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다른 뜻1, other1=퍼니싱 그레이 레이븐, rd1=크롬(호광))] [include(틀:후한서)] [include(틀:후한의 태위)] ||||||||||||<:><#008000> '''[[사도|{{{#ffffff 후한의 사도}}}]]''' || || 40대 [[허허#s-2]] || {{{+1 ←}}} || '''41대 호광''' || {{{+1 →}}} || 42대 [[유총#s-2]] || [include(틀:후한의 대사농)] ||<-3>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a11 0%, #a11 20%, #a11 80%, #a11)" '''{{{#fecd21 {{{+1 胡廣[br]호광}}}}}}'''}}} || ||<-3>{{{#!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호광.jpg|width=100%]]}}} || ||<-2> '''[[작위|{{{#FEDC21 작위}}}]]''' ||<(> 안락후^^(安樂侯)^^ || ||<-2> '''[[직위|{{{#FEDC21 최종직위}}}]]''' ||<(> 태부^^(太傅)^^ 겸 녹상서사^^(錄尙書事)^^ || ||<-2> '''[[성씨|{{{#FEDC21 성씨}}}]]''' ||<(> 호^^(胡)^^ || ||<-2> '''[[휘|{{{#FEDC21 휘}}}]]''' ||<(> 광^^(廣)^^ || ||<-2> '''[[자(이름)|{{{#FEDC21 자}}}]]''' ||<(> 백시^^(伯始)^^ || ||<-2> '''{{{#FEDC21 생몰 기간}}}''' ||<(> 음력:91년 ~ 172년 3월 8일[br]양력:91년 ~ 172년 4월 18일 || ||<-2> '''{{{#FEDC21 고향}}}''' ||<(> 형주^^(荊州)^^ 남군^^(南郡)^^ 화용현^^(華容縣)^^ || ||<-3><:> {{{#!folding 역임한 관직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10px;margin-top:-6px;margin-bottom:-16px" ||<|7> '''{{{#FEDC21 재임기간}}}''' ||<:> '''{{{#FEDC21 사도 재임기간}}}''' ||<(><#ffffff> 143년 11월 7일 ~ 146년 윤6월 5일 || ||<:> '''{{{#FEDC21 태위 재임기간}}}''' ||<(><#ffffff> 146년 윤6월 5일 ~ 147년 6월 || ||<:> '''{{{#FEDC21 사공 재임기간}}}''' ||<(><#ffffff> 147년 10월 ~ 151년 10월 || ||<:> '''{{{#FEDC21 2차 태위 재임기간}}}''' ||<(><#ffffff> 153년 10월 ~ 154년 9월 || ||<:> '''{{{#FEDC21 3차 태위 재임기간}}}''' ||<(><#ffffff> 158년 7월 20일 ~ 159년 || ||<:> '''{{{#FEDC21 2차 사도 재임기간}}}''' ||<(><#ffffff> 166년 5월 ~ 168년 9월 || ||<:> '''{{{#FEDC21 태부 겸 녹상서사 재임기간}}}''' ||<(><#ffffff> 168년 9월 ~ 172년 3월 8일 ||}}}}}}|| [[후한]] 말의 인물이며 자는 백시(伯始)로 형주 남군 화용현 사람. 효렴으로 뽑혀 천자에게 올리는 글을 맡았고 [[안제(후한)|안제]]는 호광을 천하제일로 여겼으며, 131년에 상서복야를 지내면서 [[순제(후한)|순제]]가 황후를 세우기 위해 총애하는 귀인 4명 중에서 제비뽑기를 통해 4명의 성씨를 모아 신령에게 기도하는 것으로 신령에게 선택하도록 해 결정하려고 하자 곽건, 사창 등과 함께 덕을 보고 깊이 생각해 뽑아야 한다고 상소를 올렸다. 132년에 상서령 좌웅이 인재 등용이나 관직을 물러나는 상황을 막기 위한 상소를 올리자 곽건, 사창 등과 함께 글을 올려 이를 반박했지만 순제가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외직으로 나아가 제음태수가 되었다가 여러 군수 십여 명과 함께 인재의 천거를 잘못한 일에 연루되어 면직되었다. 143년 11월 7일에는 대사농에서 사도로 옮겨졌고 146년 2월 26일에 [[질제(후한)|질제]]가 붕어하자 후사를 논의하면서 [[이고(후한)|이고]], [[조계(후한)|조계]]와 함께 [[양기(후한)|양기]]에게 후사를 세우는 일에 대한 편지를 보냈다. 윤6월 5일에 태위가 되었고 [[환제(후한)|환제]]의 뜻을 받들어 등무를 쫓아내는 상주문을 올려 등무를 쫓겨나게 했으며, 147년 6월에 태위에서 파직되었다가 10월에 사공이 되었고, 환제가 즉위하면서 환제를 옹립한 공로로 안락후에 봉해졌으며 유문이 남군의 도적인 유유와 왕래한 일을 이용해 양기가 후사를 세우는 일을 권신인 양기와 반대되는 의견을 낸 이고가 무고당해 감옥에 갇히고 죽게 되자 조계와 함께 편지를 받아보고 슬퍼했다. 151년 겨울 10월에는 늙었다는 이유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태상에 임명되었다가 153년 10월에는 태위가 되었으며, 154년에 면직되었다가 이후 태상에 임명되고 158년 가을 7월 20일에 태위가 되었다. 159년에 양기가 주살되자 한연, 손랑 등과 함께 양기에게 아부하고 궁궐을 호위하지 않은 상태에서 장수정에 머물러 있었다는 이유로 사형에서 일 등급을 감해 면직시켜서 서인이 되었으며, 이 일로 옛 관리와 빈객 중에 면직되어 쫓겨난 자가 삼백여 명이어서 조정이 텅 비게 되었다. 이후 복직되었고 165년에 태상을 지냈고 166년 5월에 사도가 되었으며, 168년에 태부 겸 녹상서사가 되었고 172년 3월 8일에 사망했다. 호광은 태부, 삼공 등을 여러 차례 거쳤고 30여 년 동안 안제, [[전소제(후한)|소제]], 순제, [[충제]], 질제, 환제, [[영제(후한)|영제]] 등 역대로 일곱 황제를 섬기면서 극진한 대우를 받았으며, 파면을 당해도 한 해를 채우지 않고 번번이 일찍이 다시 승진했다. 그가 부른 사람 중에는 진번, 이함 등 천하의 명사들이 많았고 경사에서는 만사에 이해되지 않는 것은 백시(호광)에게 묻고 천하의 중용이라면 호공(호광)에게 있다고 말하는 속언이 있었다. 그러나 온유하고 삼가면서 항상 말을 겸손하게 하고 얼굴색을 공손히 해 시대에 아첨하고 충직한 기풍이 없는 지라 천하에서는 호광을 야박하게 대했다. [[분류:후한의 사공]][[분류:후한의 태위]][[분류:91년 출생]][[분류:172년 사망]][[분류:후베이성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