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상위 문서, top1=허재)] [목차] [clearfix] == 선수 이전 == [[파일:허재 백일사진.jpg|width=500]] [[파일:허재 유치원 졸업 사진.jpg]] 강원도 춘천시에서 군인 출신의 아버지 허준(1929~2010) 사이에서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으나[* 2021년 9월 22일 방송된 [[호적메이트]]에서 형과 9살 차이 난다고 밝혔다.] 서울로 이사가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동북초등학교 3학년 때 특별 활동으로 농구를 시작해 악착같은 성격과 타고난 운동신경으로 금세 재미를 붙이며 대회에서 결승까지 끌어올리는 역할을 했지만 우승하지 못한 농구부가 불과 1년만에 해체되었다. 하지만 당시 대회에서 기질을 발견한 이철호 선생과 그의 적성을 알아 본 아버지의 권유를 받고 상명초등학교로 전학 간 이후부터 매일 공이 찢어질 때까지 연습을 했다. 특히 반포초등학교와의 전국초등학교농구대회 결승전에서 경기 종료 2초를 남기고 생애 처음으로 결승 버저비터를 터뜨려 역전승을 거두는 활약을 보였다. [[파일:용산고 농구부 선수단.jpg]] 이후 양문의 감독[* 허재가 용산중고 재학 당시 지도했던 은사였다. 이후 2000년부터 2001년까지 중앙대학교 농구부 감독을 지냈다. 2021년 [[TV는 사랑을 싣고]]의 허재 편에서 정말 오랜만에 모습을 내비쳤는데, 여전히 엄격하고 호통이 크셔서 허재가 깜짝 놀라기도 했다. 2022년 11월 12일 별세했다.]이 이끈 농구 명문 용산중학교에서 주전으로 기용[* 중학교 2학년 때부터였으며 1학년 때는 [[유재학]]과 [[전창진]]이 주전으로 뛰고 있었기 때문에 교체선수로 출전했다.]되어 1학년 때에는 전승, 2학년 때에는 판정분규로 인한 몰수게임으로 2관왕, 3학년 때에는 전승을 거두었다. 용산고등학교에서는 3년 동안 차세대 특급 가드로 주목받으며 1학년 때 유재학이 버틴 경복고등학교와의 종별선수권에서 팀을 첫 우승으로 이끌었고, 고등학교 마지막 해에는 제18회 쌍용기 대회 결승전에서 휘문고등학교를 상대로 뛰어난 득점력과 어시스트에 힘입어 예선 패배를 설욕한 끝에 3관왕을 달성함과 동시에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2090200209208020&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2-09-02&officeId=00020&pageNo=8&printNo=18743&publishType=00020|최우수상을 차지했다.]] 게다가 고등학교 2학년 때인 1982년에는 필리핀 마닐라에서 개최된 제7회 아시아 청소년 농구선수권대회에서 처음으로 국가대표팀에 선발되었다.[* 당시 대표팀에 발탁된 선수는 [[한기범]], [[김성욱(농구)|김성욱]], [[김유택]] 등이었다.] 용산고 시절부터 오빠 부대를 몰고 다녔을 만큼 전국구 스타였다. 송도고에 다녔던 ~~[[강동희]]~~가 회고하길 용산고가 경기를 할 때에는 허재의 소녀팬들이 아이돌 콘서트장 이상으로 운집했었다고 했다. [[파일:중앙대 시절의 허재와 정봉섭 전 감독.jpg]]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연세대학교]]와 [[고려대학교]] 등 각 대학에서 치열한 스카우트 경쟁이 있었으나, 정봉섭 감독[* 중앙대학교 농구부의 대부이자 역사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인물. 1980년대 초중반 중앙대가 전성기를 달린 데에는 그의 역할이 매우 컸다. 불 같은 성격 때문에 자주 징계를 받기도 했지만. 1992년 추계연맹전을 마친 뒤 강정수 코치에게 감독직을 넘겨주고 중앙대 운동부를 총괄하는 체육부장을 맡으면서 다소 이른 나이에 일선에서 물러났다.]이 허재가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아버지와 상당한 친분을 쌓았고, 아버지의 의사로 1984년 [[중앙대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중앙대학교에는 연습장이 없어 용산고등학교 체육관을 사용했었다.][* [[아는 형님]]에서 밝힌 바로는 대학 입학할 당시 어디 학과를 선택할지 고민했다가. 연극영화과로 진학하려 했으나 연극영화과에 문전박대를 당하고 체육교육과로 진학했다. 당시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는 안성캠퍼스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거절을 당했다고 한다.] 중앙대 농구부에서 허재 기수는 허재 하나였는데, 그 이유가 허재가 워낙 특급 에이스다 보니 고등학교 시절 동기들의 시기, 질투를 많이 받았었고 그래서 정봉섭 감독은 대학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날까봐 일부러 허재 학년에는 허재 하나만 받았다고 했다. 연세대나 고려대보다 상대적으로 느슨한 팀 분위기 속에서 온갖 테크닉을 익히고 만들어냈고 이렇게 쌓아올린 것들은 농구대잔치에서 터져 나오게 된다.[* 중앙대 농구부는 허재를 위해, 그가 입학할 무렵 저학년은 팀 연습 끝난 후 개인연습을 하고 고학년이 뒷정리를 하는 '''전통을 만들었고''', 이는 계속해서 중앙대 농구부의 전통이 되었다.~~즉, 허재의 2년 선배들은 4년 내내 뒷정리를 했다~~] 당시 1984-85 농구대잔치에 처음 참가한 허재는 1학년으로서 팀의 포인트가드를 맡아 경기당 39분 30초를 뛰면서 평균 24득점 8리바운드 6어시스트를 기록하는 여러모로 놀라운 활약을 했고, 신인상, 어시스트상, 인기상을 모조리 휩쓸었다. 1985-86 농구대잔치에서는 성인 선수들로 이루어진 실업팀들을 제치고 [[김유택]], [[한기범]]과 함께 결승전까지 이끌고 현대전자를 상대로 26득점 17리바운드 13어시스트를 기록하며 '''한국 선수 최초로 트리플 더블을 달성'''[* 이 허재의 트리플더블 기록은 완전히 잊혀져 있다가 2012년 들어 대한농구협회가 지난 시절의 기록들을 전산화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었다.]했지만, 이충희의 고득점과 현대 선수들의 폭력 농구, 편파 판정이 더해지며 중앙대는 결승에서 현대에게 패배하였다.[* 한편 이 결승은 현대 선수들의 폭력을 동반한 수비와 신경전, 그런 폭력을 묵인한 편파 판정이 상당한 물의를 빚은 경기이기도 하다. 당시 중앙대 측이 너무한 판정에 항의하며 경기 막판에 우두커니 서서 경기를 포기하기까지 했으니.] 1986-87 농구대잔치를 앞두고 신입생 ~~[[강동희]]~~가 입학하면서 김유택과 함께 이른바 허동택 트리오가 결성되었고, 슈팅가드 쪽으로 바꾸며 다시 한번 결승까지 이끌었지만, 또 다시 현대에게 패배하며 우승에는 실패했다. 이때에도 현대에게 유리한 편파 판정이 가해졌다. 이 당시엔 심판이 두 명이었는데 훗날 한기범이 말하길 현대는 심판 포함 7명이 뛰었기 때문에 중앙대가 절대 우승할 수 없었다고 했다. 대학 4학년 때는 [[동렬이도 없고, 종범이도 없고|김유택도 없고 한기범도 없는]] [[해태 타이거즈|팀 상황]]에서 센터 포지션을 맡으며 자신이 참가한 대학농구 대회에서 모두 우승했고,[* 허재가 국가대표로 차출되어 빠졌던 대회에서 중앙대는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었다.] 한 대회에서는 [[단국대학교|단국대]]를 상대로 전반에만 팀 전체 득점인 54점, 최종적으로 75점을 넣는 기록을 올렸다. 4학년 시즌에는 중앙대의 정봉섭 감독이 이전 시즌에 있었던 심판들의 편파판정에 불만을 품어 농구대잔치 출장을 거부했었고 이로 인해 '허재가 없는 농구대잔치는 관중이 줄었다'는 말이 나올 만큼 어마어마한 인기를 구가했다. [[파일:88olympic hur jae.jpg|width=640]] [[1988 서울 올림픽/개회식]]에서는 핸드볼의 손미나 선수와 함께 선수 대표로 선서를 하는 명예도 누렸다. 허재는 당시 훤칠한 외모에다 청소년들에게 가장 인기가 많은 선수였기 때문에 선정되었다. 원래는 허재 혼자 선정되었으나 남녀평등을 위해 손미나 선수도 함께 하게 되었다. [include(틀:문서 가져옴, this=문단, title=허재/생애, version=187)] == 실업 농구 시절 == 당시 실업팀들은 계약금으로 몇 억씩을 불러대며 [[허재]][* 1983년 아시아 청소년 농구대회 우승으로 병역특례까지 받아 군 문제도 깔끔했던 탓에 인기가 더 좋았다.]를 자신들의 팀으로 스카우트하려 했으나, 허재는 정봉섭 감독의 영향 하에 대학 선배인 김유택과 한기범이 있던 기아자동차에 1988년 입단했다. 당시 기아는 연세대와 중앙대의 특급 선수들을 스카우트해 [[유재학]], [[정덕화]], [[한기범]], [[김유택]]이란 막강한 선수들을 데리고도 우승을 못하고 있었는데, 여기에 허재가 합류하면서 화룡점정이 되었고 그 해 농구대잔치에서 기아는 첫 패권을 차지하며 그야말로 무적의 팀으로 군림했다. 허재 역시 그렇지 않아도 높던 인기가 폭발하며 당대 최고의 스타 중 한 명이 되었다.[* [[백두산(밴드)|밴드 백두산]] 항목에 있는 동영상을 보면 [[하희라]]와 함께 [[국어책 읽기]]로 MC를 보는 모습이 나오고 [[1988 서울 올림픽]]에서 남자 선수 대표로서 선수 선서를 하는 등의 것들이 그런 인기를 보여주는 예.] 1988-89 시즌부터 1992-93시즌까지 농구대잔치 5회 연속 우승을 하는 등 [[울산 현대모비스 피버스|기아자동차]]와 허재의 무적시대는 계속되었다.[* 유재학이 부상으로, 김유택이 간통 사건으로 빠졌던 1989-90 시즌에도 우승했다. 강동희는 입단 전이었다.] 허재의 화려한 플레이에 매료되어 이충희, 김현준의 슈팅 위주 농구가 빠르게 저물었을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였다. 유재학이 은퇴하고 강동희가 입단한 후에는 허재, 강동희, 김유택을 일컫는 허동택 트리오가 계속해서 기아 왕조를 구축해 나갔다. 1990년에는 태업과 항명 파동으로 당시 기아자동차의 감독이던 [[방열(농구)|방열]]을 팀에서 떠나게 만들었다는 얘기가 있으나, 이 당시 농구대잔치 때 허재는 부상으로 병원에 입원해 있었고, 김유택은 간통 사건으로 출전 정지 상태였고, 유재학은 무릎 부상으로 빠졌었고, 강동희는 입단 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재는 팀을 위해 병원에서 나와 몸이 굉장히 안 좋은 상태에서도 농구대잔치에 출전해 한기범, 정덕화 등과 함께 팀을 우승시켰다. 방열 감독은 그런 허재에게 감동을 받아 울먹이며 방송 인터뷰까지 했었다. 얘기가 나왔던 대회는 바로 뒤에 있었던 코리안리그인데 허재는 농구대잔치 후 다시 입원하였었고, 김유택은 여전히 출전정지 상태였고, 한기범은 경기 중 부상을 입었었다. 강정수, 강동희[* 기아에 입단 후 처음 출전했던 대회였다.]가 분전하였지만 주축 멤버들이 없다 보니 우승하기가 어려웠다. 따라서 선수들이 일부러 태업했다거나 허재가 태업을 주도했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고, 허재가 선배들도 많은데 자신이 항명을 이끌 위치도 아니었다라고 말을 한 일도 있다. 방열이 기아 감독을 그만 둔 것은 2년 뒤의 일이다. 그러나 항명 파동과는 별개로 방열 前 감독도 허재가 자신에게 반항했다는 뉘앙스로 인터뷰를 한 일이 있다. 1988-89 농구대잔치에서 유재학이 MVP를 받은 일[* 이때 MVP는 허재가 받았어야 했다. 하지만 허재는 가장 큰 형인 한기범이 받길 바랐었다. 그럼에도 방열 감독은 자신의 학교 후배인 유재학을 MVP로 추천하였고, 이 때문에 당시 협회로 왜 허재가 MVP를 받지 못했느냐며 농구팬들의 항의 전화가 빗발쳤었다.]로 비롯된 기아자동차 내의 연세대와 중앙대 파벌 싸움의 결과물이라 보는 사람도 있지만 이때의 일은 그냥 잠시 분위기만 안 좋아졌을 뿐이었고 후에 방열 감독이 그만 둔것은 기아 구단과의 문제였다고 허재가 인터뷰를 통해 얘기했었다. 하지만 당시 대학간 파벌싸움은 흔한 일이었다. 다른 팀이나 국가대표에서도 고려대와 연세대 출신끼리의 파벌싸움이 흔했다. 90년대 초반부터 약팀과 경기할 때는 새벽까지 술을 먹고 경기한 적도 많았는데 이 시절의 허재에 대해 변명하자면 그에겐 라이벌이 없었다. 대부분의 국내 선수보다 한두단계 위였고 우승도 밥먹듯이 하면서 목표가 사라져버렸기 때문에 그냥 놀아버렸다. 더구나 연고대 판인 농구계에서 연고대가 아닌 중앙대, 현대-삼성이 아닌 기아자동차 선수란 이유로 항상 협회와 언론은 허재 죽이기 기아 죽이기에 나섰었고 경기 때마다 상대팀에게 폭력성 파울을 당하다 보니 스트레스가 어마어마했었다. 최전성기였던 시절은 허재에게 슬슬 위기가 다가오는 순간이기도 했다. 기아자동차 팀 내에서 연세대 출신과 중앙대 출신 간에 갈등이 생겨나면서 기아는 제대로 된 선수 수급을 하지 못하게 되었는데, 기아자동차의 창단 멤버들이 은퇴해 나가자 전력 보충이 안 되어 허재를 비롯한 베스트 멤버 이외엔 믿을 만한 선수가 없어졌고, 결국 주전 멤버들에게 지나친 체력 부담이 가해졌다. 거기다 [[김유택]]이나 [[한기범]]은 부상 속에 1990년을 기점으로 크게 내리막길을 쳤고, 허재 역시 1991년 무렵 무릎 부상을 당하며 운동능력을 어느 정도 잃어버리게 되었다. 거기다 전체적으로 선수 관리가 부실하던 실업 농구 시대만 해도 한국 나이로 30은 은퇴의 갈림길로 인식되었고, 허재는 그때 기준으로 슬슬 노장 축에 들어가고 있었다. 결국 이런 문제점들은 [[1993-94 농구대잔치]] 에 불거져 나왔고, 허재와 기아자동차는 팀 동료이던 강정수가 감독을 맡은 모교 중앙대 농구부에게 8강 플레이오프에서 패하고 만다. 당시 대회 전 국제대회에서 기아 선수들이 혹사한 여파가 컸다고 하는데, 실제로 이들이 처음 대중에게 노장이라는 인식을 심어주며 체력적인 문제를 드러낸게 이 대회였다. [[파일:1994-1995 농구대잔치 MVP를 수상한 허재와 정은순.jpg]] 그러나 허재는 [[1994-95 농구대잔치]]에서 맹활약을 통해 당시 사기에 준하는 주전 라인을 꾸린 고려대를 꺾고 [[김현준(농구)|김현준]]이 최후의 불꽃을 태우던 삼성과 결승에서 상대하게 되었다. 2승 1패의 상황에서 삼성에게 뒤지고 있던 4차전 후반 말미 허재는 5분간 홀로 17득점을 퍼부우며 삼성을 격파, 우승을 차지하였고 MVP를 수상하면서 여전히 자신의 능력이 대단함을 입증했다. 허동택 트리오의 위용을 다시 회복한 대회였는데, NBA에 [[마이클 조던]]이 복귀한 [[시카고 불스]]가 다시 우승하기 시작한 것과 비교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파일:농구대잔치에서 고대와 맞붙고 있는 허재.png]] [[파일:attachment/500hdt_0.jpg|width=375]] [[1995-96 농구대잔치]]는 드디어 기아의 시대가 끝나는가라고 농구팬들이 생각했던 시즌이었다. [[신기성]], [[김병철(농구)|김병철]], [[양희승]], [[현주엽]], [[전희철]]이 이끄는 고려대가 올스타 라인업을 만들어 농구대잔치 정규시즌에서 전승을 거두었고, 상무는 [[이상민(농구)|이상민]]을 필두로 대거 입대한 스타 선수들로 역대 최고 수준의 멤버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당시 고려대와 상무의 기세가 워낙 강하다 보니 기아가 살아남으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상대적으로 적은 스포트라이트 속에 기아에는 기존의 허동택 트리오 외에 [[김영만(농구)|김영만]]이 새로이 합류했고, 멤버들의 부상과 체력저하에도 불구하고 리그 3위권을 유지하며 조용히 플레이오프를 기다리며 역시 강팀의 위용을 드러냈다. [[김유택]]의 주도로 팀 전원이 머리를 짧게 깎으며 정신을 다잡은 상황에서 허재는 플레이오프 8강 2차전에서 [[안양 KGC인삼공사|SBS]]를 상대로 50점을 몰아넣으며 자신의 위력을 재차 보여주기 시작했고, 4강에선 정규시즌 전승을 거둔 고려대를 격파,[* 오히려 전 시즌인 94-95 4강전에서 고려대는 기아와 매경기 일보일퇴의 접전을 벌였으나, 이 해에는 3차전은 너무 일방적으로 기아에 참교육을 당하며 무너져 정규시즌 1위의 실적이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결승에선 이상민이 이끄는 상무까지 격파하며 다시 한번 우승을 거두었다.[* 1차전은 그야말로 참교육의 끝판이었는데, 전반 초반 30점차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이 대회는 유독 플레이오프에 들어가자 허동택 트리오 모두 체력 문제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펄펄 날아다녔다. 허재는 4차전에서 우승 축포로 하프라인에서 버저비터까지 넣었다.] [[파일:attachment/jae.jpg]] 이런 상승세가 독이 되었을까, 1996년 허재는 [[음주운전]]으로 면허가 취소된 상태에서 또 다시 무면허 음주 운전 뺑소니 후 운전자 바꿔치기를 저질러 체포 후 포승줄에 묶이는 꼴을 겪었다. 직전에 [[1996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음주 파동을 일으켜서 6개월 자격정지를 당한 상태에서 벌어진 이 사건으로 인해 허재는 선수자격정지 및 국가대표자격 영구 박탈이라는 중징계를 당했고, KBL 출범 전 자신이 최후로 출전할 수 있었던 [[1996-97 농구대잔치]]에 출전하지 못했다.[* 여기에다 [[김영만(농구)|김영만]]의 부상 등, 악재가 겹치면서 결국 기아는 0승 7패로 창단 후, 처음으로 꼴찌를 기록했다.] 영구징계가 몇 년 후 풀리면서 허재는 1999년 아시아선수권 대회에서 국가대표로서의 마지막 경기를 치르기는 하지만. 하지만 선수자격 정지는 __아마농구 선수로서의 자격 정지__였기에 __프로농구 선수로서는 그냥 뛸 수 있었다.__ == KBL 출범 후 == [[파일:허재의 1억 2천만원 연봉 계약과 관련된 기사.png|width=740]] 프로 원년인 1997년, 허재는 연봉 1억 2천만원으로 기아 엔터프라이즈와 계약을 맺고 포인트 가드부터 스몰 포워드 역할까지 해내며 외국인 선수를 상대로도 개인기로 농락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하지만 외국인 선수 도입과 함께 [[최인선]] 감독은 팀에서 영향력이 큰 허재를 길들이고 싶어했다. 챔피언 결정전에서 맞붙게 된 나래의 경우 팀에서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했던 제이슨 윌리포드가 부상을 입어서 전력이 크게 약화된 상태였는데, 이 챔피언 결정전 최종전에서 최인선 감독은 허재를 전혀 기용하지 않고도 팀을 승리로 이끌어 냈고, 관중들의 허재 연호속에도 불구하고 코트 위에 서지 못했다. [* 훗날 밝혀지길 허재를 기용하지 않았단 이유로 최인선 감독은 기아 단장에게 크게 혼이 났다고 한다. 최인선 감독은 2022년 한 인터뷰에서 이때 당시 자신이 '감독'이 아닌 '선생' 노릇을 했다며 허재를 기용하지 않은 일에 대해 후회하는 발언을 했다.] 하지만 플레이오프에 들어와서 기아가 가장 큰 위기를 맞았던 것은 동양과의 4강전이었는데 허재를 선발로 기용하지 않았던 5차전에서 동양과 접전이 이루어지자 결국 허재를 2쿼터에 기용해 점수차를 벌려 리드하게 만들어 놓았다. 그러자 감독은 허재를 3쿼터에선 다시 벤치에 앉혀두었는데(...) 동양이 턱밑까지 추격해오자 4쿼터에 다시 허재를 기용, 승리하게 만들었다. 허재는 두 쿼터만 뛰고도 35득점을 올려 수훈갑이 되었고 기아는 결승 진출을 하게 되었다. 이 시즌에 허재는 스포츠서울이 주관하는 프로농구 대상에서 Best5 스몰 포워드 상을 수상하였다. [[파일:허재 떠나나 못떠나나.png|width=770]] [[파일:허재 기아 조건 복귀.png|width=750]] 97-98 시즌을 앞두고 5월 23일 서울의 한 호텔에서 기자회견을 자청해 FA로 풀어 다른 팀으로 트레이드하겠다고 요청[* 교체멤버로 뛴 것에 대해 자존심이 많이 상했었고 무엇보다 이런 모습으로 선수 생활을 끝낼 수가 없어 명예회복을 하고 싶어했다.]했지만 구단의 승인 없이는 사실상 어려운 입장이었고 최악의 경우 임의 탈퇴나 은퇴 중 하나를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기아의 경우 팀의 간판 선수인 허재를 추호도 내보낼 생각이 없었다. 기아자동차가 부도 위기를 겪으며 농구단을 1순위로 매각하려고 했었는데 허재가 없으면 비싼 값에 매각할 수 없단 이유에서였다. 허재는 이후에도 개인 훈련과 해외 경기 불참 등으로 여러가지 일이 겹쳐졌지만 모기업인 기아그룹이 7월 15일에 부도유예협약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엄청 괴로워했고 농구단이 매각될 위기에 처해지자 어려운 상황에 도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판단 아래 팀 복귀를 결정하면서 트레이드 사건은 64일만에 종결되었다.[* 참고로 정상화 노력에 합류해 주고 싶다는 뜻에서 기아그룹에 2천만원을 내기도 했다.] [[파일:허재 부산 기아시절.png]] [[파일:허재기아시절.jpg|width=315]] 그렇게 작년 시즌보다 좋은 성적으로 팀을 우승시키려고 했으나 상황은 좋지 않았다. [[1997-98 KBL 챔피언결정전|챔피언결정전]] 상대인 [[이상민(농구)|이]]-[[조성원|조]]-[[추승균|추]]트리오와 [[조니 맥도웰]]이 버틴 [[대전 현대 다이냇|현대]]는 사람들이 드디어 기아의 시대가 끝난다고 생각할 정도로 강했고, 기아는 외국인 선수 저스틴 피닉스의 태업으로 인해 인사이드에서 절대 열세에 있는 상황이었다. 거기다 허재는 LG와의 4강 경기 중 오른손 손등이 부러지는 부상까지 당했다. 기아의 승리를 예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허재 스스로가 이 이상 최악의 상황은 없었다고 말할 정도의 결승전에서, 허재는 자신이 왜 농구 대통령이란 소리까지 들었는지를 증명했다. 인사이드에서 절대 우세에 있는 현대가 허재 단 한 사람에게 휘둘리며 패배를 거듭했고,[* 물론 허재가 독보적이었다뿐이지 다른 선수들도 자기 역할을 다 해주었다. 예를 들어 [[김영만(농구)|김영만]]은 꾸준히 20점 넘게 득점하여 허재의 부담을 덜어주었고, 골밑도 클리프 리드와 [[김유택]]이 분전하여 열세이긴 해도 완전히 밀리지는 않는 상황을 만들어주었다.] 다리와 허리에 부상이 있던 상태에서 오른손에 깁스를 하고 눈덩이가 찢어져도[* [[조니 맥도웰|맥도웰]]의 팔에 부딪혀 부상당했다.] 코트에서 달리고 득점하는 허재를 보고 허재에 대해 비판하던 사람들조차 말을 잃을 정도였고, 기아의 팬들 중에는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오죽하면 허재가 오른손에 한 깁스가 정말 부상당한 게 아니라 [[페이크]]로 하고 있는 거 아니냐고 하는 사람까지 있었는데, 허재는 당시 챔피언 결정전이 끝나고 장기간 병원 치료를 받을 정도로 상태가 안 좋았고, 거기다 페이크고 아니고를 떠나서 깁스를 하면 당연히 맨손보다 공 다루기가 크게 불편해진다. 실제로 뼈가 골절 되었고, 당시 방송에서도 엑스레이 사진을 내보냈었다. ][* 이 당시 IMF사태가 터져 기아자동차가 오늘 망하나 내일 망하나 하던 절망적인 상황이었는데, 농구단이 이렇게 대박을 터뜨려줘서 기아자동차 임직원들에게 큰 힘이 되었다고 한다.그리고 당연히 경기장은 연속매진. 언론 보도의 비중도 농구가 야구보다 많았던 몇 안되는 사례다.] 결국 7차전에 이르면서 허재가 자신의 모든 걸 짜내는 데도 한계가 왔고, 팀을 우승시키는 데는 실패했다. 사실 이 챔프전의 경우 협회가 기아의 연승을 막기 위해 현대에게 유리한 쪽으로 편파 판정을 하도록 만들었었다. 1,2차전에서 기아가 승리를 거두자 똥줄이 탄 협회가 3차전부터 심판들에게 편파 판정을 하도록 지시했고 이에 대해 당시 뉴스에도 보도될 정도였다. 기아의 최인선 감독이 경기 후 인터뷰를 통해 이것에 대해 확인 사살시켜주었다. 만약 편파 판정이 없었다면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지 모른다. [[파일:허재 KBL 최초로 준우승팀에서 MVP로 뽑혔다.jpg|width=510]] 하지만 [[KBL 챔피언결정전|챔피언결정전]] [[MVP]]는 우승팀의 선수가 아니라 허재였는데, KBL에서 챔피언 결정전 MVP가 준우승팀 선수 중 나온 일은 이 때가 유일하다.[* 여담으로 [[NBA]]에서도 파이널 MVP가 준우승 팀에 나온 경우는 1969년 [[제리 웨스트]] 이외에는 단 한명도 없다. 더욱이 NBA 역사는 195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기에 KBL보다 훨씬 더 길다. 2014-15년에서 [[르브론 제임스]]가 거론되기는 했었으나 역시 수상을 하지는 못했다. 그만큼 준우승팀에서 결승전 MVP가 나오는건 드문 경우다. 여자농구에서는 WKBL 출범 이전 농구대잔치 시절 정은순이 결승전 팀 패배에도 불구하고 MVP를 받은 적이 있다. 종목은 다르지만 K리그에서 준우승팀 출신의 MVP는 [[안정환]]이 있긴한데 이 경우는 우승팀 수원의 핵심 공격수인 샤샤가 결승전에서 핸드볼로 골을 넣었기 때문이다.][* 2021년 1월 5일에 방송된 [[MBC 에브리원]] [[비디오 스타]]에서 KBL 최초로 준우승한 팀에서 MVP를 받았음에도 기쁘지 않은 나머지 MVP 트로피와 꽃다발을 경기장에 둔 채 집으로 돌아갔고, 다음날이 돼서야 트로피를 간신히 찾았다는 말로 웃음을 자아냈다.] 이 챔피언 결정전에서 허재가 올린 스탯은 다음과 같다. || 경기 || 득점 || 리바운드 || 어시스트 || 스틸 || || 1차전 || 29 || 5 || 6 || 5 || || 2차전 || 30 || 2 || 11 || 5 || || 3차전 || 21 || 3 || 5 || 0 || || 4차전 || 27 || 3 || 1 || 5 || || 5차전 || 17 || 8 || 3 || 2 || || 6차전 || 22 || 3 || 6 || 4 || || 7차전 || 15 || 6 || 13 || 4 || 허재는 한국 나이 34살, 전성기가 지나 은퇴를 해도 이상할 것이 없던 나이에 이런 기록을 올렸다. 어떤 신문 기사에서는 이런 허재의 모습을 보고선 '[[빈사의 사자상|마치 상처입은 사자가, 다른 맹수에 포위당한 채 공격을 당하면서도 결연하게 싸워나가는 모습]]을 연상케 했다' 라고 썼을 정도. [[파일:정인교와 트레이드 공동기자회견 후 악수하고 있는 허재.jpg]] [[파일:원주 삼보 시절의 허재.jpg|width=330]] 시즌 후 허재는 [[정인교(농구)|정인교]]와 트레이드되어 [[원주 동부 프로미|나래 블루버드]]로 이적했고 팀을 플레이오프로 이끌면서 활약을 펼쳤다. 누가 막아도 상대가 어느 팀이라도 허재 단 한 명의 힘으로 팀을 승리로 이끌기도 했지만, 이미 허재는 시즌 내내 그런 활약을 펼칠 수 없는 나이가 되어 있었다. 패배가 쌓여가면서도 허재는 자신의 힘으로 이룬 우승을 맛보겠다며 코트 위에서 버텨 나갔고, 코트 위 최고의 노장이 되어가면서도 자기 관리 속에 활약을 하고 자신이 부족해진 걸 인정하며 팀의 요구에 허재는 자신을 맞추어 갔다.[* 프로 출범 전에는 선수들 몸 관리가 되지 않아 30살이면 노장 소리를 듣고 30대 초반이면 은퇴를 하던 시기였다. 그리고 허재는 그 은퇴했어야 할 33살의 나이에 프로 출범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파일:external/www.kbl.or.kr/150617_001k.jpg]] [[파일:허재_우승컵을 들다.jpg]] [[파일:2002-03 KBL 챔피언결정전에서 우승한 뒤 그물을 자르는 허재.jpg|width=300]] 2002-03 시즌에는 [[김주성(농구)|김주성]]의 입단과 [[데이비드 잭슨]]이 팀에 합류했고, 허재는 탁월한 게임 리딩과 더불어 공격 기술이 부족한 김주성에게 포인트 가드로서 최고의 패스를 공급하고 데이비드 잭슨을 어르고 달래며 팀을 승리로 이끌어갔다. 그리고 전 시즌 우승팀 [[고양 오리온 오리온스|대구 동양 오리온스]]를 상대로 5차전[* 당시 오리온스 입장에선 계시기 작동 오류로(일명 잃어버린 15초) 승리를 도둑맞고 천추의 한이 남은 경기였다.]에서 [[마르커스 힉스]]와 루즈볼을 다투다가 갈비뼈 부상[* 갈비뼈를 지탱하는 연골이 부러졌다.]으로 제대로 숨을 쉬지 못한 상태에서 가슴에 붕대를 감고 벤치로 돌아간 모습이 중계 카메라에 포착되자 그 충격으로 팬들의 눈시울을 붉히게 만들었지만, 마지막 6차전에서 갈비뼈 부상때문에 벤치에만 있었다가 경기종료 1.3초를 남기고 팬들의 "허재" 연호 속에 코트에 서며 마침내 우승을 맞이했다.[* 당시 6차전 경기에서 1쿼터를 24:3으로 뒤지며 말도 안 되게 몰리자 갈비뼈 골절에 등에 구멍을 뚫고 진통제를 맞은 상태로 벤치에 있던 허재가 나가겠다며 트레이닝복 상의를 벗자 [[전창진]] 감독이 조금만 참으라고 말렸다고 했다.] 그 덕분에 시상식에서 트로피, 상금 2백만원, 백만원 상당의 상품권을 부상으로 받았고, [[https://sports.news.naver.com/news.nhn?oid=032&aid=0000014397|대상을 수상하였다.]] 우승 직후 구단에서 허재에게 1년 더 선수 생활을 해 달라는 요청을 해왔고, 1년 계약을 연장해 선수 생활을 이어가게 되었다. == 은퇴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