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황화집(세조 편).jpg]] 현존하는 황화집 중 가장 오래된 1457년작 [[세조(조선)|세조]]의 황화집 3책의 모습 [목차] == 개요 == 皇華集. [[조선]]시대 [[명나라]]의 사신과 조선의 원접사(遠接使)가 서로 주고 받은 시들을 합철하여 만든 국가 시문집. 현재 [[한국]]에는 20여종 이상의 황화집이 현존하고 있다. == 내용 == 책 이름은 [[시경]](詩經)의 구절인 황황자화(皇皇者華)에서 따온 것으로, 1450년([[세종(조선)|세종]] 32)부터 1633년([[인조]] 11)까지 180여 년간 24차례에 걸쳐 명나라의 사신이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조선 관원과 함께 황화집이란 이름으로 양국 간의 시집을 만든 것이다. 1644년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천하의 주인이 되자 명나라 때와 마찬가지로 수많은 사신이 양국을 오갔으나 서로 시를 주고받는 일은 없었고 황화집도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았다. 명나라 사신과의 이러한 수창은 원활한 국교 유지에 크게 기여했으며, 조선의 높은 문화 수준을 과시하여 중국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황화집은 조선의 능수능란한 ‘문화 외교’를 보여주는 문헌이라 할 수 있다. 대표적인 황화집은 아래와 같다. == [[세종(조선)|세종]]대의 황화집 == 세종경오황화집(世宗庚午皇華集) 혹은 경태경오황화집(景泰庚午皇華集)이라 불린다. 1450년(세종 32) 경오년(庚午年)에 [[명나라]] [[경제]](景帝)의 등극조서(登極詔書)를 가지고 온 예겸(倪謙)과 사마순(司馬恂) 등이 한국의 [[정인지]](鄭麟趾), [[신숙주]](申叔舟), [[성삼문]](成三問) 등과 교류하며 만든 시집이다. 한국에서 만들어진 최초의 황화집인데 현재 원본은 소실되어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이 당시 중국 사신이었던 예겸(倪謙)이 이때 만들어진 황화집의 일부 시문을 중국으로 가져가 만들었던 [[봉사조선창화시권]]이 2004년 보물로 지정되었고, 2019년 [[대한민국의 국보|국보]] 승격을 앞두고 있다.[[https://www.museum.go.kr/site/main/relic/recommend/view?relicRecommendId=16881|국립중앙박물관 큐레이터 추천 소장품 : 『황화집』의 모범이 된 《봉사조선창화시권》]] == [[세조(조선)|세조]] 명편 황화집 == 1457년(세조 3)에 당시 조선의 왕이었던 [[세조(조선)|세조]]가 직접 명편한 황화집이다. 우리나라에서 역대 2번째로 만들어진 황화집이며, 동시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황화집'''이다. 현재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명나라 사신이 조선에 온 것은 1450년(세종32) 명나라 대종황제(代宗皇帝)의 등극(登極) 조서를 반포하러 온 것을 시작으로 1633년(인조11)까지 180여 년간 모두 24차례가 있었다. 《황화집(皇華集)》은 그 때마다 개별적으로 만들어 전하여 왔는데 이 책은 그 두 번째 사행(使行)으로 1457년(세조3)에 명나라 영종황제(英宗皇帝)의 복위(復位) 조서를 반포하러 온 명나라 사신과 이를 맞은 조선의 관료들이 서로 주고받은 시를 세조가 직접 편집한 것이다. [[갑인자]]로 간행하였으며 수록된 시는 당대 양국의 외교관 및 학문이 높은 문관들이 외교관계 속에서 읊은 것들이다. 그러므로 그 기법과 수준이 높고 당시의 외교관계와 사상을 엿볼 수 있으며 양국간의 정치․외교․문화의 교류와 조선 전기의 지리 풍속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이 책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당시 중국에서 온 사신 중에는 고윤(高閏)이란 자가 있었는데 원래부터 중국 사신들이 오만한 것은 유명한 사실이지만 특히 이 사람은 문장도 좋지 않았을 뿐 아니라 [[뇌물]]을 좋아하는 등 처신도 그리 적절치 못했다. 특히 뇌물을 매우 좋아하면서도 겉으로는 그런 물건을 전혀 받지 않는다는 듯이 행동해서 양국의 인물들이 모두 얄미워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다른 선물은 모두 거절하며 체면치례하던 고윤이 세조가 전별 선물로 검(劍)을 주자 그것에 감사하는 내용의 시를 지어서 바쳤다. 세조는 옳다구나 하고는 이 황화집에 고윤의 사검시(謝劍詩)를 냅다 실어버렸다. 그동안 자신이 모든 선물을 거절하면서 청렴결백한 척했던 것이 완전히 물거품이 된 것이다. 이 책이 양국의 문사들에게 널리 읽혀 고윤의 거짓 청렴이 조국에까지 다 드러나게 생겼는데 당시 조선의 왕이었던 세조가 직접 명편한 것이라 항의도 못하게 생겨 고윤은 파들파들 떨었고 양국의 문사들이 낄낄거렸다고 한다.[[http://jmagazine.joins.com/monthly/view/320500|중앙일보 : 도검(刀劍), 거짓과 청렴을 가려내다]] 현재 고려대 도서관 귀중본 컬렉션에 원본이 수록되어 있으며, 이 원본을 목판으로 찍은 후쇄본이 경매에 나온 적이 있다.[[https://www.kobay.co.kr/kobay/item/itemLifeView.do?itemseq=0906IQQGPB5|#]] * [[https://library.korea.ac.kr/bbs/content/119_27636#.XJ24kfZuKM9|고려대학교 도서관 귀중서 컬렉션 : 황화집]] * [[https://library.korea.ac.kr/cyber/cyber_ko/047/main.htm|고려대 사이버 도서전시 : 황화집]] == [[율곡]] [[이이(조선)|이이]]의 황화집 == 1582년([[선조(조선)|선조]]15) 황태자 탄생 소식을 전하기 위해 파견된 명나라 사신 황홍헌(黃洪憲), 왕경민(王敬民)과 한국의 [[율곡]] 이이가 제작한 황화집이다. 자세한 내용은 [[https://blog.naver.com/todayslibrary/221413714681|국립중앙도서관 소장희귀본 : 조선 문화 외교의 기록《황화집》]]을 참조. == [[영조]]대의 황화집 ==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선 후 황화집 제작은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에 후대의 왕이었던 [[영조]]는 과거 개별적으로 전해 오던 황화집을 모두 모아 하나의 책으로 만들라는 명을 내리게 된다. 이에 1773년에 50권 25책의 방대한 분량으로 완성하였다. 그동안 한국에서 만들어진 황화집의 총집편이라 할 수 있으며, 한국을 넘어 중국의 사대부들까지 이 책을 구하려 애썼다. 따라서 이 책은 양국간의 외교·정치·문화의 교류와 조선 전기의 지리·풍속 등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현재 50권 25책 전권이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795756&cid=46622&categoryId=46622|한국민족문화대백과 : 황화집]]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694530&cid=60533&categoryId=60533|국어국문학자료사전 : 황화집]]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155813&cid=40942&categoryId=32868|두산백과 : 황화집]]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37270&cid=60555&categoryId=60555|한국문학 : 황화집]] [[분류:조선의 도서]][[분류:규장각 소장품]][[분류:고려대학교 도서관 소장품]][[분류:서울특별시의 문화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