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마비노기 영웅전/캐릭터]] [목차] == 개요 == [[마비노기 영웅전]]의 캐릭터 [[헤기]]의 배경을 설명하는 문서. == 설정 & 배경 == > >[[파일:img_story_10_1.jpg]] > >어린 시절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무언가를 기억할 나이가 되었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내 손목 위에 그려진 문양이었다. >마치 거미를 형상화한 듯 여덟 개의 다리가 그려져 있는 괴이한 문양이었다. >나는 이 문양을 볼 때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곤 했다. > >“그 문양은 케르 가문의 아이에게만 주어지는 영광스러운 훈장이란다.” > >내가 문양을 지우고 싶어 할 때마다 부모님은 그렇게 말하며 나를 달랬다. >그 한 마디로 모든 두려움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두려움보다 익숙함이 내 안에 자리 잡았다. > > >저택에서는 혼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부모님이 저택에 머무르는 날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거대한 저택에서 나 홀로 지내는 날들이 이어졌다. >크게 불편한 점은 없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하인들을 통해서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다. >나는 혼자가 편했다. > >그 날은 추수가 한창인 가을날이었다. >오랜만에 부모님 두 분 모두 저택으로 돌아와 다 함께 식사를 마쳤다. >아버지가 진지한 표정으로 다가와 다음날 아침 함께 갈 곳이 있다며 내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그 말에 나는 한껏 들뜬 기분이 되었다. >가족과 함께하는 첫 외출이 될 터였다. >나는 들뜬 마음을 부여잡고 잠을 청했다. > > >밤이었다. >누군가의 비명소리에 나는 잠에서 깼다. 비명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무슨 일이 난 것이 틀림없었다. >복도로 뛰쳐나와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향했다. >도착한 곳은 부모님의 방이었다. 문이 열려 있었다. > >"!" > >방 안에 발을 디딘 순간 나는 비명을 지를 뻔 했다. >붉은 혈액이 방 한가득 웅덩이를 이루며 퍼져나가고 있었다. >발에 끈적하고 미적지근한 액체가 닿았다. 소름이 끼쳤다. >방 안 곳곳에 사람들이 쓰러진 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무릎을 꿇었다. >수많은 하인들의 시신들 가운데 죽음을 맞이한 아버지와 어머니의 얼굴이 있었다. > >“아버지! 어머니……!” > >내 외침을 듣고 한 사람이 나를 돌아보았다. >어두운 방 안에 두건을 둘러 쓴 자가 어머니의 시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 >두건의 손에는 기이한 형태의 단검이 쥐어져 있었다. >단검 두 개를 자루끼리 이어 붙여 만든 듯한 검, 듀얼대거였다. >검에서 피가 뚝뚝 떨어져 내렸다. >두건이 부모님을 죽인 것이 틀림없었다. >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소리를 지르며 두건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검을 든 자에게 아무런 계획도 없이 맨손으로 달려들다니 멍청하기 짝이 없었다. >두건에 대한 공포와 분노로 제대로 된 사리판단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두건은 내 주먹을 잽싸게 피하고는 눈앞에서 단검을 한 차례 휘둘렀다. >그것만으로 오른쪽 눈두덩 위로 붉은 피가 왈칵하고 쏟아져 내렸다. >뜨거운 혈액이 눈 위를 타고 흘러내리며 한쪽 시야를 가렸다. > >나는 한순간 머뭇거렸다. >그것이 실수였다. >두건은 틈을 주지 않고 다가와 내 복부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나는 어지럼을 느끼며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 >두건은 당장에라도 검을 내리쳐 내 목숨을 앗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두건은 내 예상과는 정반대로 행동했다. >녀석은 가만히 서서 나를 지켜보더니 뒤집어쓰고 있던 두건을 벗고 얼굴을 드러냈다. > >두건 밑에서 차가운 인상을 한 남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남자는 들고 있던 단검을 천천히 내려뜨렸다. >남자의 무심한 눈초리가 나를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방안의 모든 것들이 정적에 잠겨 있었다. >내 흐트러진 숨소리만이 귓가를 울렸다. >남자의 고요한 시선과 적막의 무게에 짓눌려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마침내 남자가 입을 열었다. > >“네 부모들처럼 여기서 죽던가. 아니면, 내 아래에서 살아남던가. 하나를 선택해라.” > >선택이라는 말로 포장된 그것은 선고에 가까웠다. >나는 남자를 노려볼 뿐 대답하지 않았다. >죽음과 복종 가운데 나는 어느 것도 선택하지 않았다. > >- > >살인자 녀석은 왜 나를 죽이지 않았을까? > >왜 나는 살인자 녀석을 따라 이곳까지 온 것일까? > >어두운 방 안으로 의문은 먼지처럼 쌓여만 갔다. >같은 생각이 수백 번째 머릿속을 맴돌고 있다. >왜 그때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는지 끊임없이 자문한다. > >결국, 나는 죽음을 피해 복종을 선택한 것일까? >결단을 내리지 못한 채 덧없는 목숨 하나 건지기 위해 살인자 녀석을 따라온 것이 분했다. > >“에일이다. 에일!” > >문밖으로 소란스러운 웃음소리가 들렸다. >지금의 내 모습을 비웃는 듯한 웃음소리였다. >때때로 들려오는 저 웃음소리가 내 머릿속을 한층 더 복잡하게 만든다. >방안으로 들려오는 웃음소리가 모두 어린아이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살인자 녀석은 이 집에서 아이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내 부모님을 잔인하게 죽인 살인자가 어린아이들과 함께 살고 있다는 것에 나는 기가 찼다. > >이곳에는 살인자 녀석과 아이들뿐 아니라 내 나이 또래의 아이들도 함께 생활하고 있는 듯했다. >내게 식사를 가져다준 아제이스라는 여자도 내 나이 또래였다. > >방문을 열고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왔다. >문 밖에서 새어 드는 햇빛을 피해 나는 몸을 한층 더 웅크렸다. >한숨 섞인 목소리와 함께 내게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 >“어이, 꼬맹아. 계속 이러면 굶어 죽는다?” > >살인자 녀석의 목소리였다. >방 안의 침대에는 어젯밤 아제이스가 가져다 준 식사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 >흥. 내가 먹든 안 먹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나는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 >당장에라도 녀석을 흠씬 두들겨 주고 싶었다. >하지만 녀석은 내 속은 아랑곳하지 않고 침대 위에 놓인 그릇을 덜그럭거리며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그가 우물거리는 말투로 말을 이었다. > >“이럴 거면 뭐하러 날 따라왔냐? 거기서 그냥 죽지.” > >제멋대로 내뱉는 녀석의 헛소리를 더는 참고 들어줄 수가 없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내 앞에 앉은 살인자 녀석을 노려봤다. >그러자 녀석이 내 눈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 >“좋다. 그럼 이건 어때?” > >살인자 녀석이 내게 새로운 제안을 이야기했다. >녀석이 내뱉는 헛소리는 이번에도 궤변이나 다름없었다. > >“나에게 환영술을 배워라. 대련 중 언제든 날 죽여도 좋아. 날 죽여서, 네 부모의 복수를 해라." > >하지만 이전과는 달리 이번 제안에는 복수라는 꼬리표가 달려 있었다. >나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복수를 선택한 것이다. > >- > >살인자 녀석은 에일이라는 촌스러운 이름이었다. >내가 제안을 받아들이자 에일 녀석은 단검을 하나 주며 언제든 덤벼도 좋다고 이야기했다. >무기까지 주면서 복수할 기회를 주는데 나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 >"뭐하냐! 너무 느려서 달팽이가 친구 하자고 하겠다!" > >나는 매일 같이 에일 녀석에게 도전했다. >부모님의 복수를 위해서였다. >나는 녀석의 목을 베기 위해 단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녀석은 내 단검을 너무나도 쉽게 피해냈다. >마치 내가 어떻게 공격할지 미리 알고 있는 것만 같았다. > >"보통 검은 모든 걸 베지만, 환영검은 베려는 것만 벨 수 있게 컨트롤 할 수 있지." > >녀석은 싸움이 끝나면 거들먹거리며 내게 환영술을 가르쳤다. >녀석이 말하는 환영검이란 정신력을 이용해 만들어 낸 실재하지 않는 검을 뜻했다. >환영검은 보통의 검과는 달리 술법자가 원하는 순간에만 실체화되는 검이었다. >이를테면, 보통의 검은 갑주를 두른 적을 공격할 때 갑주 때문에 치명상을 입히기 쉽지 않지만, 환영검을 사용한다면 갑주에 직접 닿을 필요 없이 적의 신체, 나아가서는 적의 장기를 직접 베는 것도 가능한 것이다. > >"환영술은 케르 가문만의 특기지. 타고났을 테니 금방 할 거야." > >환영술을 배워 에일 녀석에게 복수하고자 마음먹은 것과 동시에 내게는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그의 말에 따르면 환영 마법과 환영술은 케르 가문의 사람만이 사용할 수 있었다. >내 손등에 남겨진 문양, 이 문양이 바로 우리 케르 가문의 증표다. >그러니 내가 환영술을 다룰 수 있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에일 녀석도 환영술을 다룰 수 있지 않은가. > >이것은 에일 녀석이 나와 같은 케르 가문의 사람이란 뜻일까. >만약 그렇다면 대체 녀석은 왜 내 부모님을 죽였단 말인가. >나는 차마 물어보지 못했다. > >[[파일:img_story_10_2.jpg]] > >이 숲 속의 작은 집에는 에일 녀석을 비롯한 열 명 남짓한 아이들이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서로를 가족이라 불렀다. >아직 가사에 도움이 되지 않는 여덟 살 미만의 어린아이들 일곱 명이 있었고, >이 아이들을 보살피고 집안일을 도맡아 처리하는 리아, 미셸, 아제이스 같은 나와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이 있었다. > >어른은 한 사람도 없었다. >아, 단 한 사람. 로드 박사라는 사람이 집 뒤편에 있는 별실에서 지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나는 아직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다. >아무튼, 그 사람을 제외하면 이 집은 온통 아이들뿐이었다. > >나는 점차 환영검을 만드는 것에 익숙해졌다. >이제 환영검을 동시에 여러 개 만드는 것도 가능했다. >나는 정신력을 집중해 환영의 단검 여섯 개를 동시에 만들어 사방을 향해 던졌다. >내 주변에는 통나무를 잘라 만든 목표물들이 놓여 있었다. >내 의식에 따라 환영검이 재빠르게 날아가 목표 지점인 여섯 개의 통나무들을 단숨에 꿰뚫었다. > >"헤기, 굉장하다! 배운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 >내 훈련을 지켜보던 아제이스가 탄성을 올렸다. >겨우 이 정도로 놀라다니 혹시 나를 놀리는 건가. >뒤를 돌아보니 아제이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선 감탄했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 >이건 도무지 놀려 먹으려는 표정이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런 성격이었지 싶었다. >별생각이 없다고 해야 하나 해맑다고 해야 하나 독특한 녀석이었다. > >"그야 난 천재니까 못하는 것 따윈 없어." > >내 한 마디에 아제이스가 차가운 눈으로 날 바라봤다. >사실대로 이야기한 것뿐인데 눈으로 본 것을 인정할 줄 모르는 녀석이었다. > >그래도 아제이스는 이 집 사람 중에서 가장 편한 상대 중 한 사람이었다. >항상 목에 붕대를 감고 다니는 이 단발머리 여자는 내가 이곳에 처음 도착한 날부터 한시도 놓치지 않고 나를 졸졸 쫓아다녔다. >내가 계속해서 무시하는 태도를 일관해도 친하게 지내자며 매일 같이 찾아오는 통에 나는 포기를 선언했고, 어느샌가 한두 마디쯤 나눌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 > >내 예상과는 달리 이곳 아이들은 평범하고 또 친절했다. >내가 매일 같이 에일 녀석의 목숨을 노리고 덤비는 모습을 보면서도 내게 싫은 소리 한 번 하는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여기 있는 아제이스처럼 나를 응원한다는 녀석조차 있었다. >혼란스러웠다. >에일 녀석조차 이곳 아이들에게만큼은 친절해 보였다. >내가 보았던 잔인한 살인자의 모습은 이곳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 >내가 혼란스러운 이유는 그것 때문만이 아니었다. >얼마 전, 미셸이란 여자아이가 갑작스레 발작을 일으켰다. >그녀는 갑작스레 쓰러져서는 호흡곤란을 일으킨 것처럼 숨을 쉬지 못했다. >주변의 모두가 패닉 상태가 되어 에일을 찾았다. >마침 에일이 달려와 치유 마법으로 그녀에게 응급 처치를 해 주었다. >다행히 미셸은 안정을 되찾았다. > >그리고 그때, 나는 에일의 품에 들려가는 미셸의 무릎에서 나와 같은 문양을 발견했다. >거미를 형상화한 듯 여덟 개의 다리가 그려져 있는 문양이었다. > >'이 문양은 케르 가문의 아이에게만 주어지는 영광스러운 훈장이란다.' > >어린 시절 부모님의 한 마디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나는 내 손목의 문양을 다시 한번 쳐다보았다. >손목이 욱신거리며 저릿한 느낌이 들었다. >어린 시절 느꼈던 이유를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다시 한번 나를 찾아왔다. >대체 아이들은 무엇을 위해 이곳에 머무는 것일까. >케르 가문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 >나는 혼란스런 마음을 다잡기 위해 다시 한번 환영술에 집중하기로 했다. >더는 길을 잃을 순 없었다. >내 목표는 어디까지나 부모님의 원수를 갚는 것이었다. > >- > >악몽을 꾸었다. >꿈속의 나는 그 날의 저택에 있었다. >저택의 모든 사람이 죽임을 당했던 그 날이었다. > >나는 어머니의 방에 또 한번 발을 들였다. >방 안에는 아직도 새빨간 피의 웅덩이가 가득 차 있었다. >발목까지 차오르는 새빨간 웅덩이. >그 웅덩이 밑에서 거대한 거품처럼 무엇인가가 천천히 솟아올랐다. > >"억울해….... 헤기." > >그것은 그 날 목숨을 잃은 수많은 하인과 나의 부모님이었다. >피를 뒤집어쓴 죽은 자들. 그들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고 내게 다가왔다. > >"갚아줘....... 원수를......." >"우리의 억울한 죽음에 복수를......." > >죽은 자들이 내 몸을 끌어당기며 애원했다. >피의 웅덩이 안으로 나를 끌고 들어가려는 것만 같았다. >나는 그들에게 에일 녀석에게 복수하겠노라 이야기했다. >죽은 어머니를 붙잡고 꼭 원수를 갚겠노라 외쳤다. >그리고 한순간, 어머니의 얼굴은 아제이스의 얼굴로 변했다. > >"아니, 넌 할 수 없어. 에일은 네 가족이니까." > >그 말에 나는 심장이 조여드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죽은 아제이스의 눈동자가 나를 피의 웅덩이 속으로 끌어당겼다. > >- > >천재적인 재능에 힘입어 내 환영검 실력은 금세 늘었다. >나는 이미 에일 녀석보다 환영검을 잘 다룰 수 있었다. >오늘 대결도 녀석이 치사하게 갑자기 체술을 사용해 덤벼들지만 않았어도 내 승리가 확실했다. > >"헤기. 날 죽인 후에는 말이야. 지키기 위해 살아라." > >대결이 끝난 후 에일 녀석이 또다시 설교를 늘어놓았다. >나는 녀석이 이럴 때마다 항상 울컥하고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 >"증오란 일시적인 강함이야. 목표를 잃으면 순식간에 사라지지. 누군가의 도움이 되는 힘을 배워라, 헤기. 그래야 끝까지 길을 잃지 않을 수 있어." > >내 인생을 송두리째 비틀어 놓고 이제 와서 잘난 척 이야기하는 녀석이 꼴 보기 싫었다. > >"웃기지 마!" > >나는 에일 녀석을 향해 소리쳤다. 우스운 이야기였다. >녀석 때문에 세상에 홀로 남겨진 내게 지키고 싶은 것 따위 있을 리가 없었다. > >[[파일:img_story_10_3.jpg]] > >시간이 갈수록 복수를 향한 나의 굳은 결심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에일은 내 가족을 죽인 살인자다. >그것은 변함이 없다. >하지만 에일은 그와 동시에 이곳 아이들의 가족이었다. > >내가 에일을 죽인다면 아이들은 나처럼 가족을 잃게 될 것이었다. >나는 이곳 사람들의 가족을 죽이고 싶은 걸까? >그것이 망설임의 시작이었다. > >"당신, 치료마법을 알고 있다고 했지? 나한테 치료마법을 가르쳐라. 죽이는 건 그다음이야." > >대련이 끝난 후, 나는 에일에게 말했다. >언젠가 에일이 미셸에게 사용한 치료마법을 떠올렸다. >그 능력이 있으면 혹시라도 내가 에일을 다치게 했을 때 편리하겠다 싶었다. >죽일지 살릴지 아직 판단이 서지 않으니 두 힘 모두 익혀두면 도움이 될 터였다. >절대 지난번 에일의 충고를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 >내 말을 들은 에일이 씨익 하고 웃으면서 곁으로 다가왔다. > >"부탁하는 말버릇이 그게 뭐냐? 가르쳐주세요 라고 해야지!" > >에일이 등 뒤에서 내 목을 조르면서 다시 한번 부탁해보라며 협박을 시작했다. >결국, 내가 다시 한번 부탁하기 전까지 에일은 내 목을 조른 채 절대 놓아주지 않았다. >역시 이 녀석한테 부탁하는 게 아닌데 싶었다. > >- > >꿈에서 깨어난 후에도 악몽이 계속되었다. >나는 점차 현실에서까지 죽은 부모님과 죽은 아제이스의 환영을 보기 시작했다. >점차 미쳐가는 것이 분명했다. >부모님은 복수를 서두르라고 애원하고 아제이스는 함께 가족이 되자고 제안했다. >모두가 나를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 >나는 환영을 피해 모든 것을 외면하며 도망쳐다녔다. >부모님의 환영을 볼 때면 환영술을 훈련했고, 아제이스의 환영을 볼 때면 에일에게 배운 치료 마법을 연구했다. > >때가 되면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렇게 모든 결정을 미루고 현상 유지라는 껍데기 속에 숨어 버렸다. > >그리고 어느 날, 나는 한 남자의 환영을 보았다. >그것은 나의 모습을 한 환영이었다. >환영의 등장과 함께 가문의 문양이 욱신거리며 아파졌다. >나의 모습을 한 환영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 >나는 환영을 피해 도망쳤다. >손목의 욱신거림이 멈추질 않았다. >나는 집을 벗어나 정처 없이 숲 속을 달렸다. >그 어떤 환영도 날 찾을 수 없기를 바라며. > >- > >정처 없이 걷다 보니 어느새 저녁이었다. >나는 결국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 >"헤기!" > >아제이스가 나를 향해 소리치며 뛰어 왔다. >그녀의 뒤를 한 무리의 사람들이 쫓아오고 있었다. >지금껏 본 적이 없는 자들이었다. > >"도망쳐야 해! 따라와!" > >아제이스는 필사적으로 달려와 내 손을 잡아끌었다. >나는 무슨 영문인지도 모른 채 그녀의 손에 이끌려 숲에서 이어지는 산 능선을 달리기 시작했다. >추격자들을 피해 우리는 정신 없이 산길을 달렸다. >추격자들의 발소리가 점차 멀어져 갔다. > >"대체 무슨 일이야? 왜 도망가는지 설명이라도 좀 해!" > >발걸음을 살짝 늦추면서 나는 아제이스를 향해 물었다. >나로서는 상황 파악을 하고 싶은 것이 우선이었다. > >"저건....... 케르 가문의 병사들이야." > >그 말에 나는 아제이스의 손을 뿌리쳤다. > >"뭐? 그럼 나는 도망칠 이유가 없잖아! 날 구하러 왔을지도......." > >평소와는 달리 진지한 그녀의 눈동자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 >"에일 때문에 말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상황이 이러니까 얘기할게." > >아제이스가 목에 두른 붕대를 풀기 시작했다. >평소에 단 한 번도 몸에서 떼어낸 적이 없던 붕대였다. >그리고 그녀의 목에는 나와 같은 문양이 있었다. >케르 가문의 문양. > >"그래. 나도 케르 가문의 아이야. 여기 있는 아이들 대부분이 각인을 가졌어." > >그리고 그녀는 망설이듯 다음 말을 꺼냈다. > >"왜냐면 이 각인은 마물을 심어두었다는 표식이니까." > >아제이스는 진지한 눈빛으로 이야기하며 내 손을 다시 잡아 끌었다. >그녀는 발길을 재촉하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 > >사람의 몸속에서 마물을 길러내면 강력하게 자란다고 한다. >그래서 마물을 얻기 위해 케르 가문의 주술사들은 일부러 아이를 길러 아이의 몸속에서 마물을 기르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몸에 새겨진 '각인'은 가문의 문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주술사들이 마물을 심었다는 표식이었다. >아이들 몸속 마물이 깨어나려 할 때 그것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케르 가문의 마법석을 통해 마력을 주입하는 것뿐이었다. >우연히 이 사실을 알게 된 에일은 가문석을 훔쳐 아이들을 데리고 가문을 빠져 나왔다. >그리고 가문의 눈을 피해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가문의 추적자들을 뿌리쳐왔다고 아제이스는 이야기했다. > >"네 부모님을 죽인 이유도 그들이 우릴 모두 처리하려 해서였어. 그리고 거기서 너를 발견했던 거고." >"지금 그 말을 믿으라는 거야?" > >내 부모님이 케르 가문의 아이들을 처리하려 했다니. >그럴 리가 없었다. > >나는 그녀에게 반박하기 위해 목소리를 높였다. >그때였다. >아제이스의 표정이 굳어지며 시선이 내가 아닌 등 뒤를 향했다. > >그곳엔 어느샌가 우리를 쫓아온 케르 가문의 병사들이 있었다. >병사 중 한 명이 나를 향해 마법 스태프를 겨누었다. > >"헤기! 위험해!" > >찰나의 순간, 아제이스가 내 몸을 감쌌다. >보이지 않는 마법의 기운이 그녀의 몸을 꿰뚫고 지나갔다. >그녀가 몸을 가누지 못한 채 바닥으로 쓰러졌다. >나는 아제이스의 몸을 가까스로 부축했다. > >"아제이스!" > >아제이스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의 모습이 언젠가 보았던 미셸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 >나는 두려움이 엄습하는 것을 느꼈다. > >"멈춰! 헤기는 귀한 실험체라고 말했잖나!" > >아제이스를 공격한 무리 중 한 사람이 나서며 스태프를 가진 병사를 향해 소리치고 있었다. >무슨 이유에선지 나를 직접 공격할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아제이스의 몸을 일으켜 함께 도망가고자 했다. >하지만 내가 일으키려 해도 아제이스가 자꾸만 나를 손으로 밀쳐냈다. > >"헤기. 도망가....... 나는 곧 마물이 될 거야. " > >그녀가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 >"에일이 도와주기 전엔 발작이 멈추지 않아." > >그녀가 왜 자꾸만 나를 밀쳐내는지 알 수가 없었다. > >"나는, 내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킬 거야." > >그녀가 왜 슬픈 눈물을 흘리면서 나를 바라보는지. > >"왜냐하면, 헤기는….... 우리의 가족이니까." > >그녀의 몸을 뚫고 거대한 가시가 튀어나왔다. >뼈를 부수고 살갗을 찢으며 튀어나온 그것은 더는 인간의 형상이 아니었다. >아제이스라는 존재가 훼손당하는 듯한 끔찍한 죽음이었다. > >한 남자가 다가와 한때 아제이스였던 존재의 몸을 검으로 찍어 눌렀다. >조금 전에 나를 실험체라 부른 남자였다. >남자의 검이 마물을 천천히 꿰뚫고 들어가자 마물의 가시가 고통으로 꿈틀거렸다. > >"왜 아이들을 마물로 만드는지 아나?" > >그가 공포에 빠진 나의 눈을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 >"길러진 숙주들은 나중에 마물이 되더라도 가문 사람을 공격하지 않거든." > >남자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내 머리가 받아들이지 못했다.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눈앞에서 벌어진 일들 때문에 공포에 질려 모든 이성이 마비된 탓이었다. > >뭐가 난 천재니까야. >넋이 나간 나를 향해 병사들이 천천히 다가왔다. >아무것도 못 한 주제에. >그 순간, 에일이 나타나 병사들을 환영술로 쫓아냈다. >아제이스. >에일이 나를 향해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미안해....... >하지만 내게는 들리지 않았다. >아제이스....... >에일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날 안아 올렸다. >미안해....... 아제이스. >날 어깨에 짊어진 에일은 병사들을 피해 빠르게 도망치기 시작했다. > > >한참을 달렸다. >아제이스의 죽음으로부터 멀어지고도 추격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와 에일 모두 체력이 한계에 다다라 있었다. >다리가 천근처럼 무거웠다. >그 와중에 갑작스러운 내리막이 나타나자 내 다리는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 >중심을 잃은 나는 비탈을 미끄러지며 바닥을 여러 차례 굴렀다. > >"괜찮아? 일어날 수 있겠어?" > >나는 다시금 일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바닥을 디딜 때마다 발목에 격통이 느껴졌다. >바닥을 구르며 발목을 다친 것이었다. 첩첩산중이었다. >이대로 가면 녀석들에게 잡힐 것이 분명했다. >나는 더는 도망칠 수 없는 상황이었다. > >[[파일:img_story_10_4.jpg]] > >에일의 표정에도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우리가 내려온 비탈 위를 바라보았다. >병사들이 얼마 안 가 도착할 것이었다. >에일이 천천히 나를 돌아보았다. > >"헤기. 지금부터 내 말 잘 들어라." > >에일은 나를 바라보며 손에 든 양날의 단검을 내 손에 쥐여주었다. >이 때까지만 해도 함께 병사들을 상대하기 위해 무기를 주는 것으로 생각했다. > >"이건 케르 가문의 가문석이다. 몸에 지니고 있으면 마물화 되는 걸 막을 수 있어." > >그가 항상 목에 걸고 있던 목걸이를 내 목에 걸어주었다. >가문석이라는 부적을 내게 맡긴 것이다. >그것은 나 혼자라도 도망치라는 의미였다. > >"지금 나 혼자 도망치란 거야?" > >에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럽게 웃었다. > >"난 널 죽이려고 했다고! 그런데 어째서 날!" >"넌 나보다 더 잘해낼 수 있을 것 같거든." > >그가 조용히 웃으며 이야기했다. >대체 이 남자는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웃을 수 있는 것일까. > >"난 지키려 했던 걸 모두 잃었어. 그래서 살아봤자 별로 의미가 없지." > >그는 등을 돌려 병사들을 향해 섰다. > >"헤기, 너만은 꼭 살아남아야 해. 넌 내 하나 남은 가족이니까. 알겠지?" > >그 말만 남기고 에일은 병사들을 향해 뛰어들었다. >병사들이 그를 맞아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는 환영 마법을 사용해 마치 맹수처럼 병사들을 베어나갔다. >수많은 환영검이 공중을 수놓으며 피보라를 일으켰다. >그리고 한순간, 그에게 가문석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병사들이 그에게 마력을 주입했다. > >에일은 아제이스와 같은 최후를 맞이했다. >나는 또 한 번 소중한 존재가 산산조각이 나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 >나를 닮은 환영이 다시 한번 나타났다. >모두 내 탓이었다. >환영은 내가 두 사람을 구할 수 있도록 경고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모두 내 각오가 부족한 탓이었다. > >내가 망쳐버렸다. > >병사들의 손이 내게로 다가왔다. >그 손은 내게서 가족을 빼앗아 간 자들의 손이었다. > >- > >아침이 밝은 무렵이었다. >머리가 유난히 무겁고 정신이 몽롱했다. >마치 끝나지 않는 악몽 속에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 >나는 가까스로 눈을 떠 주변을 돌아보았다. >내 주변으로 케르 가문 병사들의 시체가 즐비하게 누워 있었다. >몽롱한 머릿속으로 그들이 나와 에일을 뒤쫓던 자들이라는 것을 기억해냈다. >꿈이 아니었다. >그들을 피해 달아나던 기억도 두 사람의 죽음도. >그리고 내 목에 남겨진 가문석의 목걸이까지. >꿈이 아니었다. > >에일도….... 아제이스도....... 아이들 모두가....... > >'헤기. 날 죽인 후에는 말이야. 지키기 위해 살아라.' > >에일 녀석의 허세 가득한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슬픔이 가슴을 옥죄듯 조여왔다. >턱밑으로 물방울이 모여들며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 >지키기 위해 살라니. >멍청아. >나보고 어떡하란 거야. >지키고 싶다고 생각한 것들을 찾자마자 전부 잃어버렸는데....... > >솔직히 말할 걸 그랬어. >나도 당신들의 가족이 되고 싶었다고. > >- > >시간이 흘렀다. >헤기는 내면의 환영과 마주하는 것에 익숙해졌다. > >[[파일:img_story_10_5.jpg]] > >에일이 남기고 떠난 양날의 단검도 이제는 마치 신체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헤기는 자신을 돌아보며 자조적으로 웃었다. > >그 날 자신이 지금과 같은 마음가짐이었더라면 하는 생각이 떠오르는 탓이었다. > >헤기는 생각을 밀어냈다. >지금 눈앞에는 바로 잡아야 할 것들이 있었다. >그 날 이후로 헤기를 쫓는 추격자들이 끊이지 않았다. >그 말은 즉, 아직도 아이들의 몸에 마물을 심고, 마물을 길러내 전쟁에서 이득을 취하는 추악한 무리가 건재하다는 뜻이었다. > >모른 척할 수 없었다. >복수를 위해서가 아닌, 생존을 위해서도 아닌, 그저 잘못된 것을 바로잡기 위해 헤기는 환영의 검을 뽑아 들었다. > >케르 가문의 저택. >오늘 이곳에 가문의 핵심적인 인물들이 한 데 모일 거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다시는 없을 기회였다. > >저택의 문을 열고 헤기가 들어섰다. >케르 가문의 귀족들이 경악에 찬 눈으로 헤기를 돌아보았다. >그들의 눈동자에 수많은 환영의 칼날이 비쳤다. > >그것은 헤기가 바치는 진혼곡이었다. >악인들의 손에 죽어간 사람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 >영혼의 진혼곡. > >- > >그로부터 일 년이란 시간이 지났다. >헤기는 정처 없이 세상을 여행하던 와중 한 마을에 도착했다. >그곳은 작지만 거미의 수호신과 딸기로 모험가들 사이에서 꽤나 유명한 마을이었다. > >"빨리 종탑 앞으로 집합해라! " > >헤기가 마을에 막 들어섰을 때, 용병단 사무소를 주변으로 집합의 종소리가 울리고 용병단원들의 발걸음이 울렸다. >용병단의 출정 명령이 내려진 듯했다. > >"신참! 여기서 왜 넋 놓고 있나! 빨리 종탑으로 집합해!" > >종탑으로 향하던 용병 중 한 사람이 헤기를 누군가로 착각한 듯 말을 걸었다. >헤기는 당황한 나머지 단원을 향해 손사래를 치며 자신이 단원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용병은 그의 말이 전혀 들리지 않는 듯했다. >용병이 혼잣말이라도 하듯 이야기했다. > >"신물의 폭주라니 불길해. 이대로는 콜헨도 위험해질 수 있다. 우리가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켜내야 한다!" > >용병의 마지막 한마디는 그녀가 남긴 마지막 한마디를 떠올리게 했다. > >'나는, 내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킬 거야.' > >헤기는 용병들을 따라 종탑으로 향했다. > > > >>원작: team Weaver / 글 : 칼미슈 / 그림 : jin > [[http://heroes.nexon.com/media/webtoon/list?series=2|마비노기 영웅전 공홈 헤기 툰 : 팬텀 - 어둠을 가르는 환영]] [각주][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헤기, version=538, paragraph=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