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다른 뜻1, other1=외모지상주의의 등장인물, rd1=홍두표(박태준 유니버스))] [include(틀:역대 한국방송공사 사장)] ||
'''{{{#fff 역임한 직위}}}'''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역대 한국관광공사 사장)] ---- [include(틀:중앙일보 회장)] ---- [include(틀:중앙일보 사장)] ---- [include(틀:역대 중앙일보 편집인)] ---- ||<-5> [[중앙일보|[[파일:중앙일보 로고.svg|height=26]]]] '''발행인 · 인쇄인''' || || 김동익 || → || {{{#ffffff '''홍두표''' }}} || → || [[이필곤|{{{#000,#ddd 이필곤}}}]] || ---- [include(틀: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 사장)] }}}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2282b9, #2282b9, #2282b9, #2282b9)" [[한국방송공사|{{{#white '''대한민국 제10-11대 한국방송공사 사장'''}}}]]}}} || ||<-2> [[조선방송|{{{#white '''조선방송 회장'''}}}]][br]{{{#ffffff {{{+1 '''홍두표'''}}}[br]'''洪斗杓 | Hong Du Pyo'''}}} || ||<-2>{{{#!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홍두표 사장.png|width=100%]]}}} || ||<|2> '''출생''' ||[[1935년]] [[12월 25일]] ([age(1935-12-25)]세) || ||[[경기도]] [[화성시|수원군]] || ||<|8> '''재임기간''' ||초대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한국방송광고공사]] 사장 || ||[[1981년]] [[1월 20일]] ~ [[1986년]] [[8월 29일]] || ||제10-11대 [[한국방송공사|[[파일:KBS 로고.svg|width=50]]]] '''사장''' || ||[[1993년]] [[3월 18일]] ~ [[1998년]] [[4월 1일]] || ||제8대 [[한국방송협회]] 회장 || ||[[1993년]] [[3월 26일]] ~ [[1998년]] [[3월 31일]] || ||제16대 [[한국관광공사]] 사장 || ||[[1998년]] [[4월 10일]] ~ [[1999년]] [[6월 3일]] || || '''학력''' ||[[서울대학교/학부/사회과학대학|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2 (사회학 / 학사)}}}[br][[경희대학교/대학원|경희대학교 대학원]] {{{-2 (정치학 / 석사)}}}[br][[연세대학교/대학원|연세대학교 대학원]] {{{-2 (정치학 / 명예박사)}}} || || '''소속''' ||[[조선방송]](TV조선) 회장 || || '''경력''' ||[[중앙일보]] · [[동양방송]] [[전무이사]][br][[중앙일보]] · [[동양방송]] [[대표이사]] 사장[br][[한국방송광고공사]] 사장[br][[KT&G|전매청장]][br][[KT&G|한국담배인삼공사]] 사장[br][[중앙일보]] 대표이사 사장[br][[한국방송공사]] 사장[br][[한국관광공사]] 사장[br][[제주방송]] 회장[br][[중앙일보]] 방송담당 회장[br][[JTBC]] 총괄회장[br]||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언론인]]. 사실상 지금의 [[KBS]]를 만들어낸 사장이자 [[수신료]] 거부운동을 차단시킨 원흉으로 [[감사원]] 사무차장/감사위원을 지낸 홍두표와는 단순 동명이인이다.[* 언론에 두 사람 관련 내용이 보도되면 사진이 바뀌어 올라오기도 했으며 당사자들에게 우편물이 바뀌어서 오기도 했을 정도이다.] 현재 [[TV조선]] 회장이다. 한국 TV 방송계의 산 증인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이자 [[20세기]] 후반기에 정권이 바뀌면서도 승승장구했던 인물로 '''20년씩이나 사장으로 연속으로 재직했다.'''. 그야말로 [[처세술]]의 달인. (TBC-코바코-[[KT&G]]-중앙일보-KBS-관광공사 순) --즉, 인생의 승리자다. 비리만 저지르지 않았으면 2000년대에도 공기업 사장직 역임했을 인물-- 본업은 방송쪽이지만 위낙 경영면에서 인정을 받았다보니 자신의 업무분야와 상관없는 전매공사(한국담배인삼공사)와 관광공사 사장직을 맡은 전적이 있다. == 생애 == [[1935년]] [[경기도]] [[화성시|수원군]]에서 태어나 [[인천고등학교]],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했다. [[1961년]]에 [[한국방송공사|KBS]] 방송개국요원으로 KBS-TV 개국에 참여해 프로듀서 생활을 시작했다. [[1964년]]에 [[동양방송]]으로 이직했으며 1972년 편성국장으로 승진했다. 당대 여러 악조건속에서도 [[동양방송]]을 대형방송사로 만들어냈고[* 당시 관계당국으로부터 검열을 받아야되는건 물론이고 [[1970년대]] 중후반 들어서 일선 당국에서 특정 시간대에 특정 장르의 프로그램만 방송할 수 있다고 지시를 하는 등 지금보면 코미디 수준의 조치를 취하는 경우가 많았다. --유일하게 긍정적인 건 광고규제 정도이며, 헌데 다른 부문은 정말 병맛이었고 그러면서도 국산만화영화 제작은 못시켰다--] 이를 바탕으로 [[1979년]]에 (주)[[중앙일보]]-[[동양방송]] 상무이사, [[1980년]] [[2월 15일]]에는 전무이사, [[9월 15일]]에는 방송부문 대표이사 사장으로 승승장구했으나 꼴랑 부임 두 달만에 회사 자체가 [[언론통폐합]]에 의한 신방겸영 금지 조치에 따라 KBS로 넘어가면서 강제적으로 짤려나가는 아픔(?)도 겪었다. 그래도 능력은 인정받던 인사였기에 1981년에 새로 신설된 [[한국방송광고공사]] 사장직에 올랐고 1986년 전매청장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부임 후에 조직의 목표와 논리를 따르기 위해 그토록 끊었던 담배를 피웠다.] 1년만에 [[한국전매공사]]로 공사화되면서 전매공사 사장직에 올랐으며 [[노태우 정부]] 시기에 전매공사에서 [[한국담배인삼공사]]로 이름이 바뀐 뒤에도 총 6년을 재임했다. 임기 동안 [[구조조정]]이라는 난제를 슬기롭게(?) 해결했는데 직원들을 해고시킨 대신에 해당 직원들의 자식들에게 일자리를 주는 방식. 요즘 같으면 자식들에게 직장 세습이니 조삼모사니하면서 욕할수있는 상황이었지만, 어땠거나 덕택에 고참직원들을 대거 신참으로 물갈이하면서 조직의 활력이 높아졌다는 평을 들으면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1992년]]에 [[중앙일보]] 대표이사 사장을 거쳐 [[문민정부]]가 들어서 [[한국방송공사|KBS]] 사장 겸 한국방송협회 회장직에 오르면서 [[금의환향]]했다. KBS 보도국을 대대적으로 쇄신시켜나면서 관제방송이라는 이미지를 벗는데 기여했고 1TV 저녁 일일연속극이 연이어서 흥행하는 호재까지 겹치며 그 이전까지 관제방송 이미지로 시청률이 저조했던 [[KBS 뉴스 9]]의 시청률이 크게 오르게 만들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1994년]] 6월 [[KBS 1TV]] 광고를 전면적으로 폐지시키고 그 대신에 [[수신료]]와 [[전기료]]를 합산징수시키는 안을 통과시키기게 만들어서(시행된건 그 해 10월부터) '''수신료 거부운동을 차단시켰으며 장노년층들이 TV를 틀면 KBS1로 채널을 고정하게 만들게 했다.''' 1TV 광고를 폐지하면서도 수신료를 올리지 않고 그대로 받게 한것이 멍청한 짓처럼 보이지만 --그리고 후대에 피를 본 인물이 [[정연주(언론인)|정연주]]-- 당대에는 사정이 전혀 달랐다. 사실 90년대 초반에는 1980년대 시청료 거부운동의 여파가 남아있었던데다가 관제방송 이미지가 위낙에 컸기에 수신료 징수율이 50% 중반 정도였고, 더군다나 그러면서도 수신료 징수원들을 고용해야했기 때문에[* 1994년까지만 해도 KBS는 [[NHK]]식으로 징수원이 직접 수신료를 걷는 방식이었으며, NHK와 다른 점은 징수원은 KBS 소속 임시직이며 지역별 직영 사업소(1993년 이전 명칭은 출장소)를 통해 징수하는 식이었다. 물론 1986년부터 시 단위 지역을 중심으로 통합[[공과금]]제가 도입되는 곳도 있었지만 전국적으로 퍼진 것까지는 아니다.] 손해보는 비용이 1TV 광고해서 얻는 수익보다 월등히 많았다. 광고폐지와 일일연속극 시청률의 상승의 영향으로 [[KBS 뉴스 9]]의 시청률이 [[MBC 뉴스데스크]]를 추월했고 이외에도 3대 스페셜([[역사스페셜]], 환경스페셜, 일요스페셜) 중 하나인 일요스페셜도 이때 신설한데다가 재임기 막판에 [[KBS 대하드라마]]도 성공시켜서 나름대로 공영방송으로써의 입지를 굳혀나갔고 KBS의 매출액도 경제호황과 함께 역대 최고치를 연일 경신하면서 연간 1000억원대의 흑자액을 기록했을 정도다. 다만 다른 사장들과 마찬가지로 [[한국 애니메이션|국산 애니메이션]] 제작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쓴 편은 아닌데, 사실 애니메이션 자체가 버는 돈에 비해 제작비가 많이 든다는 점도 있고 이때까지도 [[애니메이션 쿼터제]]가 시행되지 않았던 시절이라 강제규정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대신 [[KBS 2TV]]는 상업화가 진전되어서 이때의 TV편성표를 보면 KBS 2TV가 [[MBC]]나 [[SBS]]보다도 오락 프로그램의 비율이 높은 상황이었고 --[[KBS 뉴스비전|메인 뉴스]] 편성시간이 15분...-- 덕택에 2TV에서 전쟁이나도 정규 프로를 방영할 것이라는 농담도 있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때에도 외국 프로그램의 표절은 빈번했다는 문제점은 있었다. 물론 미국이나 일본 프로그램을 베끼는것은 MBC나 SBS도 마찬가지였던 상황이었고 길게보면 TV방송 초기부터 이어져내려오던 문제점이라 특별한건 아니지만. 그 외에 [[1994년]] [[아시아태평양방송연맹]](ABU) 이사기관으로 선임되어 [[NHK]], [[중국중앙텔레비전]]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전 아시아 방송계 위상을 드높였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윗선의 눈치를 아예 안봤냐면 그건 또 아니라서, 1994년 10월 [[충주호 유람선 화재 사건]] 때 해당 사고 소식을 뒤로 한 채 [[김영삼]] 대통령의 [[성수대교 붕괴사고]] 담화를 헤드라인으로 보냈으며 얼마 뒤 [[아현동 도시가스 폭발 사고]] 당시에 정규방송을 5분 일찍 시작했다고 공보처에게 징계를 받는 사건이 벌어져서 [[1995년]]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폭발 참사]] 제대로 보도하지 못하는 일이 벌어졌으며 심지어는 [[2월 7일]] [[민주자유당|민자당]] 전당대회를 기점으로 [[김영삼]] [[대한민국 대통령|대통령]] 동정을 헤드라인으로 틀어 소위 '땡김뉴스'라고 욕을 먹었다. 이외에도 재임후반기 들면서 눈치를 보는 경향이 강해지기도 하여 [[1996년]]에 [[추적 60분]] '쌍용 사과상자' 편이 [[쌍용그룹]] 측의 외압으로 [[http://m.mediatoday.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8046#Redyho|불방되었고,]] [[1997년 대선]] 개표방송때 [[1996년 총선]] [[출구조사]]의 악몽으로 예측조사를 발표하지 못한일도 생기기도 했다. 심지어 [[1995년]] [[4월 7일]]자 [[KBS 뉴스라인]]에서 방송된 여야 대변인 초청 대담 중 야당 대변인 발언 일부를 삭제해 '알아서 기기'의 표본을 몸소 보였다. 지금이라면 [[케이블 TV|케이블 채널]] 아니면 상상 할수 없지만, [[1996년]]에 당시 일요일 아침에 방영하던 영화 더빙 코너 일요특선을 9년만에 종영했다. 당시 [[KBS 성우극회|자사 성우들]]이 활동할수 있는 더빙 프로그램 하나를 없애 버린것 였는데 문제는 이것으로 시작으로 이후 후임인사들도 홍두표처럼 지금 [[KBS 성우극회|자사 성우들]]이 활동(더빙) 을 단계별로 많이 줄어지게 만드는 원인을 제공하게 되었고, 결국 한국 방송계는 자체제작 예능이나 드라마 등 오락프로 일색으로 점차 채워지게 되었다.[* 하지만 예능과 드라마도 경쟁사 포맷을 베낀 저질프로까지 양산해내 방송사 재정상태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이후 [[토요명화]] 같은 더빙 프로그램를 종영시킨 것도 사실상 이때부터 예견되어 있던 것이었다. 그래도 KBS 일선 제작진 사이에서 [[정연주(언론인)|정연주]]와 함께 평가가 좋은 편인데[* 다만 정연주는 일선 제작진이 아닌 간부진이나 기술직 사이에서 구조조정 작업 때문에 평가가 그리 좋지 못하다. 단지 프로그램 편성, 아이템 선정에 있어서 일선 제작진들의 의견을 잘 들어줬기 때문에 PD나 기자들에게 평가가 좋은 것.], 임기 내내 현장 제일주의를 고수하여 사장실에 TV 15대를, 집에도 TV 5대를 각각 두며 꼼꼼히 제작상황 등을 체크했다. 주요 프로그램들은 웬만하면 꼭 시청했으며 미쳐 일이 있어서 프로그램을 못보면 새벽 1시까지도 비디오테이프로 녹화된 프로그램들을 시청했을 정도로 열의를 보였다.[* 홍두표가 사장으로 KBS 사장으로 재임했을 당시에는 [[인터넷]]과 [[PC통신]] 속도가 느려터졌기 때문에 VOD 서비스는 꿈도 못 꾸던 상황이기에(VOD 서비스가 일부 시작된건 [[1997년]], 사실상 시작된 시기는 [[1998년]]도다.), 프로그램을 다시 보려면 미리 녹화를 하거나 [[KBS 미디어|KBS 영상사업단]]에 전화걸어 복사구매를 해야 했다.] 덧붙여 TV를 보던 도중에 괜찮은 프로그램이 있다 싶으면 해당 프로그램 제작진들을 불러서 손수 격려를 해주면서 봉투를 건네주곤 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1997년]] 하반기에 경기침체와 2TV 시청률 부진이 이어지면서 경영실적이 별로 안 좋아졌고, 같은 시기 [[오익제]] 월북 관련보도 문제로 [[새정치국민회의]]와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7091000289121001&editNo=5&printCount=1&publishDate=1997-09-10&officeId=00028&pageNo=21&printNo=2980&publishType=00010|충돌이 벌어진 데다,]] [[제15대 대통령 선거]] 예측조사 발표에 대해서 어버버거리다가 그대로 발표못하는 악재가 이어지다가 --대신에 미터기 자막으로 후반부 시청률은 좋았다만-- [[1998년]] 상반기 프로그램 개편을 개판으로 진행한 뒤에[* [[가요톱10]]과 슈퍼 선데이 등이 폐지된것도 이때의 일이다.](...) KBS 사장에서 사퇴했다. 이후 [[한국관광공사]] 사장이 되었고 [[김대중]] 대통령을 모델로 내세운 광고가 대성공을 거두면서 그런대로 임기를 채울 것 같았는데 [[1999년]] 비리혐의로 불명예스럽게 강제퇴직을 당하며 잠깐 콩밥먹는 신세가 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새로 출범된 재단법인 [[세종문화회관]] 초대 이사장직 선임도 무산되었다. 그래도 풀려난 뒤 [[2000년]] [[중앙일보]] 고문을 맡으며 [[2002년]] [[JIBS]] 회장에도 앉았고, 2003년부터 5년간 로또공익재단(현 인터알리아공익재단) 이사장도 역임했다. JIBS가 지방방송사이다 보니 크게 두각을 나타낸 것은 없었고, JIBS 회장 임기를 마친 후 [[2011년]] [[JTBC]] 회장으로 복귀했고 [[2013년]]부터 상임고문을 맡았다. JTBC 회장으로서는 방송 초기이다 보니까 어수선한 티가 많이 날수밖에 없었는데, 상임고문을 맡은 후부터 JTBC가 대빅을 터트렸지만 직접 공헌한 것은 아니기는 하다. 그러다가 [[2017년]]에 TV조선으로 자리를 옮겨서 [[2017년]] 5월 [[TV조선]] 회장에 취임했다. 여기에서도 미스트롯, 미스터 트롯으로 대박을 치면서 감은 죽지 않았다는 평이다.[* 다만 미스트롯, 미스터 트롯의 대박은 실질적으로는 김민배 대표의 공으로 봐야 한다. 홍두표는 외부 출신 인사이지만 김민배는 조선일보 1군 부서인 사회부,정치부를 거쳐서 TV조선까지 핵심 보직을 맡아온 실세로 조선일보에서 잔뼈가 굵은 인물이다. 실제로 뉴스, 예능 등 TV조선 시청률을 올린 공으로 대표이사를 3번째 연임 중이다.] [[1995년]]에 방영된 인기드라마 [[바람은 불어도]]의 제목을 홍두표가 직접 지었다는 일화도 있다. == 상훈 == * 국민훈장 동백장 (1986) * 금관문화훈장 (1997) * 제37회 한국방송대상 공로상 (2010) == 경력 == * (2017년 5월 ~ '''현재''') TV조선 회장 * (2011년 3월 ~ 2013년 3월) JTBC 총괄 회장 * (2011년 3월) 중앙일보 방송담당 회장 * (2002년 5월 ~ 2011년 3월) JIBS 회장 * (1998년 4월 ~ 1999년 5월) 한국관광공사 사장 * (1993년 3월 ~ 1998년 3월) 한국방송공사 사장 * (1992년 2월 ~ 1993년 3월) 중앙일보 발행인 '''·''' 편집인 '''·''' 인쇄인 '''·''' 대표이사 사장 * (1989년 3월 ~ 1992년 1월) 한국담배인삼공사 사장 * (1987년 4월 ~ 1989년 3월) 전매공사 사장 * (1981년 1월 ~ 1986년 8월) 한국방송광고공사 사장 * (1981년 1월) 한국방송광고공사 설립위원장 * (1980년 9월 ~ 1980년 11월) 중앙일보·동양방송 방송부문 대표이사 사장 * (1980년 2월 ~ 1980년 9월) 중앙일보·동양방송 전무이사 == 관련 문서 == * [[한국방송공사/역사]] * [[동양방송]] * [[한국담배인삼공사]] * [[한국관광공사]] == 관련 자료 == * [[http://legacy.h21.hani.co.kr/h21/data/L990524/1p705o03.html|한겨레 21 1999년 6월 3일자 기사]] [각주] [[분류:대한민국의 남성 언론인]][[분류:1935년 출생]][[분류:남양 홍씨(당홍)]][[분류:화성시 출신 인물]][[분류:인천고등학교 출신]][[분류:서울대학교 출신]][[분류:경희대학교 대학원 출신]][[분류:전매청장]][[분류:한국방송공사 사장]][[분류:한국관광공사 사장]][[분류: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 사장]][[분류:국민의 정부/인사]][[분류:전두환 정부/인사]][[분류:금관문화훈장]][[분류:국민훈장 동백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