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1387년 출생]][[분류:1453년 사망]][[분류:영천 황보씨]][[분류:조선의 문관]][[분류:영의정]][[분류:좌의정]][[분류:우의정]][[분류:암살된 인물/한국사]] [include(틀:역대 조선 영의정(태조-연산군))] [include(틀:역대 조선 정승(태조-연산군))]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60420, #b82642 20%, #b82642 80%, #960420)" '''[[영의정|{{{#fff 조선 영의정부사}}}]][br]충정공(忠定公)[br]{{{+1 황보인}}}[br]皇甫仁'''}}} || || '''출생''' ||[[1387년]]([[우왕]] 13년)|| ||<|2> '''사망''' ||[[1453년]] [[11월 19일]][*A [[율리우스력]] [[11월 10일]].] (향년 65 ~ 66세)[br](음력 [[단종(조선)|단종]] 1년 10월 10일)|| ||[[계유정난]] 중 피살|| || '''[[무덤|{{{#fff 묘소}}}]]'''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이천리|| ||<|2> '''재임기간''' ||제22대 영의정부사|| ||[[1451년]] [[11월 29일]][* [[율리우스력]] [[11월 20일]].] - [[1453년]] [[11월 19일]][*A][br]{{{-2 (음력 [[문종(조선)|문종]] 1년 10월 27일 - [[단종(조선)|단종]] 1년 10월 10일)}}}|| || '''[[시호|{{{#fff 시호}}}]]''' ||충정(忠定)|| || '''[[본관|{{{#fff 본관}}}]]''' ||[[황보|영천 황보씨]]|| || '''[[자(이름)|{{{#fff 자}}}]]''' ||사겸(四兼), 춘경(春卿)|| || '''[[아호|{{{#fff 호}}}]]''' ||지봉(芝峰)|| || '''부모''' ||부친 - 황보림(皇甫琳, {{{-3 1333 ~ 1394}}})[br]모친 - 탐진 안씨(耽津 安氏) [[안우]]의 딸|| || '''부인''' ||[[양성 이씨]] 이지택(李之擇)의 딸|| || '''자녀''' ||'''슬하 3남 4녀'''[br]장남 - 황보석[br]차남 - 황보은[br]3남 - 황보흠[br]장녀 - [[사천 김씨]] 김만서(金晩緖)의 처[br]차녀 - [[남양 홍씨]] 홍원숙(洪元淑)의 처[br]딸 - 윤당(尹塘)의 처[br]딸 - 권은(權訔)의 처||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 초기의 문신. [[황씨]]가 아니라 [[황보씨]]로 [[복성]]에 [[외자]] 이름이다. == 생애 == 1414년 문과에 급제하고 [[세종(조선)|세종]] 때는 북도 체찰사로서 [[김종서(조선)|김종서]]와 더불어 6진을 개척하고 우의정이 되었다. 이후 지속적으로 [[엘리트]] 코스를 밟다가 세종 때에는 고명대신이 되어서 김종서, [[정분]]과 함께 고명대신이 되었다. [[문종(조선)|문종]]의 고명을 받아서 [[단종(조선)|단종]]을 보필했다고도 알려져 있는데 문종은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는 말도 하기 어려울 정도로 기력이 쇠했었기 때문에 고명대신이 없다. [[황희(조선)|황희]]의 후임이었던 [[하연(조선)|하연]]이 퇴임하자 뒤를 이어서 [[영의정]]에 올랐다. [[눈치]]가 빨라 [[세조(조선)|수양대군]]의 야심을 처음부터 눈치채고 있었으나[* 드라마 [[한명회(드라마)|한명회]]에서는 수양대군의 사람에게 병권을 맡길 수 없다면서 수양대군이 추천해서 [[병조판서]]가 된 [[정인지]]를 실권이 없는 한직으로 보내는 장면이 나온다. ] 수양대군이 그정도로 막나갈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해 [[계유정난|향년 67세에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계유정난이 벌어지기 전까지 나이 많은 중신들이 수양대군 파를 압도하고 있었던 점, [[태종(조선)|태종]]이 [[심온]]을 사사한 이후 반세기 동안 정승이 참살당하거나 역모죄로 처형되는 일이 없었던 점으로 미루어 수양대군에게 허를 찔렸던 것으로 볼 수 있겠다. 항상 선왕의 유지를 받들려 노력하였고 [[권력]]에는 전혀 욕심을 품지 않았고 강직하였다. 성품이 인자하고 자애로워 자신보다 낮은 이들도 함부로 대하지 않아 다른 이들의 호감을 많이 샀는데 일례로 [[계유정난]]에 휘말려 [[가문]]이 멸문의 위기에 처하자 그 집 여종인 단량이 황보인의 손자[* 황보인의 차남 황보흠(皇甫欽)의 아들.] 황보단(皇甫端)을 데리고 경상도 연일현([[경상북도]] [[포항시]] [[연일읍]])까지 피신하여 평생 숨어 키움으로써 가문의 대를 잇게 되며 이 때문인지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구룡포읍 성동리에 영천 황보씨 집성촌이 있다. 수백 년이 지난 후 [[숙종(조선)|숙종]]이 다시 [[벼슬]]을 올리고 [[영조]]가 충정(忠定)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묘는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이천리에 있는데 인근이 황보씨의 선산인 듯. 곳곳에 산재한 묘 중에서도 독보적으로 크다. == 기타 == * 2009년 [[도굴]]되었다가 되찾은 [[한명회]]의 묘지 비석에 따르면 원래 한명회가 황보인의 [[사위]]가 될 뻔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황보인이 한명회를 1번 보고는 '국사'(國士)라고 생각을 해서 딸을 시집보내려 했으나 그는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https://www.yna.co.kr/view/AKR20090610193800005|당시 도굴 사건 및 기록에 관한 기사]] 그 내용이란 한명회의 종조부인 참판 [[한상덕]]이 "황보인은 권력을 쥐고 마음대로 하는 사람이니 혼례를 받아들여 부귀를 얻으라"고 했으나 한명회는 "처가의 권세에 힘입어 부귀 영화를 바라겠습니까. 이는 저의 바라는 바가 아닙니다."라며 거절한 것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출처가 한명회의 무덤 비석인 만큼 신뢰성이 낮고 다른 문헌에서는 확인되지 않는 이야기다. 개연성 역시 다소 미심쩍다.[* 한명회의 졸기에는 어버이를 일찍 잃었다는 내용이 언급되므로 그의 부모가 아니라 종조부 한상덕이 혼인에 관여하고 있는 것은 정황상 꽤 그럴듯하다. 문제는 연령이다. 한명회는 1415년생이다. 한상덕은 1427년에 호조참판으로 임명되며 처음 참판직을 역임한다. 1430년에 와서는 '전 참판'으로 언급되며 적어도 이 때에는 참판에서 물러나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4년 뒤인 1434년에 이르러 사망한다. 여기까지의 나이 정보를 종합하면 아무리 나이를 올려 잡아도 한명회의 나이 21세 이전에 혼담이 제의되었다는 것. 조선 전기의 결혼 연령을 고려하면 이 나이에 혼담이 오가는 것은 이상할 것도 없지만 낙방을 거듭하던 한명회의 커리어로 보아 저렇게 이른 나이에 황보인에게 국사로 인정받았을 가능성은 그렇게 높지 않다.] * 똑같이 단종을 보필하다 살해된 김종서와는 달리 [[인지도]]가 낮은 편인데 김종서는 그나마 기록이 남아 있는데 비해 황보인은 그런 것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6진으로 잘 알려진 김종서는 물론이고 인지도가 낮은 정분도 [[숭례문]]과 해미 읍성을 비롯해 각종 저수지와 제방을 건설하는 등의 행적을 남긴 반면 황보인은 북방 개척 건이 김종서와 캐릭터가 겹치는데다 온건한 조정 신료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에 [[역사]] 콘텐츠에서 잘 다루지 않았기 때문이다. * 이름에 관한 맞춤법에 있어 자주 인용되는 이름이다. 그의 호가 '지봉'인데, 성씨와 붙여 쓰면 황'''[[보지]]'''봉이라는 미묘한 이름이 되기 때문. 물론 한국어 맞춤법에 따라 성과 명은 필요한 경우엔 띄어쓰기가 가능하므로 '황보 지봉' 같은 식으로 오해를 피하기 위해 띄어쓸 수 있다.[[https://www.korean.go.kr/front/onlineQna/onlineQnaView.do?mn_id=216&qna_seq=169794&pageIndex=1|국립국어원 답변]] * 개요에서 상술한 바와 같이 성이 황보이고 이름이 인이지만 이상하게 그가 등장하는 거의 모든 사극들이 황보씨가 아닌 황씨라고 칭한다. 비교적 최근작인 영화 [[관상(영화)|관상]]에서도 보인 대감이라고 칭해지는가 하면 KBS의 사극에서는 아예 "이 나라가 김씨(김종서)의 나라입니까, 황씨의 나라입니까!" 라고 하는 대사까지 등장한다. ~~그리고 다음날 신문 문화면에서 까였다.~~ 거의 유일하게, 1994년 KBS 드라마 [[한명회(드라마)|한명회]][* [[이덕화]]가 한명회로 나온 그 드라마. 황보인은 [[이치우(1939)|이치우]]가 연기했다. ]에서는 [[띄어쓰기]]까지 하면서 '''황보 인'''으로 제대로 표시했다. 이 드라마는 역사 콘텐츠에서 잘 다루지 않은 황보인이 꽤 비중 있게 나오기도 했다. == 둘러보기 == [include(틀:장릉배식록 수록자)] ---- [include(틀:진승총(기타 사서 포함))] ---- [include(틀:조선의 역대 집권세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