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청나라의 역사]][[분류:1911년/사건사고]][[분류:봉기]][[분류:실패한 쿠데타 및 반란]] [include(틀:대만 관련 문서)] ||<-3> {{{+1 '''황화강 사건[br]黃花岡事件'''}}} || ||<-3> [[파일:220px-Fundraising_in_Ipoh_for_the_Second_Guangzhou_uprising.jpg]] || || '''기간''' ||<-2> [[1911년]] [[4월 27일]] ~ [[1911년]] [[4월 29일]]? || || '''장소''' ||<-2> [[광저우]] || || '''교전 세력''' ||[[파일:청나라 국기.svg|width=23]] '''[[청나라]]'''||[[파일:중국 국민당기.png|width=23]] '''[[https://ko.wikipedia.org/wiki/중국동맹회|중국동맹회]]''' || || '''지휘관''' ||[[파일:청나라 국기.svg|width=23]] [[리준]][br][[파일:청나라 국기.svg|width=23]] [[위안스카이]][br][[파일:청나라 국기.svg|width=23]] [[선통제]][br][[파일:청나라 국기.svg|width=23]] [[장밍치]][br][[파일:청나라 국기.svg|width=23]] 푸치† ||<^|1>[[파일:중국 국민당기.png|width=23]] [[쑨원]][br][[파일:중국 국민당기.png|width=23]] [[황싱]] || || '''병력''' ||1,000여 명 ||120~200여 명 || || '''피해''' ||미상 ||86명 || || '''결과''' ||<-2> '''봉기 사실상 실패''' || || '''영향''' ||<-2> '''중국동맹회의 광저우 봉기 일시 연기''' || [목차] [clearfix] == 개요 == [[신해혁명]](辛亥革命) 직전인 1911년 4월 중국 혁명 동맹회의 황싱(黃興) 등이 [[광둥]](廣東)에서 일으킨 무장 항쟁. 이로부터 6개월 후 [[청나라]]는 멸망하였다. == 혁명의 준비 == 중국동맹회를 세운 [[쑨원]]은 세력을 확충하고 세계를 일주하며 화교들에게 군자금을 모았는데 [[우창 봉기]] 전까지 그의 군자금은 140만 냥에 달했다. 혁명의 동조자가 늘어나면서 일각에선 혁명의 시기가 가까워졌다는 성급하고도 급진적인 관측이 나왔다. 하지만 혁명파에게는 아무런 대책도 없었다. 그리고 [[4월 27일]] [[광저우]]에서 무장 봉기가 일어났다. 주동자는 동맹회 지도자의 한 사람이자 [[쑨원]]의 맹우 [[황싱]]이었다. 그리고 [[쑨원]]은 변경혁명(邊境革命)으로 베이징에서 멀리 떨어진 서남 변경에서 반란 후 차츰 전국으로 넓혀 [[청나라]]의 항복을 받아낸 뒤 [[중화민국]]을 수립하겠다는 야심찬 목표를 다짐했다. 황싱은 [[저장성]]과 [[푸젠성]]에서 남부 성을 기준으로 혁명대원의 동시다발적 집단적 혁명으로 양광 총독부의 거점인 광저우로 진격 후 신건육군 부대와 순방영 부대를 선동해 중국 남방을 장악한다는 야심차고도 그간 혁명의 실패를 모조리 갚을 수 있다는 목표로 [[쑨원]], [[황싱]] 모두 다짐했던 것이다. == 삐걱이는 혁명 == 그간 실패를 거울삼아 자그마치 17만 냥을 사용하고 봉기 예정일을 [[4월 13일]]로 예정했다. 그러나 거사가 준비 중이었는데 광저우 장군 푸치가 갑자기 암살된 채 발견되었다. 범인은 중국 동맹회의 회원인 원성차이였던 것이다. 그는 혁명파 탄압에 앞장서던 수사제독 리준을 암살하려고 하였으나 가마에 앉아 비행기가 떠다니는 광경을 구경하고 있었던 푸치를 리준으로 착각하고 푸치를 향해 총구를 겨눴다. 푸치는 장군의 체통도 버리고 살려달라고 소리쳤으나 괴한에 의해 3발의 총알을 맞고 즉사했다. == 혁명의 연기 == 원성차이는 주변의 만주족 팔기 기병이 도망친 틈을 타 도주했으나 뒤늦게 경찰에게 잡혀 혹독한 심문을 받고 며칠 뒤 참수당했다. 이후 황싱의 거사도 기밀유출되었으며 광저우의 분위기는 흉흉하고 경계가 매우 삼엄했다. 일본에서 권총 100여 정, 4,000여발의 총탄을 [[영국령 홍콩|홍콩]]을 통해 밀수하려고 했던 책임자가 이 소식을 듣고 모두 바다에 버렸고 미국에서 받던 송금도 차질이 생기자 결국 이 사건은 4월 29일로 연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