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황석현}}}'''[br]'''黃奭顯'''}}}}}}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황석현.jpg|width=100%]]}}} || || '''자 / 호''' ||은필(殷弼) / 지추(之秋) || || '''본관''' ||[[황(성씨)|장수 황씨]][* 호안공파(胡安公派)-창평현령공계(昌平縣令公系)-군수공파(郡守公派) 20세 현(顯) 항렬. 족보명은 황용현(黃用顯).] || ||<|2> '''출생''' ||[[1886년]] [[3월 1일]] || ||[[충청도]] [[보령시|남포현]] 웅천면 화망리[br](현 [[충청남도]] [[보령시]] 웅천읍 구룡1리 화망마을) || ||<|2> '''사망''' ||[[1945년]] [[5월 9일]][* 음력 3월 28일.] || ||[[충청남도]] [[대전광역시|대전부]] [[중촌동|중촌정]] 대전형무소[br](현 [[대전광역시]] [[중구(대전)|중구]] [[중촌동]]) || || '''묘소''' ||[[충청남도]] [[보령시]] 웅천읍 구룡1리 화망마을 || ||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19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황석현은 1886년 3월 1일 충청도 남포현 웅천면 화망리(현 충청남도 보령시 웅천읍 구룡1리 화망마을)에서 아버지 황온(黃穩, 1860. 1. 2 ~ 1938. 4. 13)와 어머니 [[양(성씨)|청주 양씨]](淸州 楊氏, 1856. 6. 1 ~ 1936. 10. 24) 양한기(楊漢基)의 딸 사이의 두 아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딸만 둘 있던 7촌 재종숙(再從叔) 황진(黃稹, 1861 ~ ?. 12. 16)에 입양되었으며, [[광산 김씨]](1882. 9. 17 ~ 1965. 6. 12) 김광로(金光魯)의 딸과 혼인한 뒤 1924년 분가하여 충청남도 보령군(현 보령시) 주산면 화평2리 화산마을로 [[https://blog.daum.net/ikhyuk/7353037|이주하면서]] 본적을 옮겼다. 그는 이곳에서 남포청년회 평의원, 남포소작회(藍浦小作會) 상무위원, 보령군 화평리 진흥회(振興會) 부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청년계몽활동, 소작관계개선 등 여러 사회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러다가 1920년대 말 [[사회주의]] 사상에 눈을 뜨게 되어 [[일본]]을 자주 오가다가 얼마 뒤 [[만주]]로 건너가 [[중화민국]] [[길림성]] 주하현(珠河縣) 제4구 오길밀진(烏吉密鎭) 남구(南溝)[* 현 [[중화인민공화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시]] 상즈시(尙志市) 우지미향(烏吉密鄕) 난거우둔(南溝屯).]에 정착했다. 정착 후 그는 당시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滿洲省委員會) 주하현 하동남향(河東南鄕)[* 현 [[중화인민공화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시]] 상즈시(尙志市) 허둥조선족향(河東朝鮮族鄕).] 지부 책임자 한봉윤(韓鳳允)의 권유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고, 만주성위원회 주하현 하동남향 지부에서 주로 문서 책임을 맡아 선전문 및 기밀 문서의 수발, 연락을 담당했다. 그러나 1934년 4월 말 [[하얼빈]] 주재 일본 영사관 경찰에 의해 동지 전동철(田東哲)과 함께 검거되었고, 일본 영사관으로부터 3년간 재류금지처분을 받았으며, 그해 5월 14일 신의주경찰서에 이송되어 그곳에서의 취조를 받은 뒤 당일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신의주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었다. 그리고 결국 같은 해 6월 4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5437&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15912&actionType=det&flag=2&search_region=|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보령군 주산면 동오리로 이주하여 살면서 [[사회주의]] 운동 및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이따금 만주를 오가기도 했다. 그러다가 1944년 말 만주에서 재차 체포되어 [[https://theme.archives.go.kr/next/board/viewArticle.do;jsessionid=nuV2fiiNxKIy0KwdmFaL7gLBkw30lb6c3PLJecpWITZ83971pgYiEwmSLPiwt52t.CW-MOBILE_servlet_engine1?articleNo=61030&boardNo=113&searchType=&keyword=&page=|국내로 이송되었고]], 1945년 2월 14일 대전지방법원에서 소위 [[불경죄|불경]] 및 조선임시보안령 위반 등의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이 판결에 대해 공소를 거쳐 고등법원 형사부에 상고까지 했지만, 결국 같은 해 4월 9일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1751&evntId=0034982160&evntdowngbn=Y&indpnId=0000013800&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상고가 기각되면서]] 원심 판결이 적용되어 대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그리고 그곳에서 옥고의 여독 및 [[영양실조]] 등으로 고통받다가 같은 해 5월 9일 오전 8시 20분 옥중에서 순국했다. 향년 60세. 사후 그의 유해는 유족의 동의 없이 일제에 의해 멋대로 화장되었고, 부인 [[광산 김씨]]에 의해 보령경찰서에서 수습되어 고향 마을의 조부 황효원(黃孝源, 1821 ~ ?. 3. 19)[* 초명 황봉(黃鳳).] 묘소 아래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9년 [[8월 15일]] 황석현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 기타 == * 당초 그가 1930년대 초 [[만주]]로 망명할 때 부인 [[광산 김씨]]와 장남 황학주(黃鶴周), 차남 황일주(黃日周, 1922. 3. 18 ~ ) 등 아들 2명, 딸 2명 등이 함께 갔는데, [[8.15 광복]] 후 부인과 차남은 귀향했지만 정작 장남 황학주는 [[소련]]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그 뒤 황학주는 [[소련군]]에 입대했다가 제대 후에도 당시 [[소련]] 소속이었던 [[우즈베키스탄]]에 살았다고 하며, 이후 웅천읍 구룡리에 대대로 거주하던 일가 친척들이 장남 황학주에 지속적으로 연락을 취한 끝에 극적으로 연락이 닿았고, 1991년 만남이 성사되어 황학주가 한국으로 한 번 찾아왔었다고 한다.[[https://blog.daum.net/ikhyuk/7353037|#]]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장수 황씨]][[분류:보령시 출신 인물]][[분류:1886년 출생]][[분류:1945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국장]][[분류:옥사한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