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위서)] 胡昭 (162 ~ 250) [목차] [clearfix] == 개요 == [[후한]] 말과 [[삼국시대(중국)|삼국시대]]의 서예가이며 자는 공명(孔明)으로 예주 영천군 출신. == 생애 == 어려서 널리 배우고 영달과 이익을 바라지 않아 백이[* 은나라 말기에 주나라가 임금의 나라인 주나라를 공격하는 것을 말리다가 듣지 않자 산에 들어가 은거한 인물이다.]와 사호[* 진(秦)나라 때 상산에 숨었던 인물이다.]의 절개가 있어 벼슬하지 않았다고 한다. [[종요]]와 함께 호비종수(胡肥鍾瘦)라고 일컬어졌으며, 종요와 함께 [[유덕승]]이라는 사람에게 글씨를 배웠다고 한다. 처음에 기주 땅으로 피했다가 [[원소(삼국지)|원소]]가 그를 불렀지만 사양했다. [[조조]]가 사공, 승상이었을 때 예를 다 해 자꾸 부르자 조조에게 가서 자신은 한낱 시골 사람이라 나라의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했으며, 조조가 부르는 것을 취소해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고 했다. [[사마의]]가 벼슬이 없을 때부터 친구로 같은 군에 사는 [[주생]]이 황제를 시해하려고 하자 눈물을 흘리면서 만류했으며, 대추나무를 도끼로 찍어 함께 맹세하면서 이별했다. 황제로부터 음덕을 받았지만 죽을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아 누구도 그 사실을 알지 못했으며, 그에 대한 신뢰는 고향 사람들이 누구도 따르지 못했다. 211년에 백성들이 [[마초]]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백성들이 산으로 피했다가 1천여 가구가 식량이 떨어져 서로 포악한 짓을 했는데, 그들을 좋은 말로 설득해 문제를 해결했다. 도둑들도 그 소문을 듣고 존경했으며, 그가 사는 곳을 중심으로 300여리에는 누구도 포악한 짓을 하지 않았다. 호소는 육혼산으로 들어가 농사를 하고 경서를 즐기면서 사니 온 마을이 공경해 사랑했다고 하며, 218년에 육혼현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육혼장 [[장고(삼국지)|장고]]가 호소가 있는 곳으로 왔다. 반란이 진압된 후에도 [[손랑#s-2]]이 촉나라에 귀순했다가 육혼을 다시 공격했는데, 이들은 호소가 사는 부락은 공격하지 않겠다고 했다. 이후 형주 의양군으로 이사했다가 [[두서#s-2]]와 만나면 윤리에 대해 토론했는데, 겸손하게 대하면서 호소를 존경했다. 태위 [[장제(조위 태위)|장제]]는 그를 불렀지만 관직에 나가지 않았으며, 정시 연간(240 ~ 249년)에 표기장군 [[조엄]], 상서 황휴, 곽이, 산기상시 [[순의]], [[종요]], 태복 유의, 홍농태수 하정 등이 호소를 추천했다. 그를 추천했지만 조정에서 군사적으로 해결해야 할 일이 끊임없이 발생해 문제를 해결된 후에 실행했기 때문에 부르지 않았는데, 문제들이 해결되자 호소가 추천되어 250년에 호소를 불렀지만 마침 세상을 떠났다. 사서에 밝아 [[종요]], [[한단순]], [[위기(조위)|위기]], [[위탄#s-2]] 등과 함께 명성을 날렸으며, 그가 남긴 척독은 대개 해서로 썼다고 한다. == 기타 창작물 == [[파일:The Legend of Cao Cao Hu Zhao.png]] [[삼국지조조전 Online]]에서는 사마의전에서 육혼산의 은자로 사마의와 정사에 대해 토론하면서 사마의가 성장하는데 기여한다. 사마의가 자식의 이름을 사와 소로 지은 까닭은 호소를 스승으로 모신다는 의미였다. 사마의는 후반부로 갈 수록 호소를 회상하지 않게 되는데 이는 사마의전을 거치면서 계속되는 사마의의 [[흑화]]를 나타낸다. 즉, 순수하고 올곧았던 사마의를 나타내는 인물. [각주]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호소, version=45, paragraph=2)] [[분류:후한의 인물]][[분류:삼국시대(중국)/인물]][[분류:중국의 서예가]][[분류:162년 출생]][[분류:250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