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서양음악사)] ||||
'''{{{#fff {{{+1 하인리히 쉬츠}}}[br]Heinrich Schütz}}}''' ||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Schuetz,_Heinrich.jpg|width=100%]]}}} || ||||<#ddd,#222> {{{-1 크리스토프 스페트너의 그림 (1660)}}} || || '''본명''' ||하인리히 새저테어리어스 쉬츠 {{{-1 Heinrich Sagittarius Schütz}}}|| ||<|2> '''출생''' ||1585년 10월 18일[*구력 10월 8일]|| ||[[작센 선제후국]] 크로이츠베르크|| ||<|2> '''사망''' ||1672년 11월 6일 (향년 87세)|| ||[[작센 선제후국]] [[드레스덴]]|| || '''직업''' ||작곡가|| || '''사조''' ||[[바로크 음악]]|| [목차] [clearfix] == 개요 == >'''세상에서 가장 영적인 음악가.''' >---- >- 알프레드 아인슈타인(1928년) [[바로크]] 초기에 루터교의 음악을 쓴 작곡가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인물이다. 그의 업적은 독일양식과 해외에서 익힌 [[이탈리아]] 양식을 자연스럽게 혼합하기도 했지만, 음악에 가사를 붙이는 능력이 대단하기도 했다. 요한 헤르만 샤인, 사무엘 샤이트와 함께 초기 독일 바로크 3S로 손꼽히는 대음악가이다. == 생애 == === 초기 === [[작센 선제후국]]에서 여관을 운영하던 아버지 밑에서 유복하게 자랐다. 하지만 가족은 쉬츠가 음악을 하는 것에 반대했지만, 이미 재능이 뛰어나 [[헤센]]-[[카셀]]의 [[방백]]이 그를 궁정으로 불러들였으며, 나중에 [[베네치아]]에서 [[조반니 가브리엘리]] 문하에서 공부하도록 경비를 지원하기도 했다. 쉬츠는 베네치아에서 4년간 머무르면서 마드리갈 곡집을 출판하고[* 최후의 가장 위대한 마드리갈로 손꼽힌다.], 가브리엘리가 1612년 생을 마감하자 독일로 돌아왔다. 1617년 작센 선제후 [[요한 게오르크 1세]]가 [[드레스덴]] 궁정의 악장으로 쉬츠를 초대했고, 궁정 관리의 딸과 결혼했다. 죽을때까지 쉬츠는 60년이나 더 이 자리를 지내고, 400 플로린이라는 후한 연봉도 받았다. === 생애 중기 === 1625년 결혼한 지 5년 만에 아내가 죽으면서[* 아내를 많이 사랑했었는지 쉬츠는 다시는 결혼하지 않았다. 슬하에 두 명의 딸이 있었지만 첫째 딸은 16세에 둘째는 31세에 사망했다.] 쉬츠는 한번 더 [[베네치아]]로 여행을 갔고, 거기서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를 만나 그의 극음악을 듣고 감동 받아 직접 음악을 써보기 했다. 작센 선제후의 딸이 결혼할때 쓸 오페라 《다프네Dafne》(1627)[* 선제후 딸의 결혼 축하를 위해 쓴 곡이다.]이 그 결과인데, 이 작품은 소실되었고, 쉬츠의 무대 음악은 남아 있는 게 별로 없다.[* 종교음악은 전례에 맞게 땜빵 하면서 계속 써야 하는데, 이런 축하성 오페라들은 일회용이기 때문에 많이 소실되었다는 게 정석이다.][* 또한 베네치아와 달리 작센에서 오페라의 대우는 좋지 못했는데, 극장이 별로 없었고 시간 상으로는 [[30년 전쟁]]으로 엄청나게 재정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덴마크]]의 왕태자[* [[노르웨이]] [[프린스|공]] 크리스티안.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4세]]의 맏아들이자 [[프레데리크 3세]]의 형인데 크리스티안 4세보다 1년 먼저 사망했다.]가 결혼식 작품을 의뢰하자 1633년부터 1644년까지 쉬츠는 [[코펜하겐]]의 악장으로 있었다. 1645년부터 다시 작센 선제후가 일을 맡겼다. 60세였던 쉬츠는 [[황희(조선)|퇴직을 요구했으나 거부당했지만 대신 1년에 반만 일하라고 궁정은 허락했다. 그후 쉬츠는 온갖 핑계를 대며 세번이나 은퇴를 요청했다.]] 후에 1656년에 선제후가 죽고 나서야 쉬츠는 비로소 자유로워졌다. 그 후 말년에 쉬츠는 여러 곡의 수난곡과 오라토리오 등 굵직굵직한 작품들을 쏟아냈고, 1672년 87세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 음악세계 == 쉬츠는 종교음악에 복합창의 콘체르타토의 양식을 도입했으며, 후기 마드리갈의 열정적 표헌기법을 도입하였다. 두 번째 [[베네치아]] 여행에서 쉬츠는 모노디 기법과 [[대위법]] 두가지 스킬을 배우고 왔으며, 이것으로 리누치니 대본의 다프네를 썼으나 남아있지 않다. 또한 [[레치타티보]]를 독일에서 처음 사용한 작곡가라고 한다. 그는 두 권의 '''《작은 종교 콘체르토(Kleine geistliche Konzerte)》'''에서 모노디 양식을 독일 음악에 적응시켰다.[* 사실 이 곡의 편성이 작은 이유는 [[30년 전쟁]]당시의 상황 때문이었다.] 이 곡들속에서는 이야기풍의 양식을 사용한 독창곡이 조금 보이는데 선율적인 서법이 사랑받고 있다. 또한 이중창 같은 경우에는 대위법의 새로운 양식과 반음계적 수법이 결합되고 있다. 또한 세 권으로 이루어진 '''《신성 교향곡(Symphoniae sacrae)》'''에는 확대된 대편성이 사용되고 여기에는 기악 파트가 보강되어있다. 이 작품집의 형식은 전통적이지만 양식은 전혀 다른 새로운 것이었다. 새로운 [[대위법]] 양식과, 기악의 서법, 반복진행등은 쉬츠의 음악이 완전히 시대가 넘어간 작품이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youtube(PW35kMszUy0, width=460)]|| || ▲ 신성 교향곡 1집에 수록된 '''<레바논에서 오너라(veni de libano, SWV 266)>'''. || == 오라토리오, 수난곡 == 쉬츠의 무대음악들은 전부 소실됐지만 '''《예수 그리스도 탄생의 이야기(Historia der Geburt Jesu Christi, SWV 435)》[* 보통은 편하게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 이야기 등으로 불린다.]는 그래도 남아있는 작품중 가장 '오페라'적인 것이다. [[레치타티보]]는 [[성서]] 이야기의 서술 부분이며, 인물들의 대사는 각각 독립된 곡으로 작곡되어 있다. 특히 곡들은 제각기 명확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데, 이러한 성격은 악기법에도 바탕을 두고 있다. 예를 들면 양치기에 [[플루트]], [[빌라도]]에 [[트럼펫]] 이런 식으로. 이 작품은 쉬츠의 말년의 작품 중 하나이지만 새로운 [[이탈리아]] 양식보다는 쉬츠 자신의 이전 양식들이 나타난다. 또 말년에 쉬츠는 3개의 [[수난곡]]을 작곡하는데, 이곡 역시 쉬츠가 그간 사용한 새로운 기법들을 버리고, 절제되고 엄격한 양식을 사용하는데, [[르네상스]] 음악을 연상시키는 무반주 모노디와 무반주 합창 등이 그러하다. 아마도 쉬츠는 자신이 [[독일]]에 들여온 [[이탈리아]] 양식들에 대해 후회에 가까운 기분을 갖고 있었다는 소리도 있고, [[예수]]의 수난과 죽음이라는 무거운 주제에 화려한 음악을 붙이고 싶지 않았다는 설도 있다.[* 실제로,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요한수난곡]]이 격정적이어서 들어 보면 슬퍼지는 것과 대조적이게도, 쉬츠의 요한수난곡은 너무 담담해서 들어 보면 도리어 가슴이 먹먹해진다. 일례로, 같은 코랄이 [[https://youtu.be/1P8SjJYamsU|바흐 요한수난곡에서]]와 [[https://youtu.be/lCKItYvkMlg|쉬츠 요한수난곡에서]] 어떻게 다르게 표현되고 있는지 비교해서 들어 보자.] [[분류:바로크 시대의 작곡가]][[분류:독일의 작곡가]][[분류:1585년 출생]][[분류:1672년 사망]] [include(틀:포크됨2, title=하인리히 쉿츠, d=2023-02-07 08:38:38)]