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聖根 [[1833년]]([[순조]] 33) [[8월 3일]] ~ [[1905년]]([[고종(조선)|고종]] 42) [[12월 28일]] (향년 72세) [목차] == 소개 == [[조선]] 후기의 [[문신]], [[장군]]. 본관은 [[청주 한씨|청주]](淸州)[* 양이공파 29세 근(根) 항렬.], 자는 원집(元執). == 생애 == 1833년 8월 3일 [[충청도]] [[괴산군]] 동중면 쌍곡리(현 [[충청북도]] [[괴산군]] 칠성면 쌍곡리)에서 아버지 한용철(韓用喆, ? ~ 1840. 12. 3)과 어머니 [[동래 정씨]][* 정호순(鄭好淳)의 딸이다.] 사이에서 3형제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http://www.cctimes.kr/news/articleView.html?idxno=419379|#]] 증조부는 한상겸(韓相謙), 조부는 한영표(韓永彪)이다. 한성근이 출세한 후 3대가 각각 [[승정원]] [[좌승지]](정3품), 가선대부(嘉善大夫:종2품 문·무관의 품계) [[호조(조선)|호조]] [[참판]](종2품), [[호조판서]](정2품)에 추증되었다. 그는 본래 문관으로, 1863년([[철종(조선)|철종]] 14) 정시 문과에 병과 6위로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MN_6JOc_1863_013357|급제하고]] 이듬해인 1864년([[고종(조선)|고종]] 1) 7월 권지(權知:견습관원) [[성균관]] 학유(學諭:종9품)에 제수되어 관직 생활을 [[https://db.itkc.or.kr/dir/item?itemId=ST#/dir/node?dataId=ITKC_ST_Z0_A01_07A_07A_00100|시작했다]]. 같은 달 봉상시 봉사(奉常寺奉事:종8품)에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01_07A_09A_00230_2004_005_XML|제수되었다가]] 1866년(고종 3) 2월 [[성균관]] 학록(學錄:정9품)에 제수되었다.[[https://db.itkc.or.kr/dir/item?itemId=ST#/dir/node?dataId=ITKC_ST_Z0_A03_02A_28A_00170|#]] 그러다가 그해 9월 13일, 그는 봉상시 봉사로 있었는데, 별안간 경기 순무영(巡撫營)에 의해 겸임 초관(哨官:종9품)으로 차출되어 집사(執事) 지홍관(池弘寬)과 별파진(別破陣:총포를 다루는 특수병) 50명과 함께 출정하게 되었다.[[https://db.itkc.or.kr/dir/item?itemId=ST#/dir/node?dataId=ITKC_ST_Z0_A03_09A_13A_00260|#]] 그 출정하게 된 곳이 바로 당시 [[김포시|통진도호부]] 보구곶면 산성리(현 [[김포시]] [[월곶면]] 성동리)에 있던 문수산성(文殊山城)이다. 그러다가 5일 후인 9월 18일 오후 2시경, [[프랑스]]군 소속 선박 4척이 문수산성의 남문에 도달하자, 발포하여 먼저 정박해 있던 2척의 배에 타고 있던 27명의 프랑스군을 섬멸했다.[* [[https://db.itkc.or.kr/dir/item?itemId=ST#/dir/node?dataId=ITKC_ST_Z0_A03_09A_19A_00150|승정원일기 고종 3년 병인(1866) 9월 19일(을해) 맑음]]에서는 5, 60명으로 추정했다.] 그러자 나머지 2척에 타고 있던 100여 명의 프랑스 병사가 육지로 올라서서 발포하기 시작했고, 이에 5명의 사상자[* 당시에 [[경기도]] [[광주시|광주유수부]] 별파진의 최장근(崔長根)·김달성(金達城)·오준성(吳俊成)과 문수진(文殊鎭)의 백성 오돌중단(吳乭仲段)이 사망자로 파악되었다.[[https://db.itkc.or.kr/dir/item?itemId=ST#/dir/node?dataId=ITKC_ST_Z0_A03_09A_21A_00340|#]]]를 내고 [[중과부적]]으로 달아났다. 프랑스군은 이때 문수산성의 남문에 불을 지르고 몸을 돌려 퇴각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https://db.itkc.or.kr/dir/item?itemId=ST#/dir/node?dataId=ITKC_ST_Z0_A03_09A_19A_00160|승전보를 울리도록 하고는]] 한성근의 공을 치하해 같은 달 말에 [[https://db.itkc.or.kr/dir/item?itemId=ST#/dir/node?dataId=ITKC_ST_Z0_A03_09A_28A_00060|병조 좌랑]](정6품)에 제수되었다. 이후 첨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며, 그 뒤 [[별기군]]의 정령관에 임명돼 신식 [[군대]]를 훈련했다. 그러던 도중 [[흥선대원군]]의 서자인 [[이재선]] 옹립 사건에 휘말렸으나 혐의 없음이 밝혀졌다. 1896년 중추원 의관을 지냈고 1899년 궁내부 특진관을 지내다가 1905년 12월 28일 [[노환]]으로 사망해 [[충청북도]] [[괴산군]]에 묻혔다. == 여담 == [[병인양요]]에서 활약한 [[양헌수]] 장군이나 [[신미양요]]에서 대패했으나 끈질기게 전투를 수행해 조선군의 기백을 보여준 [[어재연]] 장군에게 밀려 [[인지도]]가 낮다. 이유는 나라에서 안 밀어준 탓도 있기도 하고 두 장군은 [[스토리]]도 많은데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을 무찔러 정족산 사고에 보관 중이던 [[조선왕조실록]]과 도서를 지킨 양헌수 장군과 미군에게 대패했으나 자신의 동생과 함께 참전해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보여준 어재연 장군보다 밀린 것이다. 나라에서는 두 장군을 기려 승전비를 세워주거나 추모비를 세워 후대에게 내용이 자세하게 전달됐고 두 장군의 격전지인 정족산성과 [[광성보]]는 잘 보존되거나 [[사진]] 기록이 남아 처절했던 전투의 현장을 잘 보여줘 두 장군은 인지도가 있다. 한성근 장군의 격전지인 문수산성은 접근하기도 어렵고 성도 많이 훼손돼 흔적을 찾아볼 수 없으며 성의 일부가 [[군부대]]에 있어 [[민간인]]이 접근하기 어렵다. 지금도 대우가 나쁜데 양헌수 장군의 경우 장군이 쓴 일기는 [[사적]]이 되거나 양헌수 장군의 물건이 [[전쟁]] 기념관에 전시되었다. 어재연 장군의 경우 [[국방부]]에서 호국의 인물로 선정되고 나라에서 추모비를 세워주거나 장군기를 반환받아 [[박물관]] 중앙에 전시하고 격전지였던 광성보에는 어재연 장군의 [[동상]]까지 세워졌다. [[교과서]]에서도 두 장군의 이야기만을 서술하고 두 분의 [[초상화]]까지 그려 추모하지만 한성근 장군의 경우 그런 것도 없이 잊혀지고 있다. (비상출판사 2009년 개정판 한국사 교과서 5단원에는 수록되어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한성근 장군의 [[무덤]]이 있는 괴산군이 한성근 장군의 행적을 추적 기록물이나 유물을 홍보해주고 있고 한성근 장군의 [[고향]]인 김포시는 격전지인 문수산성을 [[복원]]하기 시작해 개선의 여지는 있다. [[공무원 시험]]에서는 주로 [[양헌수]]와 섞어서 페이크로 나오곤 한다. '양헌수-정족산성, 한성근-문수산성'인데 이를 바꿔서 출제하는 식. 수험생들은 이에 대처하기 위해 '''[[문성근]]'''으로 외우기도 한다. [[분류:조선의 문관]][[분류:청주 한씨]][[분류:괴산군 출신 인물]][[분류:1833년 출생]][[분류:1905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