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로마 공화국의 시인]] [[분류:로마 제국의 시인]] [[분류: 기원전 65년 출생]] [[분류: 기원전 8년 사망]][[분류:바실리카타 주 출신 인물]] ||||<:>[[파일:Quintus_Horatius_Flaccus.jpg|width=100%]]|| || '''이름''' ||<:>퀸투스 호라티우스 플라쿠스(Quintus Horatius Flaccus)|| ||<:>'''출생'''||<:>기원전 65년 12월 8일, 이탈리아 남부 베누시아|| ||<:>'''사망'''||<:>기원전 8년 11월 27일 (향년 56세), 밀라노|| [목차] == 개요 == 호라티우스는 로마의 가장 유명한 시인이다. 생전에도 괜찮은 명성을 누렸고, [[인문주의]], [[고전주의]] 작가들의 숭상의 대상이었으며 오늘날까지도 서구권에서 [[베르길리우스]]와 함께 그의 작업물들은 필독서들로 여겨진다. [[카르페 디엠]]이라는 경구로 특히 유명하다. == 생애 == 기원전 65년 해방된 노예 (라: libertinus) 아버지 밑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업무를 이유로 로마로 상경했고, 호라티우스는 문학과 문법을 공부했다. 교육에 열광적이었던 아버지는 가난한 형편에도 불구하고 호라티우스를 그리스 철학의 본고장 아테네로 보내서 시학과 [[에피쿠로스 학파]], [[스토아 학파]] 등을 공부하게 하였다. 한편 기원전 44년 로마에서는 [[카이사르]]가 [[브루투스]]와 원로원들에게 암살당해 전 사회가 뒤흔들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카이사르파와 공화파의 내전이 발발하자 호라티우스는 공화파에 가담했지만, 필리피 전투에서 [[옥타비아누스]]의 군대에 의해 짓밟혔다. 아버지의 재산을 완전히 몰수당한 뒤 호라티우스는 정치적 야망을 모두 포기했다. 호라티우스는 로마의 분위기가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본국으로 돌아와 재무서기관을 역임하고 간간히 시를 썼다. 그를 주목한 [[베르길리우스]]를 통해 외교관이자 예술 후원자인 [[가이우스 킬리니우스 마이케나스|마이케나스]]를 만났고, 그 덕에 유럽의 정치적 사건들을 목격할 수 있었다. [[악티움 해전]] 즈음 오늘까지 간직된 글 중에는 가장 오래된 "미해"를 완성하고[* 호라티우스 작업물 전체가 정확한 날짜를 가늠하기 힘들다], 기원전 23년에는 과거의 적이었으나 이제는 프린켑스의 자리에 오른 [[옥타비아누스]]에 대한 "찬송시"를 작시했지만, 기대에 비해 성공했다기엔 얻은 바가 미미했다. 기원전 20년 즈음부터 인생 철학을 담은 "서간시"를 쓰기 시작했는데 그리스 철학자, 특히 [[에피쿠로스]]의 영향이 돋보이는 시집이었다. == 저작과 미학 == 호라티우스의 초기 저작은 "풍자"와 "미해"(라: Epodon liber)[* 엄격한 규율에서 벗어나 금지된 표현들도 서슴치 않고 쓰는 그리스 시학 사조]였다. 순수한 미학적 시가 아닌 신랄한 풍자로 교훈을 주는 것에 초점을 두었다. 커리어가 초토화되고 [[틀렸어 이제 꿈이고 희망이고 없어|꿈도 희망도 없다]]고 시절의 사회에 대한 불만을 표출했다. "찬송시"(라: Odes)로 시작한 중기 저작은 초기의 공격성을 잃고 미학적, 종교적 색채가 가미되었다. 후기의 "서간시"(라: Epistulae)는 정치적 의무에서 벗어나, 보다 내면에 충실한 시다. 자기 친구들과 주고받은 편지들을 집대성해서 인생을 돌아보았다. [[아우구스투스]]가 직접 관심을 보이기까지 하는 등 전기와 중기작에 비해 대성공을 거두었다. == 후대 시인과 문학가들에게 준 영향 == 시대를 풍미하던 [[베르길리우스]]에 비하면 조촐한 대중적 성공을 거두었지만 호라티우스도 나름 유명했던 시인이었다. 약 800년 뒤 [[카를 대제]]의 고대 로마 문학 재발굴 시대인 "카롤링거 르네상스" 때 재평가되기 시작했고, 16세기/17세기부터 명실상부한 로마 시대의 고전으로 자리매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