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조선왕릉)] ||<-2> [[파일:정부상징.svg|width=28]] '''[[대한민국의 사적|{{{#f39100 대한민국 사적 제194호}}}]]''' || ||<-2> {{{#fff {{{+1 '''서울 헌릉과 인릉'''}}}[br]{{{-1 서울 獻陵과 仁陵[br]Heolleung and Illeung Royal Tombs, Seoul}}}}}} || ||<-2>{{{#!wiki style="margin: -5px -10px" [include(틀:지도, 장소=헌인릉, 높이=200px, 너비=100%)]}}} ||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초구]] 헌인릉길 36-10 ([[내곡동(서울)|내곡동]]) || || '''분류''' || 유적건조물 / 무덤 / 왕실무덤 / 조선시대 || || '''면적''' || 1,057,646㎡ || || '''지정연도''' || [[1970년]] [[5월 26일]] || || '''건축시기''' || [[조선시대]], [[1420년]] || || '''관리''' || [[문화재청]] 조선왕릉중부지구관리소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img_0109_map.jpg|width=100%]]}}}|| || '''헌인릉 안내도''' || [목차] == 개요 == [[서울특별시]] [[서초구]] [[내곡동(서울)|내곡동]]에 있는 [[조선시대]] [[왕릉]]군(群)으로, [[조선]] 제3대 왕 [[태종(조선)|태종]]과 태종비 [[원경왕후]]가 함께 잠든 헌릉(獻陵)과 [[조선]] 제23대 왕 [[순조]]와 순조비 [[순원왕후]]가 함께 잠든 인릉(仁陵)을 합쳐 부르는 말이다. 현재 [[대한민국의 사적|사적]] 제194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공인 문화재이다. 조선왕릉은 대부분 능침 보존을 위해 능역 앞까지는 올라가지 못하게 막아 놓았고 정자각 쪽에서만 관람이 가능하지만, 태종의 헌릉은 능침 앞까지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이 따로 마련이 되어 있어서 능을 가까이서 감상할 수 있는 능이다. 이는 세종의 [[영릉(세종)|영릉]]도 마찬가지. == 상세 == [[선정릉]]과 더불어 강남에 둘 뿐인 왕릉 부지이다. 그러나 진짜 도심 한복판 노른자위 땅에 자리잡고 있는 선정릉과 달리 헌인릉은 대중교통이 닿질 않고, 도심지와는 [[구룡산]]과 [[대모산]]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는, 사실상 이름만 강남인 최외곽지대에 위치하고 있어 접근 자체는 쉽지 않은 편이다. 그래도 서초구라는 이름값이 있는 만큼 부동산 성공한 조선 국왕[* 왕족까지 포함하면 [[방배동]]에 능이 있는 [[효령대군]]도 많이 언급된다.]이란 농담에 종종 언급되는 편이다. 사실 근처에 [[국가정보원|회사]]나 [[제52보병사단]] [[예비군]]훈련장 등이 있어 앞으로도 개발되기는 힘들 곳이라 실제 부동산으로 크게 돈을 벌기 어려운 자리이긴 하다. 다만 소나무 숲이 조성되어 있는 등 자연에 가까운 분위기가 매력적인 곳이다. 특히 풍수지리에서 묏자리를 정할 때, 좋은 예로 많이 언급된다. 서쪽에 [[국가정보원|국가중요시설]]이 있어서 순조의 [[인릉(서울 서초)|인릉]](仁陵)에서 함부로 사진을 촬영하면 제지받는다. 그런데 같은 능역으로 묶은 태종의 [[헌인릉|헌릉]](獻陵)에서는 인릉처럼 제지를 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헌릉은 자유롭게 촬영해도 되고, 인릉에서만 보안상에 유념, 주의해서 사진을 촬영하면 된다. == 역사 == 헌인릉은 1420년부터 1900년까지 대략 아래와 같이 조성되었다. * 1420년([[세종(조선)|세종]] 2년) [[원경왕후]]가 승하하고, 현재의 위치에 능을 조성 * 1422년(세종 4년) [[태종(조선)|태종]] 승하, 원경왕후와 쌍릉으로 헌릉을 조성 * 1834년([[헌종(조선)|헌종]] 즉위년) 음력 11월 13일 [[순조]] 승하 * 1835년(헌종 1년) 음력 4월 19일 파주 교하 [[인조]]의 [[장릉(파주)|장릉]] 근처에 능을 조성 * 1856년(철종 7년) 헌릉 서쪽 언덕 현재의 위치로 천장 * 1857년([[철종(조선)|철종]] 8년) [[순원왕후]] 승하, 합장릉으로 인릉을 조성 * 1899년([[광무]] 3년) 순조와 순원왕후를 각각 순조숙황제, 순조숙황후로 높임 * 1900년(광무 4년) 황제의 격에 맞춰서 비각의 표석을 세움 == 헌릉(獻陵) == [include(틀:역대 조선 국왕 관련 문서)]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72000, #bf1400 20%, #bf1400 80%, #972000); color: #FFD400" '''조선 태종과 원경왕후의 왕릉 | 헌인릉 내 1기[br]{{{+1 헌릉}}}'''[br]獻陵}}}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img_visual03.jpg|width=100%]]}}} || || '''매장지''' ||[[서울특별시]] [[서초구]] 헌인릉길 36-10 || || '''조성형태''' ||쌍릉(雙陵) || || '''매장자''' ||'''봉분 좌''' [[태종(조선)|태종]] {{{-2 ([[1422년]] [[6월 8일]] 사망)}}}[br]'''봉분 우''' [[원경왕후]] {{{-2 ([[1420년]] [[8월 27일]] 사망)}}} || || '''조성시기''' ||[[1420년]] [[10월 2일]] || || '''홈페이지''' ||[[https://royaltombs.cha.go.kr/tombs/selectTombInfoList.do?tombseq=139&mn=RT_01_09_01|[[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width=23]]]] || [clearfix] [[파일:헌릉1930.jpg]] 조선 초창기의 왕릉, 특히 쌍릉의 형식을 모범적으로 보여주는 왕릉이다. 위 사진은 1920년대에 촬영된 것으로 보이는 헌릉의 모습이다. (출처: 조선고적도보) 왼쪽 봉분이 태종, 오른쪽 봉분이 원경왕후의 능이다. [[조선]]의 3대 왕 [[태종(조선)|태종]]과 왕비 [[원경왕후]]를 모신 쌍릉이다. 1420년 태종의 비(妃)이자 4대 왕 [[세종대왕|세종]] 그리고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의 모후였던 [[원경왕후]]가 먼저 승하하게 되면서 지금의 자리에 왕릉이 지어져서 안장되었고 이후 상왕(上王)이 되어서 3남 충녕대군(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물러난 [[태종(조선)|태종]]도 승하하여 같은 자리에 안장되면서 헌릉이 지어지게 되었다. 태종의 가혹한 외척 숙청으로 인해 말년 심신이 고생하다가 세상을 떠난 원경왕후의 릉에 태종까지 안장한 이유는 세종대왕이 두 부부가 저승에서라도 화해하여 잘 지내기를 바란 의도가 있었다. 원경왕후가 세상을 떠나 원경왕후의 상을 치를 때 태종은 역월단상제([[삼년상]] 항목 참조)를 적용해서 굳이 3년상을 다 치를 필요 없고 12일만 입으라고 했지만 세종은 "3년복을 다 입지는 못해도 어머님 산소에 모실 때까지는 입겠다"고 반대했으며, 세종은 또한 태종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원경왕후의 무덤 옆에 작은 절을 지으려고 했는데, 태종이 "내가 불교를 싫어하는데 왜 내가 나중에 들어갈 무덤 옆에 절을 짓냐"고 버럭하자 "어머니 계시는 곳이 너무 적적해서 절에서 염불하는 소리라도 들으시면 좋지 않을까 해서 그럽니다."라고 대답했다. 물론 절을 짓는 것은 없던 일로 끝났지만, 세종이 태종의 말에 정면으로 반발한 몇 안 되는 사례로 남아 있다.[* 사실 태종과 원경왕후는 정말 사이가 늘 나쁜 것이 아닌 부부 애증관계의 아주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다투기도 살벌하게 다퉜지만 자식양육에 있어서는 죽이 잘 맞기도 했으며 자녀도 일찍 잃은 자식을 포함해서 굉장히 많이 낳아왔다. 그리고 무덤 관련 일화에서도 나와있지만 태종 본인이 원경왕후와 함께 묻히기를 소망하였다. 이에 대해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의 작가 [[박시백]]은 세종 실록 편에서 "외척 단속과 왕권 강화라는 명분이 있기는 했지만 어머니와 외가에, 나아가 자신의 처가에까지 너무 가혹했던 아버지에 대한 반발이었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 인릉(仁陵)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72000, #bf1400 20%, #bf1400 80%, #972000); color: #FFD400" '''조선 순조와 순원왕후의 왕릉 | 헌인릉 내 2기[br]{{{+1 인릉}}}'''[br]仁陵}}}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DSC_0046.jpg|width=100%]]}}} || || '''매장지''' ||[[서울특별시]] [[서초구]] 헌인릉길 36-10 || || '''조성형태''' ||합장릉(合葬陵) || || '''매장자''' ||[[순조|순조 숙황제]] {{{-2 ([[1834년]] [[12월 13일]] 사망)}}}[br][[순원왕후|순원숙황후]] {{{-2 ([[1857년]] [[9월 21일]] 사망)}}} || || '''조성시기''' ||[[1834년]] [[12월 19일]] || || '''홈페이지''' ||[[https://royaltombs.cha.go.kr/tombs/selectTombInfoList.do?tombseq=140&mn=RT_01_09_01|[[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width=23]]]] || [clearfix]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DSC_0046.jpg|width=100%]]}}}||{{{#!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DSC_1152a.jpg|width=100%]]}}}|| || '''인릉 후면에서 정면을 바라본 모습''' || '''인릉의 정자각''' || ||<-2>{{{#!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인릉 1930.jpg|width=100%]]}}}|| ||<-2>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1920년대 인릉(仁陵)의 모습''' || [[조선]] 제23대 왕 [[순조]]와 왕비 [[순원왕후]]를 모신 합장릉이다. 인릉은 [[조선왕릉]] 중 전형적인 합장릉의 형식을 띄고 있다. 한 가지 특이할만한 점은 조선왕릉의 형식으로 만들어진 왕릉 중에서는 마지막 합장릉이라는 점인데, 이는 24대 왕 [[헌종(조선)|헌종]]과 왕비들을 모신 [[경릉]]은 삼연릉이라는 독특한 형식이고, 25대 왕 [[철종(조선)|철종]]과 [[철인왕후]]를 모신 [[예릉]]은 쌍릉의 형식이며, 26대 왕 [[고종(대한제국)|고종]]과 [[명성황후]]를 모신 [[홍유릉|홍릉]]과 27대 왕 [[순종(대한제국)|순종]], [[순명효황후]], [[순정효황후]]를 모신 능은 황제릉의 형식으로 지어져 있기 때문이다. 봉분은 병풍석이 없이 난간석만 둘러쳐져 있으며, 혼유석 1기[* 혼유석은 조선왕조 초창기에는 봉분이 하나더라도 합장릉인 경우에는 2기가 설치되어 있으나, 중기를 넘어서게 되면 합장릉인 경우에도 1기만 설치하게 된다], 장명등 1기와 망주석 1쌍, 문인석 1쌍, 무인석 1쌍, 석마 2쌍, 석호 2쌍, 석양 2쌍 등이 표준에 맞춰져서 설치되어 있다. 다만, 봉분과 봉분을 둘러싼 곡장(담) 사이의 공간이 꽤나 넓어서 여유로움이 느껴지는 점이 특징이다. 인릉의 정자각 우측에는 비각이 세워져 있는데, 그 안에는 2개의 표석이 세워져 있다. 하나는 숭정 기원후 230년(1857년, [[철종(조선)|철종]] 8년)에 세워졌으며, "조선국 순조대왕 인릉 순원왕후 부좌(朝鮮國 純祖大王 仁陵 純元王后 附左)"라고 새겨져 있다. 또다른 하나는 [[광무]] 4년(1900년)에 세워졌으며, "대한 순조숙황제 인릉 순원숙황후 부좌(大韓 純祖肅皇帝 仁陵 純元肅皇后 附左)"라고 새겨져 있다. === 인릉의 역사 === > 순종 연덕 현도 경인 순희 체성 응명 흠광 석경 계천 배극 융원 돈휴 문안 무정 헌경 성효 대왕(純宗淵德顯道景仁純禧體聖凝命欽光錫慶繼天配極隆元敦休文安武靖憲敬成孝大王)은 숭정(崇禎) 기원후(紀元後) 1백 63년 경술년 6월 18일 탄생하였다. 경신년 2월 왕세자(王世子)에 책봉되고 이해 7월에 즉위하였다. 갑오년 11월 13일에 승하(昇遐)하였고 을미년 4월 19일에 교하(交河)의 구치(舊治) 뒷산 을좌(乙坐)의 언덕에 장사 지냈는데, 재위(在位)는 34년이고 수(壽)는 45세이다. 헌종(憲宗) 14년 무신년에 존호(尊號)를 체성 응명 흠광 석경(體聖凝命欽光錫慶)이라고 추상(追上)하였고, 금상(今上) 4년 계축년에 존호를 계천 배극 융원 돈휴(繼天配極隆元敦休)라고 추상(追上)하였다. 병진년 10월 11일 광주(廣州)의 헌릉(獻陵) 오른쪽 등성이 자좌(子坐)의 언덕에 천봉(遷奉)하였다." 【영중추부사 정원용(鄭元容)이 지었다.】 [[조선왕조실록]] 순조실록 부록에 있는 순조대왕 천릉 비문에는 순조가 승하한 후 어느 곳에 장사를 지냈는지, 그리고 언제 이 곳으로 천릉(遷陵, 능을 옮김)하였는지에 대해서 자세히 밝히고 있는데, 그 내용은 위와 같으며, [[http://sillok.history.go.kr/id/kwa_200008|조선왕조실록 기사]] 조금 더 상세하게 인릉의 조성 역사를 일자별로 정리하자면 아래와 같다. * 1834년(헌종 즉위년) 음력 11월 13일, 순조 승하 * 1834년(헌종 즉위년) 음력 12월 21일, 능을 파주의 옛 장릉(長陵)[* 옛 장릉은 [[인조]]와 [[인열왕후]]가 안장된 [[장릉(파주)]]의 초장지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며, 오늘날 파주 운천리를 의미함. 장릉(長陵)은 원래 파주 운천리에 위치하였다가, 나중에 현재의 위치인 파주 갈현리로 천장하였음] 의 왼쪽 언덕에 정함 [[http://sillok.history.go.kr/id/kxa_10012021_001|조선왕조실록 기사]] * 1835년(헌종 1년) 음력 2월 29일, 능을 조성하면서 흙빛이 흡족하지 못하고 뇌석(腦石)이 깨져 상할 염려가 있다 하여, 조성을 중지함 [[http://sillok.history.go.kr/id/kxa_10102029_001|조선왕조실록 기사]] * 1835년(헌종 1년) 음력 3월 7일, 능을 파주 교하의 장릉(長陵)의 국내(局內)로 옮기라고 명함 [[http://sillok.history.go.kr/id/kxa_10103007_001|조선왕조실록 기사]] * 1835년(헌종 1년) 음력 3월 15일, 인릉의 위치를 운천리로 정한 상지관 이시복을 능 주변의 흙빛이 불길하자 이를 은폐하였다는 이유로 참수형에 처함. * 1835년(헌종 1년) 음력 4월 19일, 파주 교하에 장사를 지냄 * 1855년(철종 6년) 음력 1월 18일, 인릉의 천장 등에 대해서 논의함 [[http://sillok.history.go.kr/id/kya_10601018_001|조선왕조실로 기사]] * 1856년(철종 7년) 음력 10월 11일, 헌릉 서쪽 언덕으로 옮김 그 후, 순조의 왕비인 [[순원왕후]]가 1857년(철종 8년) 음력 8월 4일에 승하하자, 능호를 문릉(文陵)으로 하였으나, [[http://sillok.history.go.kr/id/kya_10808010_002|조선왕조실록 기사]], 이후 인릉에 합치는 것으로 결정하였으며, [[http://sillok.history.go.kr/id/kya_10808018_003|조선왕조실록 기사]] 음력 12월 17일에 인릉에 합장하였다. [[http://sillok.history.go.kr/id/kya_10812017_001|조선왕조실록 기사]] == 과거 헌인릉 지역에 있었던 왕릉 == === [[영릉(세종)|영릉]](英陵) === 조선 4대 왕 [[세종(조선)|세종]]이 1450년 음력 2월 17일에 승하하고, 왕비인 [[소헌왕후]]는 그보다 앞선 1446년 음력 3월 24일에 승하하였는데, 이 둘을 같이 모신 영릉(英陵)은 원래 [[태종(조선)|태종]]과 [[원경왕후]]를 모신 헌릉의 서쪽 언덕에 있었다. [[http://sillok.history.go.kr/id/kda_12806006_002|조선왕조실록 1446년 음력 6월 6일 기사의 영릉 지문, "영릉(英陵)을 헌릉(獻陵) 서강(西崗)에 다스리어"]] 이 위치는 정확히 알기는 어렵지만, 현재 [[순조]]와 [[순원왕후]]를 모신 인릉의 자리라고 추정하고 있다. 그러다가 7대 왕 [[세조(조선)|세조]] 대에 영릉의 자리가 불길하다는 이유로 천장을 하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실현되지 못하다가, 1469년([[예종(조선)|예종]] 1년) 지금의 [[경기도]] [[여주시]] 영릉의 위치로 천장을 하였다.[* 다른 의미로는 지금의 인릉이 있는 자리는 흉당이라는 것. 그리고 원래 파묘자리는 다시 안 쓴다. 특이하게 영조의 [[원릉]]은 파묘자리를 썼다.] 자세한 내용은 [[영릉(세종)]] 문서 참조. === [[희릉]](禧陵) === [[조선]] 11대 왕 [[중종(조선)|중종]]의 두 번째 왕비인 [[장경왕후]]가 안장된 [[희릉]]의 초장지(初葬地)가 헌인릉 근처에 있었다. 정확히는 지금의 헌인릉 능역 안은 아니고, 바로 근처에 있는 국가정보원 부지 안에 있었다. 1515년(중종 10년) 장경왕후가 승하하자 헌릉 서쪽 언덕에 왕릉을 조성하였으나, 1537년(중종 32년)에 희릉 조성 당시에 문제가 있었다는 [[김안로]]의 주장에 따라, 현재의 [[서삼릉]]지역으로 천장하였다. === 영릉, 희릉 초장지 발굴 === 영릉, 희릉의 초장지 관련해서 최근에 정식으로 발굴된 기록이 있는데, 이는 조선왕릉을 정식으로 발굴한 유일한 사례다. 지난 [[1973년]] 세종대왕기념사업회가 영릉(英陵) 초장지인줄 알고 현재의 희릉 초장지를 발굴하다가 묘지석 파편을 발견했고, 이후 [[2008년]]에 [[문화재청]]에서 대대적으로 발굴을 했는데, 발굴을 해보니 영릉이 아니라 희릉의 초장지였다.--... 응?--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2174304|관련 기사]] == 교통 == * 지하철역에서 꽤 먼 곳에서 위치한다. 그래도 지하철을 이용하려면 [[지하철 2호선]], [[신분당선]] [[강남역]] 또는 [[지하철 3호선]], [[신분당선]] [[양재역]]에서 버스를 타고 오는 것이 가장 빠른 편이다. * 2호선 강남역 5번출구, 3호선 양재역 9번출구 중앙 버스정류장에서 [[서울 버스 440|440]], [[서울 버스 452|452]], [[서울 버스 741|741]]번 버스 등을 이용하면 된다. (버스정류장 명칭 : ‘헌인릉,강남서초구예비군훈련장’ 하차 (도보 5분)) *승용차로 가는 경우 분당-내곡간 고속화도로에서 내곡IC로 진출하면 된다. * 직행/광역버스 중에 [[성남 버스 9200|9200]], [[서울 버스 9408|9408번 버스]]가 헌인릉 앞에 정차한다. * 실질적으로 헌인릉 주차장으로 향하는 도로는 1곳 이외에는 자가용으로 진입이 불가능하다. 이유는 바로 옆의 [[국가정보원|이곳]] 때문. 주차장도 양쪽으로 나뉘는데 길 오른쪽이 헌인릉 관람객 주차장이다. * [[헌릉로|앞을 지나가는 넓은 대로]]에는 헌릉의 이름이 붙어 있다. == 기타 == * 헌릉은 [[신덕왕후|신덕왕후 강씨]]의 [[정릉(서울 성북)|정릉]], [[문정왕후|문정왕후 윤씨]]의 [[태릉(문정왕후)|태릉]], [[세조(조선)|세조]]의 [[광릉]], [[성종(조선)|성종]]의 [[선릉]][* 같인 묻힌 아들 [[중종(조선)|중종]]의 [[선정릉#s-5|정릉]]과 함께 [[선정릉]]이라고도 한다.]처럼 대표적으로 인근 지역의 지명으로 통용되는 왕릉 중 하나이다. 실제로 이 능침의 인근을 지나는 주간선도로의 이름이 [[헌릉로]]이며 [[용인서울고속도로]]의 [[헌릉IC]] 역시 이 헌릉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 멀지 않은 양재에는 [[정도전]] 산소 터가 있다. 태종과 정도전의 관계를 생각하면 사후에는 가까이 있던 셈. [[분류:태종(조선)]][[분류:순조]][[분류:조선왕릉]][[분류:서울특별시의 무덤]][[분류:서초구]][[분류:대한민국의 사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