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로마 아우구스타)] || '''이름''' ||헝가리의 머르기트[br](Magyarországi Margit)|| || '''출생''' ||[[1175년]]|| || '''사망''' ||미상|| || '''아버지''' ||[[벨러 3세]]|| || '''어머니''' ||안티오키아의 아그네스|| || '''남편''' ||[[이사키오스 2세]], [[몬페라토 변경백국|몬페라토 변경백]] 보니파초 1세, 성 오마르의 니콜라오|| || '''자녀''' ||마누일 앙겔로스, 요안니스 앙겔로스, 몬페라토의 데메트리오스, 성 오마르의 벨라, 성 오마르의 빌럼|| [목차] [clearfix] == 개요 == [[동로마 제국]] [[앙겔로스 왕조]]의 [[아우구스타]], [[로마 황제|동로마 황제]] [[이사키오스 2세]]의 황후. == 생애 == [[1175년]]경 [[헝가리 왕국]]의 왕 [[벨러 3세]]와 안티오키아의 아그네스 사이의 [[장녀]]로 출생했다. 남동생으로 [[임레(헝가리)|임레]]와 [[언드라시 2세]]가 있었는데, 둘다 헝가리의 국왕이 되었다. [[1185년]] 1월, 동로마 제국의 군사귀족 가문인 [[앙겔로스 왕조]]의 [[이사키오스 2세]]와 결혼했다. 당시 이사키오스는 전 아내 엘리니 콤니니 사이에서 딸 안나 에우프로시나와 아들 [[알렉시오스 4세]]를 두고 있었다. 1185년 9월 11일 이사키오스 2세가 [[폭군]] [[안드로니코스 1세]]를 몰아내고 황위에 등극하자, 그녀도 자연스럽게 황후가 되었고 아우구스타 칭호를 받았다. 그녀는 이사키오스와의 사이에서 두 아들 마누일 앙겔로스와 요안니스 앙겔로스를 낳았다. [[1195년]] 이사키오스 2세는 친형인 [[알렉시오스 3세]]에 의해 [[폐위]]되고 실명형에 처해진 뒤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녀도 함께 투옥되었는지는 불확실하다. 그녀의 의붓아들 알렉시오스 4세는 탈옥 후 [[제4차 십자군 원정]]을 준비하던 십자군에 찾아가서 삼촌을 폐위하고 투옥된 아버지와 자신을 황위에 복귀시켜달라고 청했다. 그러면서 자신을 도와주면 십자군이 지고 있던 빚을 탕감해주고, [[아이유브 왕조|이집트]] 원정을 위해 20만 마르크를 지불하며, 1만 병력과 기사 500명을 파견하고, [[교황수위권]]을 인정하고 [[정교회]]를 [[가톨릭]]과 통합시키겠다고 제안했다. 십자군은 이에 따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하여 알렉시오스 3세를 몰아내고 장님이 된 이사키오스 2세와 알렉시오스 4세를 공동 황제로 추대했다. 이때 머르기트 역시 황후로 복귀했다. 그러나 알렉시오스 4세는 자기가 제시한 무리한 요구를 어떻게든 충족시키려 하다가 [[로마인|백성]]의 분노를 샀고, 1204년 2월 [[알렉시오스 5세]]에 의해 폐위된 뒤 지하감옥에서 활줄로 교살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그의 눈먼 아버지 이사키오스 2세도 죽었다. 그 후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략하고 알렉시오스 5세를 폐위시켰다.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한 십자군 장성들 중에는 [[몬페라토 변경백국|몬페라토 변경백]] 보니파초 1세도 있었다. 그는 부콜레온 궁전을 점거하고 머르기트를 자신의 수중에 두었다. 이후 황제 후보로 출마했지만 [[플랑드르 백국|플랑드르]]와 [[에노 백국|에노]]의 [[백작]] [[보두앵 1세(라틴 제국)|보두앵]]에게 패했다. 보두앵은 보니파초를 달래기 위해 [[펠로폰네소스 반도]]와 [[보스포루스 해협]] 동쪽의 모든 [[아시아]] 영토를 하사했다. 보니파시오는 이 영토를 기반으로 [[테살로니카 왕국]]을 건국했다. [[1204년]] 말, 머르기트는 보니파초와 재혼한 뒤 그의 영지로 함께 갔다. 그녀는 보니파초와의 사이에서 외아들 데메트리오스를 낳았다. 그러나 보니파초는 민중의 지지를 거의 받지 못했고, 외세의 침략으로 인해 숱한 전쟁을 치러야 했다. 그러던 [[1207년]], 보니파시오는 테살로니키로 돌아가던 중 불가리아군의 매복 공격을 받아 생포된 뒤 [[참수형]]에 처해졌고, 그의 머리는 [[불가리아 제2제국]]의 [[차르]] [[칼로얀]]에게 넘겨졌다. 머르기트는 어린 아들 데메트리오스를 국왕으로 선출하고 자신이 섭정을 맡았다. 하지만 귀족들이 이에 반대해 섭정위원회를 스스로 구성하였고, 양자간의 대립이 심해졌다. [[라틴 제국]]의 황제 [[앙리(라틴 제국)|앙리]]가 테살로니키로 찾아오자, 머르기트는 사정을 설명하며 도와달라고 청했다. 앙리는 이를 수락하고, 머르기트가 유일한 섭정이라고 공표했다. 그러나 섭정단 대표 비안드라테는 이에 순응하지 않았다. 그는 일단 도피한 뒤 음모를 꾸몄고, 1216년에 귀환한 뒤 섭정을 요구했다. 머르기트가 구원을 요청하자, 앙리 황제는 다시 테살로니키로 향했지만 그해 6월 테살로니키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이후 귀족들이 반기를 들자, 머르기트는 아들 데메트리오스를 테살로니키에 남겨두고 헝가리로 도망쳤다. 이후 제4차 십자군에 참여하고 도리스에서 영지를 가지고 있던 성 오마르의 니콜라오와 결혼하였고, 딸 벨라와 아들 빌럼을 낳았다. 1223년 3월 30일 교황 호노리오 2세는 머르기트의 재산 목록을 담은 문서를 보내 그녀를 지켜주겠다는 의사를 표했다. 머르기트의 이후 생애는 알려지지 않았다. [[분류:동로마 황후]][[분류:아우구스타(동로마)]][[분류:아르파드 가문]][[분류:앙겔로스 가문]][[분류:알레라미치 가문]][[분류:1175년 출생]][[분류:코마롬에스테르곰 주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