 수 있었던 기반을 다진 [[명군]]이었다. 하지만 동시대 [[금나라]]엔 '''작은 요순'''이라 불릴 정도의 명군이었던 [[세종(금)|금 세종]]이 있었고, 송 효종은 번번히 금 세종에게 발목을 잡혀 생전에 북벌의 숙원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외교적으로는 신장된 남송(南宋)의 국력을 바탕으로 군신(君臣) 관계로까지 전락한 송나라와 금나라의 관계를 숙질(숙부~조카) 관계로 완화시켰다. 무엇보다 세폐를 줄이려고 노력한 끝에 → 고종 시절 금나라에 지불하던 세폐의 절반만 지불하게 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효종은 어릴때부터 [[태상황]]이었던 양부 고종과 양모 오태후를 극진히 모시던 효자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고종은 안 그래도 어려운 나라 살림에 유유자적하며 소일에만 몰두했다. 그러면서도 온갖 조정일에는 간섭하고 효종의 북벌에도 걸림돌 역할을 제대로 하는 등 그에게 도움을 주기는 커녕 사사건건 태클을 걸기에 급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효종은 최대한 고종의 비위를 맞추고 극진히 모시고자 노력하였다.[* 한번은 잔치에서 효종이 술에 크게 취해 태상황 폐하께 많은 돈을 바치겠다고 실언한 일이 있었는데, 다음날에도 이를 기억한 고종이 이 일을 까맣게 잊고 있던 효종에게 은연 중에 그때 약속한 돈은 언제 줄거냐고 따졌다. 효종은 당시 술에 너무 취해 한 말이라서 당황했는데, 다행스럽게도 옆에 있던 오태후가 '황상께서 그 말씀을 하시고 신첩에게 돈을 맡겨두셨다'고 한 뒤 자기 사재를 대신 털어 고종에게 바친덕에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다. 이후 효종은 오태후가 자신의 실수를 뒤처리해주고 효종이 고종에게 원망들을 수 있는 꼬투리도 잡히지 않게 해준 것을 감사해했다. 따라서 자신의 사재를 털어 그 몇배나 되는 은전을 오태후에게 드리고 양모를 더욱 극진히 모셨다고 한다.] 오죽하면 황제임에도 고종의 수레바퀴를 직접 밀고 말까지 몰았다고 한다. == 가족 관계와 후손 == 효종은 3명의 황후가 있었는데, 첫번째 황후인 [[성목황후]] 곽씨(聖穆皇后 郭氏)는 효종이 즉위하기 전인 1156년에 세상을 떠나 황후로 추존되었다. 2번째 황후인 [[성공황후]] 하씨(成恭皇后 夏氏)는 효종이 즉위하고 5년 뒤인 1167년에 세상을 떠났다. 3번째 황후인 [[성숙황후]] 사씨(成肅皇后 謝氏)는 효종이 광종에게 제위를 물려준 이후 태상황후가 되었고, 1194년 효종이 세상을 떠난 이후 황태후가 되었으며, 광종이 퇴위하고 광종의 아들인 [[영종(남송)|영종]]이 즉위했을 때 태황태후가 되어 1203년에 세상을 떠났다. 효종에게는 4남 2녀가 있었는데 자식운은 영 좋지 못했다. 장남 장문태자 [[조기(남송)|조기]]가 어이없는 일로 [[요절]]해서[* 태자가 병에 걸렸는데 의사가 약을 잘못 처방해서 병이 악화되었다. 효종과 고종이 정성을 다해서 조기의 병세를 살폈지만 결국 조기는 병으로 죽고 말았다.] 차남 위왕 [[조개(위왕)|조개]]를 태자로 삼으려고 했다.[* 시호는 혜헌왕(惠憲王).] 그런데 3남 조돈이 효성이 지극하고 온순해서 마음에 들었는지 덜컥 조돈을 태자로 삼아 버리자 이에 조개는 억울했는지 [[홧병]]에 걸려 생을 마감했으며, 막내 아들 소왕(邵王) 조각[* 시호는 도숙왕(悼肅王).]과 두 공주도 요절했다. 때문인지 효종은 1189년 덜컥 태자 조돈에게 양위 후 중화궁(重華宮)에 기거하였고 조돈은 양위를 받아 [[광종(송)|광종]]으로 즉위했으나, 문제는 태생이 온순하나 심약하였고 [[공처가]]라 [[자의황후|부인]]의 이간질에 효종과 점점 사이가 멀어지고 광종 본인도 스트레스로 정신병까지 얻게 되었다. 결국 효종은 말년까지 애먹이던 양아버지 태상황 고종을 모시다 그가 죽고 난 후 얼마 안되어 아들인 광종에게 양위했지만, 광종과도 멀어지면서 결국 1194년 씁쓸한 최후를 맞고 영부릉에 안장되었다. == 악비 사랑 == 특기할 만한 점이 있다면 남송 시대의 명장이자 간신 [[진회]]에 의해 억울하게 살해당한 [[악비]]에 대한 사랑이 지극했다는 것. 즉위하자마자 악비를 왕으로 봉하여 명예를 회복시킨 걸 시작으로 악비의 무덤을 크게 증축했으며 수감된 악비의 가족들을 풀어주기까지 했다. 또한 악비의 아들들인 악림, 악진, 악애 형제를 무관직에 전격 발탁하였으며 심지어 악비의 5남인 악애에게는 황제 본인이 정이라는 이름을 친히 하사하고 악비의 사위인 고조와 악비의 장손인 악침까지 벼슬길에 오르도록 하는 모습도 보였다. 효종의 악비사랑이 얼마나 지극했는지는 송사의 기록에도 나온다. 악비의 아들들이 효종에게 부친의 억울함을 성토하는 일이 있었는데, 이게 좀 지나쳐서 효종의 꼭지가 돌아갈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효종은 오히려 악비의 억울함을 짐이 모르겠냐며 악비의 아들들을 달래주었고 그 이후에도 악비의 아내와 가족들을 정성껏 돌봐주었다고 한다. 얼마나 감사했던지 악비의 아내는 황은에 감사하다며 눈물을 흘렸을 정도. 그러나 그러한 악비 사랑이 지나쳤는지 그를 모함하여 죽음에 이르게 한 [[진회]]를 극도로 증오하기도 했다. 자신의 치세 동안 진씨들의 관직길을 죄다 틀어막은 건 기본에, 심지어 진회의 죄를 [[연좌제|진회의 일족에게 물어]] 진씨 일족을 멸족시키는 무시무시한 면도 보여주었다. == 대중매체에서 == || [[파일:attachment/송효종/효종.png]] || || '''[[징기스칸 4]] 일러스트''' || 징기스칸3 원조비사에서는 유저시나리오의 12번 땅 하남에 남송의 군주로 등장하며 능력치는 정치B 전투C 지도B 매력B의 쓸만한 능력치를 가지고 있으나 효종의 사망년도가 1194년이니 만큼 보통 플레이어들이 몽골을 통일하고 유저시나리오에 갈 경우 효종의 나이가 이미 고령에 다다르기 때문에 몇 턴 안지나서 사망할 확률이 매우 높다. [[징기스칸 4]]에서는 시나리오 1의 남송 황제로 있다. 시나리오가 시작하는 1189년은 이미 효종이 양위한 상태였는데도 아직 건재하다. 능력치는 정77/전55/지58 순으로 내정특기는 아쉽게 등용은 없고 상업과 문화 둘, 이 게임에 등장하는 남송의 황제들 중 제일 능력치가 높다.[* 삼국지나 신장의 야망 시리즈라면 흔한 b급 문관 수준이나 전반적인 능력치 책정이 낮은 이 게임에서는 내정면에서 준수한 수준] 수명도 기니 높은 문화치를 바탕으로 고령의 나이임에도 우수한 후계자를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아들로 등장하는 [[광종(송)|조돈]][* 한글판에서는 조순으로 [[오역]].] 대신 우수한 아들을 낳아 물려줄 수도 있다. 거기다 조금만 발전시키면 좋은 가공 장수가 수두룩하게 쏟아져 나오며 징병 가능한 병과도 다양하다. 따라서 잘만 하면 화북의 금나라를 밀어내고 중원 수복을 노릴 수도 있다. == 둘러보기 == [include(틀:송사)] [각주] [[분류:1127년 출생]][[분류:1194년 사망]][[분류:송나라/황제]][[분류:역대제왕묘 배향자]][[분류:퇴위한 군주]][[분류:자싱시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