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위서(북조))] [include(틀:북사)] ||<-2> '''{{{#fff 북위의 추존 황후[br]{{{+1 桓帝皇后 | 환제황후}}}}}}''' || || '''[[시호|{{{#fff 시호}}}]]''' ||<(> 환황후(文皇后) || || '''[[성씨|{{{#fff 성}}}]]''' ||<(> 기(祁) || || '''{{{#fff 출생}}}''' ||<(> 미상 || || '''{{{#fff 사망}}}''' ||<(> 324년 || || '''{{{#fff 능묘}}}''' ||<(> 불명 || || '''{{{#fff 부모}}}''' ||<(> 불명 || || '''{{{#fff 부군}}}''' ||<(> [[탁발의타|환황제]] (桓皇帝) || || '''{{{#fff 자녀}}}''' ||<(> 3남 || [목차] [clearfix] == 개요 == [[서진]] 시기 색두부(索頭部) 대인 [[탁발의타]]의 정실 부인. [[탁발보근]], [[탁발하녹]], [[탁발흘나]]의 어머니. 《[[북사]]]》와 《[[자치통감]]》에 한해서 유씨(惟氏)라 기록되어 있다. == 생애 == 영흥 2년(305년) 6월, 탁발의타가 장안의 서진 정권을 도와 [[전조(오호십육국시대)|한(漢)]]과 싸운 공로로 가 대선우(假大單于)에 임명받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였다. 이에 탁발의타와 기씨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 탁발보근이 그 자리를 계승하였다. 건흥 4년(316년) 4월, 탁발보근이 정변을 일으킨 탁발육수(拓跋六脩)를 제거하고 대왕(代王)에 오르자, 탁발보근을 따르는 무리와 탁발육수에게 시해당한 [[탁발의로]]를 따르는 무리가 나뉘어 대립하였다. 이때 탁발의로의 무리가 대거 이탈해 진나라에 투항하는 등 혼란한 와중에 탁발보근이 사망하니, 기씨는 재빨리 갓 태어난 아기인 탁발보근의 아들을 왕위에 앉혔다. 건흥 4년(316년) 12월, 탁발보근의 아들이 대왕에 오르고 8개월만에 사망하였다. 이에 색두부의 부족원들은 탁발보근의 5촌 당숙인 [[탁발울률]]을 옹립하였다. 대흥 4년(321년) 12월, 탁발울률이 부족을 잘 이끌면서 민심을 얻고 그 세력이 자못 강성해지자, 기씨는 이것이 자신의 아들들에게 불리할 것이라 여기고 두려워하였다. 결국 기씨는 거병하여 탁발울률을 비롯해 그를 따르는 대인 수십 명을 살해하고, 차남 탁발하녹을 대왕으로 세웠다. 이리하여 정권을 장악하게 된 기씨는 아들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홀로 국정을 도맡아 처리하였다. 한번은 기씨가 후조의 [[석륵]]에게 사신을 보낸 적이 있었는데, 이 때 기씨가 대나라를 장악한 일이 널리 알려졌다. 당시 후조의 사람들은 그 사신을 가리켜 여자의 나라에서 온 사신이라는 뜻으로 '여국사(女國使)'라 불렀다. 태녕 2년(324년), 기씨가 사망한 뒤에야 국왕인 탁발하녹이 비로소 친정을 시작할 수 있었다. 훗날 도무제 [[탁발규]]가 칭제하고 선조들을 추존할 때, 탁발의타는 환황제로 추존되었고, 그 처인 기씨는 환황후로 추봉되었다. [[분류:남북조시대/황후]][[분류:324년 사망]][[분류:아시아의 섭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