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진서)] [목차] == 개요 == 韓伯 생몰연도 불명 [[동진]]의 인물. 자는 강백(康伯). 예주 영천군(潁川郡) 장사현(長社縣) 출신. 아들로는 한회(韓璯)가 있으며 관직은 형양태수에 이르렀다고 한다. == 생애 == 한백의 어머니 은씨(殷氏)는 고명하고 덕망이 높았다. 집안이 무척 가난하여, 한백이 10살도 안 되었을 무렵 지독한 한혹기가 찾아오자, 그제서야 은씨는 아들에게 저고리를 입혀주기 위해 한백에게 다리미를 잡게 하고는 말하길, > "일단 저고리부터 입고 있어라. 바지는 나중에 만들어주겠다." 라 하였다. 한백이 필요없다 대답하니, 은씨가 그 연유를 물었다. 이에 한백은 > "다리미 속에 불을 넣으면 다리미 손잡이도 뜨거워지듯이, 저고리를 입으면 마땅히 아랫도리도 따뜻하게 해야 하는 법입니다." 라 답했다. 어린 아들의 대답을 들은 은씨는 이를 기이하게 여겼다. 장성한 한백은 문학과 예술에 재능을 보이면서 [[왕탄지]]와 외삼촌 은호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고, 유량의 아들 유화와 함께 당대 젊은 명사로서 이름을 날렸다. 이후 수재로 천거되어 좌저작랑(佐著作郎)에 임명받았으나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당시 어린 [[목제(동진)|목황제 사마담]]을 보정하던 [[간문제(동진)|회계왕 사마욱]]은 명사를 좋아해 빈객을 널리 모집했는데, 이때 한백은 사마욱의 빈객으로 들어갔다가 사도좌서속(司徒左西屬)으로 임관했다. 그 후로도 관직 생활을 이어나가, 무군연(撫軍掾), 중서랑, 산기상시, 예장태수, 시중, 단양윤, 이부상서, 영군장군 등 다양한 직책을 역임했다. 여러 관직을 전전하던 중 병에 걸려 드러누웠다. 점쟁이가 지금 지내고 있는 그 관직은 한백과 맞지 않다 경고하니, 조정에서 그를 태상에 임명하려 했다. 그러나 한백은 사양했고, 얼마 안 지나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사후 태상으로 추증되었다. == 기타 == * 왕탄지가 〈공겸론(公謙論)〉을 지어 [[원굉(동진)|원굉]]과 토론을 벌이자, 평소 학문에 관심이 많던 한백은 그들의 주장에서 옳고 그른 것을 솎아내고, 두 사람의 주장을 절충시킨 〈변겸(辯謙)〉이라는 글을 지어 논쟁을 끝냈다. [[분류:동진 및 오호십육국시대/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