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바이마르 공화국 총리)]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undesarchiv_Bild_146-1969-008A-07%2C_Hans_Luther.jpg|width=300&height=400]]|| ||<:> '''풀네임''' ||'''Hans Luther'''[br]한스 루터 || ||<:> '''출신 정당''' ||[[독일인민당]][* 총리직 수행 당시에는 무소속이었고, 퇴임 이후 독일인민당 당적을 가졌다.] || ||<:> '''생몰년''' ||[[1879년]] [[3월 10일]] ~ [[1962년]] [[5월 11일]] || ||<:> '''재임기간''' ||[[1925년]] [[1월 15일]] ~ [[1926년]] [[5월 12일]] || [목차] [clearfix] == 개요 ==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독일의 총리를 지낸 [[정치인]]. 또한 [[초인플레이션]]으로 독일 경제가 대혼란을 겪을 시기, 재무부 장관과 제국은행(Reichsbank) 요직을 지낸 경제인이기도 하다. == 생애 == 1879년 [[베를린]]의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학업을 마친 이후 정계로 진출해 1907년에는 [[마그데부르크]] 시의회 의원이 된 데 이어서 1918년에는 [[에센]]의 시장으로 선출된다. 에센 지방 역시 공업의 중심지였던만큼 [[독일 11월 혁명]]의 여파가 들끓었지만 놀랍게도 루터는 이들 노동자들을 설득해서 치안을 유지하는데 성공한다(!) 이후 20년대 초반까지 에센 시장 직을 유지하다가 1923년 [[구스타프 슈트레제만]] 내각의 식량부 장관으로 발탁된다.[* 이 시기 바이마르 공화국은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으로 전국이 휘청거리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식량부 장관은 상당한 요직이었다. 그만큼 루터의 능력이 독일 중앙정계에서 인정받고 있었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구스타프 슈트레제만 내각은 100여일만에 붕괴됐지만 슈트레제만 내각의 뒤를 이어 성립한 [[빌헬름 마르크스]] 내각에서도 한스 루터는 재무부 장관으로 기용된다. 재무부 장관 시기 루터는 [[얄마르 샤흐트]]를 제국은행 총재로 임명시킨 이후, 화폐개혁을 단행해서 인플레이션을 진정시키는 데 성공한다. === 바이마르 공화국의 총리로서 === 1924년의 총선으로 [[가톨릭 중앙당]]이 이끄는 [[빌헬름 마르크스]] 내각이 붕괴하자 대통령 [[프리드리히 에베르트]]는 루터에게 새로운 내각을 구성할 것을 제안했고, 루터는 [[바이에른 인민당]], [[가톨릭 중앙당]], [[독일인민당]] 등이 참가하는 중도보수 계열의 연정 정권을 설립한다. 한편 이듬해인 1925년 2월 대통령 프리드리히 에베르트가 사망하자 루터는 임시적으로 대통령직까지도 겸임하게 된다. ~~오오 히틀러보다 10년 빠른 [[총통]]직 획득 오오~~ 물론 루터는 ~~히틀러와 달리~~ 민주주의의 원칙을 준수하는 정치인이었으므로 얼마 지나지 않아 대법원장인 [[발터 지몬스]]에게 대통령 권한대행 자리를 넘겨주었다.[* 루터는 지몬스가 계속 이 자리를 지켜주길 원해서 대통령 선거 출마를 권했지만 지몬스가 거부했고 그 자리는 [[타넨베르크 전투]]의 영웅 [[파울 폰 힌덴부르크]]가 차지하게 된다.] 비교적 짧은 1년 반 정도의 총리직을 지내면서 루터는 [[로카르노 조약]][* 로카르노 조약을 발판으로 바이마르 공화국은 [[국제연맹]]에 가입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에 서명했고, [[소련]]과 외교관계를 맺기 위한 교섭을 진행하는 한편, [[노동자]] 계층의 권익을 증진하기 위한 복지 정책을 수립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의 총리직 수명을 단축시킨 것은 바로 그의 업적 중 하나인 소련과의 교섭. 중도보수로 구성된 그의 연립정권 구성 정당들은 소련과의 교섭에 반발하면서 연정을 탈퇴했고, 이어서 [[국기]]와 관련된 격렬한 논쟁[* 바이마르 공화국의 정식 국기는 흑-적-금이었지만, 루터는 [[독일 제국]] 시기의 흑-백-적도 국기로 인정할 것을 주장했다.]이 그에게서 총리직을 앗아갔다. [[1925년]] [[1월 2일]]부로 [[독일-폴란드 무역 전쟁]]을 일으켰다. [[폴란드 제2공화국]]한테서 [[단치히 자유시|단치히]], [[실레시아|상부 슐레지엔]], [[폴란드 회랑]]을 내놓으라며 [[베르사유 조약]]에 명기된 패전국의 독립국 무관세 수입 조항을 깬 것이다. === 여생 === 총리직 사임이후 [[얄마르 샤흐트]]의 뒤를 이어 제국은행 총재직을 지내면서 [[하인리히 브뤼닝]] 내각의 긴축재정 정책을 적극지지하기도 했던 루터는 [[1933년]] [[히틀러]]의 집권 이후 나치당의 요구에 의해 미국에 [[외교관]]으로 파견된다. 이 시기가 한스 루터 본인한테는 최악의 흑역사인데 히틀러를 '평화의 사도'로 포장(...)하는 강의를 미국에서 하고 다녔던 것.[* 당연히 학생들이 이런 강의에 엄청나게 반발해서 일부대학교에서는 폐강을 만들려는 학생 사이의 집단행동도 있었을 정도.] 이후 1942년 은퇴한 루터는 1962년 [[뒤셀도르프]]에서 사망한다. [[분류:독일 제국의 정치인]][[분류:바이마르 공화국 총리]][[분류:제3제국/인물]][[분류:1879년 출생]][[분류:1962년 사망]][[분류:제네바 대학교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