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고려의 왕자]][[분류:개성 왕씨]][[분류:고려의 후작]][[분류:몰년 미상]] [include(틀:고려의 왕자/선종 ~ 공양왕)]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FF9D00, #FFB200 20%, #FFB200 80%, #FF9D00)" '''고려 선종의 왕자[br]고려의 제왕[br]{{{+1 한산후 왕윤 | 漢山侯 王昀}}}'''}}} || || '''생몰연도''' ||[[미상]] || || '''능묘''' ||미상 || || '''본관''' ||[[개성 왕씨]] || || '''휘''' ||윤(昀) || || '''부모''' ||부왕 [[선종(고려)|선종]] 생모 [[원신궁주]] || || '''형제자매''' ||[[선종(고려)#가족관계|4남 3녀 중 차남]] || || '''지위''' ||[[제왕#諸王]](諸王) || || '''작호''' ||'''한산후(漢山侯)'''[* 봉지 한산(漢山)은 [[서울/강남|서울의 강남 지역]]을 가리키는 지명이다. [[고려사]]에서 [[신라]]의 경계인 한산 북쪽, [[한강]]상에 장한성(長漢城)이 있다는 문장이 나온다. (長漢城, 在新羅界, 漢山北, 漢江上)]|| [목차] [clearfix] == 개요 == [[고려]]의 [[왕자]]. 제13대 국왕 [[선종(고려)|선종]]과 후궁 [[원신궁주]]의 아들이다. == 생애 == [[선종(고려)|선종]]과 후궁 [[원신궁주|원신궁주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외조부는 [[이자연(고려)|이자연]]의 장남 [[이정(고려)|이정]]이다. 부친 선종이 죽고 이복형 [[헌종(고려)|헌종]]이 11세의 나이로 즉위하자 [[문종(고려)|문종]]의 아들 [[진한공|진한후 왕유]], [[정간왕]]의 아들 [[낙랑공|낙랑백 왕영]]과 더불어 수사도(守司徒)에 임명된다. [[문벌귀족]]으로 권신이었던 외숙부 [[이자의]]는 병약한 헌종이 죽은 다음에 자기 조카인 한산후가 왕위를 잇기를 희망했다. 고려는 대체로 부자 아니면 형제간에 왕위를 상속했기 때문에 한산후가 왕위를 잇는 것이 일반적이었을 것이다.[* [[성종(고려)|성종]] - [[목종(고려)|목종]]간의 계승처럼 삼촌에서 조카로 계승한 경우도 있긴 하다.] 그러나 [[헌종(고려)|헌종]]이 어린 나이에 즉위했기 때문에 [[선종(고려)|선종]]의 동생인 종친 [[계림공]]의 세력을 무시할 수 없었다. [[이자의]]는 외부에서 왕위를 노리는 자들을 견제하고, 한산후에게 왕위가 넘어갈 수 있도록 온 힘을 다해 받들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하지만 [[이자의]]가 우려하던대로 계림공은 헌종 원년인 1095년 7월 먼저 선수를 쳐 이자의 파벌을 반란 모의 혐의로 숙청해 버리고는 이듬해 병사한 [[헌종(고려)|조카]]의 뒤를 이어 [[숙종(고려)|숙종]]으로 즉위해 버린다. 왕위 계승에서 밀려난 한산후는 숙종 즉위년인 1095년 10월 모친인 [[원신궁주]]와 동생과 함께 경원군(慶源郡)[* 지금의 [[인천광역시]]]으로 유배 보내졌고, 그 뒤의 일은 기록에 남아있지 않아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